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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4화 (115/232)
  • 114화

    “도깨비다!”

    “가마를 지켜-”

    서걱!

    왕세자와 궁녀가 탄 가마를 호위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짚단처럼 베였다.

    ‘무리지.’

    태평하게 구경하고 싶지만, 검귀의 네 팔과 두 다리는 저항감 없이 무엇이든 썰어버린다. 잠깐 한눈팔면 가마째 환자도 절단되리라.

    끼기긱-?

    조용히 기습해서 순식간에 끝낼 생각이었는데, 내 존재를 바로 눈치챈 검귀가 고개를 돌렸다.

    “쯧!”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검귀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피할 수 있을까?

    못 피하면 죽을 뿐이다.

    휘이잉-

    칼처럼 생긴 2쌍의 팔이 공기를 가르며 나에게 휘둘러졌다.

    ‘틈이 없네!’

    멋지게 회피하면서 발차기를 먹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하압!”

    나도 마법소년 최강민의 꿈속에서 도망치기만 할 때랑 다르다.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운 빙판 위를 질주하듯 움직이는 검귀. 그 탓에 놈들은 방향을 전환하려면 포물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반격만 포기하면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의미!

    끼긱?!

    검귀가 옆으로 빠져나가는 내게 팔을 휘둘러보지만, 팔의 길이를 늘리는 능력은 없기에 닿지 않는다.

    ‘창! 창이 필요해...!’

    철판도 한 번에 뚫을 수 있는 굵고 단단한 창이!

    내 특기는 발렌타인에게 배운 칼이지만,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칼을 6자루나 동시에 휘두르는 검귀를 상대로 만용을 부리진 않는다.

    끼기긱!

    “악?!”

    “크억?!”

    나를 놓친 검귀가 주위에 걸리적거리는 병사들을 베어버리며 빠르게 다시 돌진했다.

    ‘좋아!’

    그것은 철로 된 깃대였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창은 창대가 나무로 되어있어서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궁에서 괜찮은 무기를 구해왔을 텐데!

    기회는 단 한 번.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흡!”

    로맨스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잠깐 배운 창술. 나의 훈련을 맡은 교관은 그중에서도 단 하나만 속성으로 가르쳤다.

    찌르기.

    창술의 시작과 끝.

    기회가 되면 제대로 배워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한 방이다.

    ‘지금...!’

    펄럭~

    깃대에서 분리한 깃발을 펼쳐서 검귀의 시야를 가렸다.

    끽-!

    바로 절단됐지만, 그것이 검귀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사람이라면 손으로 밀쳐서 깃발을 뭉텅이째 치웠을 테지만, 손이 칼날처럼 생긴 검귀는 달랐다.

    살랑살랑~

    수십 조각이 난 깃발이 허공에 낙엽처럼 머물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물론, 그것도 잠깐이지만, 내게는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흡...!”

    활시위를 놓듯이 깃대를 움켜쥔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탁.

    동시에 한걸음 전진! 검귀의 네 팔이 교차하는 틈새로 깃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윽?!”

    검귀랑 정면충돌한 내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됐다.

    주욱...

    깃대를 꽉 움켜쥔 두 손바닥의 살가죽이 벗겨졌다.

    ‘무조건 버텨!’

    깃대의 첨단이 검귀의 가슴 정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핵심은 표적이랑 정확히 수직!

    힘의 분산이 가장 적고, 관통에 실패해도 창끝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몸의 무게중심이 깨지는 추태를 방지해주기 때문이다.

    “......”

    말을 못 하는 검귀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댕강! 댕강! 댕강...!

    그 직후에 깃대는 여러 토막으로 썰렸지만, 이미 목적을 달성한 후였기에 크게 상관없었다.

    쿵!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벌러덩 넘어진 검귀.

    곧바로 몸을 일으키기 위해 2쌍의 팔을 움직였다.

    푹, 푹.

    무엇이든 썰어버리는 손답게 땅을 짚지 못하고 박혔다. 그래도 몇 초 이내에 일어설 듯하지만,

    “안녕.”

    “......”

    놈에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빡!

    다리의 칼날 옆면을 힘껏, 송선영이 구두로 내 발등을 밟을 때처럼 내려쳐서 부러트렸다.

    ‘이건...?’

    내 발을 강하게 밀쳐내는 감각.

    나와 검귀, 우리의 세계가 충돌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넌 대체...?”

    “......”

    무심코 질문했다. 그러나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검귀가 순순히 대답해줄 리 만무했다. 애초에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빡!

    반대편 다리도 바로 부러트렸다.

    ‘같은 원리였구나!’

    지면(地面)과 수면(水面)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검귀의 비정상적인 움직임과 무엇이든 공기처럼 베어버리는 손발의 칼날!

    놈도 나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몸 주위에 구축한 덕분이었다.

    “공격해라!”

    “네. 세자 저하!”

    “머리를 노려!”

    가마에서 내린 왕세자가 뒤늦게 지시를 내렸다.

