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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5화 (116/232)
  • 115화

    상업성을 위해 역사 고증을 포기한 사극 <궁녀 덕춘이>에 대해 아주 조금만 알아보자.

    덕춘이와 도적은 어릴 적에 미래를 약속한 소꿉친구다. 아이들의 공약은 하루만 지나도 폐기되기 마련인데, 도적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순진한 놈.’

    다음 왕이 될 왕세자가 침을 발라둔 여자를 노리다니?

    왕세자가 인기 없는 못난 인물이라면 그나마 이해했으리라. 잘생기고, 점잖고, 주인공 앞에서만 멍청하고...

    이 사극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시청자 중 절반에게 욕을 먹는 건 확실할 것 같다.

    (궁금하냐?)

    “...음?”

    (사극의 결말이 궁금하냐?)

    환영회를 마친 선배가 호텔 객실로 돌아온 모양이다.

    (전지은이 이미 알아봤다. 사극은 아직 방영 중이지만, 배우들의 촬영은 끝났으니까.)

    뭐래요?

    (왕세자와 덕순이가 맺어지는 초안을 파기하고, 시청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왕세자와 덕춘이가 맺어지며 끝난다. 너는 모르겠지만, 도적은 주인공의 행복을 방해하는 훼방꾼 취급을 받고 있지.)

    “아...”

    여주인공 덕춘이에게 빙의한 환자만 현실적인 게 아니었다. 대다수 시청자가 같은 생각.

    그런데 조금 의외였다.

    덕순이?

    여주인공 덕춘이의 단짝.

    유명한 여배우가 맡긴 했지만, 감독과 작가가 ‘왕세자빈’으로 밀어주는 인물일 줄은 몰랐다.

    (일정이 궁금하냐?)

    네.

    (이틀 뒤에 올림픽 개막식. 바로 다음 날에 100km 마라톤이 있다. 마라톤 뒤에 다른 종목도 예약한 너를 무모한 미친놈 취급하더라.)

    보통은 그렇죠.

    아무리 운동선수라도 100km 마라톤은 쉽지 않으니까. 여력이 있으면 무리해서 더 빨리 달리기에 무조건 탈진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탈진한 상태에서 다른 종목에 출전한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나리.”

    “아! 어떻게 됐어?”

    나무 그늘 밑에서 도적을 경계하는 나를 덕순이가 찾아왔다.

    “오늘, 해가 떨어지면 덕춘이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처소로 찾아올 예정입니다.”

    “오오!”

    성공한 듯한데?

    “생명의 은인이시고, 왕세자 저하께서도 나리를 신뢰하기에 특별히 허락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호위병 둘이 붙는 건 어쩔 수 없을 듯합니다.”

    “흠... 그래도 고마워.”

    “천만에요.”

    덕순이는 내 얼굴을 5초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수줍게 고개를 돌리며 도망치듯 떠났다.

    “......”

    (이것 봐라? 송선영에게 할 이야깃거리가 생겼군.)

    “...여보세요?”

    저는 아무런 짓도 안 했습니다!

    (그건 신기하긴 하구나. 네놈이 배우의 얼굴을 달고 있는 왕세자와 도적보다 잘생긴 것도 아닌데 말이다. 힘을 중시하는 무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못난 얼굴은 아닙니다. 키도 적당하고 탈모도 없습니다.

    (신체 비율은 나쁘지 않다만, 탈모는 30대가 돼봐야 알 수 있지. 네 모친은 문제없다만, 부친의 머리를 보면 살짝 걱정되는군.)

    “......”

    어머니 이야기는 금지입니다.

    (답답한 녀석.)

    “......”

    나는 선배의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이 오길 기다렸다.

    * * *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여주인공 덕춘이는 친구가 많고, 두루 인정받는 성실한 궁녀로 묘사된다.

    ‘적응하기 힘드네.’

    한 세대의 평균 궁녀의 숫자는 600명 정도다. 나이가 많거나 적어서 여성으로서 매력이 떨어지는 궁녀들을 제외하더라도 최소 100명 이상.

    그녀들은 왕이나 세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자위하면서 외롭게 살아야 한다. 경쟁이 얼마나 치열할지는 안 봐도 훤한데...

    “덕춘아! 정말 축하해!”

    “이젠 편하게 못 부르겠네!”

    “호호! 왕세자빈 저하!”

    분위기가 현실성 없었다. 현대의 여고생들이 편의점에 몰려와서 웃고 떠들 때처럼 생기발랄했으니까.

    즉, 매우 불편했다.

    (너처럼 현실성 따지는 작가와 감독들이 돈을 못 벌지.)

    “......”

    마음대로 생각도 못 합니까?

    (네 적성과 일에 어울리는 성격이란 얘기였다. 환자를 깨우지 못하고 역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으니. 여기는 현실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지.)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준비해라. 네가 말한 현실성 없는 인사가 끝나가고 있다.)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휙.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십니까, 왕세자빈 저하. 세자 저하의 식객 강문수라고 합니다.”

    “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명목은 도적이 그녀를 납치하지 못하도록 호위하는 것.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며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

    “......”

    왕세자가 붙인 호위병이 있기에 언어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지만, 그 정도는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짝사랑하는 사내가 칼을 들고 습격해서 많이 놀라셨지요?”

    “예? 아, 예.”

    환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몇 초 생각하다가 긍정했다.

    “오락에 빠진 당신의 부모님은 처벌받고 있습니다.”

    “제 부모님이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눈치. 그래서 좀 더 강하게 가기로 했다.

    “네. 당신이 적성과 공부를 포기하고 학당 앞에서 일하며 번 돈을 제멋대로 써서 탕진했습니다.”

    “저기...”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실례지만, 제 이야기가 맞나요? 다른 분이랑 혼동하신 것 같은데요.”

    뚝.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덕춘이의 얼굴을 돌아봤다.

    순진무구한 눈동자.

    그녀의 적성은 ‘배우’가 아니기에 이런 진짜 같은 연기를 할 수 없다.

    “의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의녀(醫女)요?”

    “......”

    “왕세자빈이 된 제가 미천한 노비 출신만 하는 의녀를 왜...”

    “실례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공평하게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그를 만났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정말인가요?”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됐나요?”

    “아쉽게도 못 죽였습니다.”

    도적의 순간이동 술법이 사기이긴 하지만, 왕궁의 경비병들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죽일 수 있었으리라.

    “...예?”

    “하지만 큰 부상으로 당분간은 못 움직일 겁니다.”

    “거짓말! 그는 정말 강해요.”

    “그렇다면 정말 강한 그보다 제가 더 강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내 대답을 들은 덕춘이의 표정이 단번에 딱딱해졌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그녀가 사극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환자라면 나를 원수처럼 바라볼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살펴 가십시오.”

    “......”

    끼익- 쿵!

    내 인사를 깔끔히 무시한 덕춘이가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끌려가듯 ‘신혼집’으로 들어갔다.

    (후배야. 너도 같은 생각이지?)

    “...네.”

    환자 윤소라는 사극 <궁녀 덕춘이>의 여주인공 덕춘이가 아니었다.

    * * *

    “이런 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현기증마저 날 지경이었다. 사극 원작이랑 다른 행동을 보인 ‘덕춘이’는 누가 보더라도 환자 같았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올림픽 개막식에 다녀오마. 날뛰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개막식은 이틀이나 남았다고...

    (현실의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아무래도 환자의 건강이랑 연관이 있는 듯하군.)

    “아!”

    (감탄만 할 때가 아니다. 환자에게 남은 시간은 현실을 기준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도 열흘. 네 주치의가 한 말이니 틀림없겠지.)

    “......”

    나도 그 심각성을 눈치챘다.

    꿈보다 현실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건?

    (환자가 꿈속에서 보낼 수 있는 체감 시간은 이틀 정도. 네 주치의가 옆에서 떠드는 설명에 따르면, 컴퓨터가 고장 나서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원리랑 비슷하다는군.)

    이해했다.

    ‘그래서 송선영이 가장 길었구나!’

    내가 송선영의 꿈속에서 보낸 시간은 정신이 피폐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흘러간 기간은 매우 짧은 편에 속했다.

    건강했으니까! 학교 옥상에서 무당 유일암이 발로 툭툭 걷어차긴 했지만, 금방 구조되어 엘몰랑스 병원에 입원한 덕분이다.

    (심지어 매우 빠르지.)

    “맞아요.”

    송선영이 학교 옥상에 누워있던 시간은 길지 않다. 등교 직후부터 계산해도 10시간 미만. 그러나 그녀는 내가 꿈속에 난입하기 전까지 자살만 42번이나 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개막식이 제법 요란하군. 얌전히 있어라. 여기서 넘어지면 평생 인터넷에 박제될 거다.)

    “......”

    잠깐 대화하는 사이에 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됐다.

    (그렇다고 정말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저는 박제되기 싫습니다.

    “후우...”

    절로 나오는 한숨.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설렁설렁 움직여라. 너는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성화(聖火) 행사와 선수단 입장이 끝났다.)

    “벌써?!”

    방금 개막식을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기가 막혔다.

    (곧 선수단 퇴장이 끝난다. 그러면 내일 마라톤까지 약간의 공백이 생기지. 그때를 놓치지 마라.)

    “그래야겠네요.”

    나는 움직여도 된다는 선배의 신호를 차분히 기다렸다.

    “칼을 든 요괴다!”

    “어서 성문을 닫아라! 북쪽-”

    “남대문에서도 옵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놀리듯 검귀가 이 캄캄한 어둠을 이용해서 왕궁을 습격했다.

    심지어 전혀 다른 두 방향!

    최소 2마리.

    놈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양동작전이라고 봐야 했다.

    ‘기다려야지.’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사기적인 능력을 보유한 왕궁의 궁기병들이 싹 막아줄 것이다.

    철컥.

    그때, 내가 지키는 별궁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완전무장한 왕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하?”

    왕세자가 직접 전장에 나갈 듯했다.

    “성문이 돌파당했네.”

    “......”

    “그대는 이 혼란을 틈타서 침투할지도 모르는 역적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게. 훗날 이 나라의 국모(國母)가 될 여인일세.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흠. 대국의 무술을 믿어보지.”

    “......”

    내가 아닌 중원을 신뢰하는 왕세자가 새하얀 백마를 타고 떠났다.

    “히이잉~!”

    다그닥다그닥!

    도적의 전투력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사냥과 무예를 즐긴 왕세자는 아주 뛰어난 궁기병. 쉽게 당하거나 전투에 방해가 되진 않으리라.

    “안채로 드시지요.”

    “내가?”

    나이 많은 궁녀가 다가오더니 덕춘이의 호위를 지시했다.

    “왕세자 저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왕세자빈 저하를 가까이서 호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지.”

    “이쪽입니다.”

    이럴 시간이 없지만, 왕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조사하려면 왕세자의 협조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덕춘이는 왕세자빈의 품격에 어울리는 몸단장 중이었다.

    검귀가 습격해오기 전까지 왕세자랑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정한 모습.

    “수고하셨어요.”

    “저하. 말씀을 낮춰주소서.”

    “...수고했네.”

    “물러나겠사옵니다.”

    스윽-

    치장을 끝낸 궁녀들이 시중들 한 명만 남기고 전부 퇴장했다.

    “금방 또 보는구나.”

    덕춘이가 나를 냉랭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궁녀들을 대할 때랑 확실히 다른 온도 차이.

    이유를 알 것 같다.

    “역적을 아직 잊지 못하셨군요.”

    “...불필요한 말을 삼가라.”

    “저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지만,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누가 그녀에게 왕세자를 선택하라고 부추겼을까? 이것만 알 수 있다면 환자를 특정할 수 있다.

    친구, 부모, 상궁, 연적...

    덕춘이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 후보가 많지 않지만,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

    “......”

    “...꼭 그래야 했느냐?”

    스스로 침묵을 먼저 깬 그녀가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가 먼저 저를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나는 안다.

    도적이 백두산에서 내려온 이유는 덕춘이 때문이지만, 명목은 이 나라의 백성들을 해치는 요괴 토벌.

    덕춘이가 왕세자를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인 이유도, 그가 부모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왕(王)의 분노를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후배야. 침대에 누웠다. 마음껏 싸워도 돼.)

    “...야. 들켰어.”

    “뭔- 꺅?!”

    순간이동으로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덕춘이의 뒤편에 출현한 도적.

    덥석.

    그는 왼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 동시에 문을 부수고 도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히 나는,

    “어딜 가?”

    “이놈...!”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적이 여주인공 덕춘이를 쉽게 납치할 수 없는 이유.

    순간이동은 혼자만 가능하다. 타인도 됐다면 사극 <궁녀 덕춘이>는 1화에 욕먹고 종방했으리라.

    (후배야. 저 새끼의 머리를 손으로 때려봐라.)

    왜요?

    (백두산에서 뭘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하거든.)

    “같이 죽어라!”

    “헉!”

    “꺄앗?!”

    환도(環刀)로 둘을 사이좋게 베어버리려는 내 행동에 식겁한 도적이 덕춘이를 옆으로 밀쳤다.

    부웅-

    손맛 없이 허공만 갈랐다.

    (...너, 내 말을 들은 거 맞냐?)

    “하핫!”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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