    대충 옷걸이 위에 걸치다시피 한 단정하지 못한 복장과 흐트러진 머리.

    궁녀랑 가마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와! 이 와중에도 멋지네!’

    잘생긴 남자는 뭘 해도 멋지다는 말이 실감됐다.

    “세자 저하.”

    “멈춰라!”

    캉! 캉!

    왕세자에게 접근하는 내 앞을 막아선 병사들이 창끝을 겨누며 위협했다.

    “됐다.”

    “하지만 세자 저하! 그 역적처럼 정체가 불확실한 자입니다!”

    “됐다고 했다.”

    “...네. 저하.”

    병사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창을 거두며 좌우로 물러났다.

    ‘용기가 대단하네.’

    미래에 왕(王)이 될 남자답다.

    돌이켜보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 등장하는 왕자와 황제도 정말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외모, 지략, 예절, 철학...

    모두가 우수한 통치자들이었다. 여주인공 ‘안질리나 치맥’만 관련되면 판단력과 지능이 급격히 떨어졌을 뿐!

    “그대는 누구인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중원의 고승(高僧)에게 무술을 배운 야인입니다.”

    “오! 어쩐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대국에서 왔었군!”

    유교의 발상지를 부모처럼 섬기던 나라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왕세자다운 태도였다.

    그때,

    “으아악~?!”

    “다, 다시 움직인다!”

    “저하를 지켜라!”

    두 다리를 잃은 검귀가 2쌍의 팔 중에 아래 한 쌍을 지지대 삼아서 땅 위를 질주했다.

    “......”

    온몸은 이미 만신창이.

    특히, 병사들의 창에 집중적으로 찔린 얼굴은 두 눈구멍이 뻥 뚫린 채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서걱-

    그래도 흉흉한 기세는 여전했다.

    한 쌍의 팔로 병사들의 허리를 절단하면서 나에게 돌진!

    긴장감보다는 흥미가 앞섰다.

    ‘저런 변환이 가능했군?’

    절삭력에 특화된 팔을 다리처럼 미끄러지도록 ‘세계’를 전환했다. 살짝 조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손을 바퀴로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지식.

    당장 활용은 무리지만, 검귀가 가능하다면 나도 할 수 있으리라.

    “흐음~”

    보자마자 견적이 나왔다.

    슥-

    언제든 발차기를 할 수 있도록 태권도 준비 자세를 취했다.

    “무슨...?”

    “저것을 막아!”

    “저하! 어서 피하셔야...!”

    푹! 푹! 푹!

    거리가 가까워지자 검귀는 병사들의 모든 공격을 무시하고 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

    검귀의 두 팔이 내 목과 허리를 노리며 횡으로 휘둘러졌고,

    “훕!”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춘 나는 두 칼날이 닿기 전에 먼저 파고들며 놈의 복부를 오른발로 밀어쳤다.

    퍽- 우득!

    두 팔의 힘이 힘껏 들어간 깃대로도 넘어트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옆차기 한 방에 척추까지?

    심지어, 나에게 도전했던 무수히 많은 태권도 선수들처럼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헉?!”

    “허걱?!”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앞에서 본 왕세자와 병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경악했다.

    ‘이거지!’

    내가 바라던 그림이다.

    (이 금붕어 새끼야! 내가 적당히 날뛰라고 말한 걸 벌써 잊었냐?! 발이 꼬여서 넘어질 뻔했잖아!)

    “......”

    선배님. 안 넘어졌으면 됐잖아요?

    (오! 그래? 넘어질 뻔한 네 몸뚱이를 전지은이 잽싸게 부축해줬다.)

    ...뭐?

    (그래서 송선영의 표정이 매우 안 좋아. 어째서 잘못은 네가 했는데, 잔소리는 내 몫이냐?)

    “......”

    위험했다.

    (한 번만 더 무시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알몸으로 춤추는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뿌려버릴 테니까.)

    “쿨럭!”

    중원을 피로 물들인 저 남자라면 단순한 경고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무서웠다.

    (시험해볼래?)

    아뇨.

    (똑바로 해라. 나는 송선영의 잔소리를 마저 들으러 간다.)

    네! 죄송합니다! 선배님!

    “신묘하군. 대국의 무술이 대단하다는 세간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군(君)의 눈으로 직접 보니 평가절하된 듯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세자 저하.”

    검귀를 쓰러트린 ‘중원의 무술’을 칭찬하는 왕세자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태권도는 이 나라의 후손들이 창시한 현대 무술...’

    내가 착각하도록 유도하긴 했지만, 사극 원작에 나오지 않는 왕세자의 정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역사 고증이란 거겠지.

    “큰 빚을 졌구나.”

    “아닙니다.”

    “이대로 떠나보내면 과인은 웃음거리가 될 터. 궁까지 함께해주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흠.”

    내 대답에 만족한 왕세자가 다시 가마에 올라탔다.

    탁.

    원래는 애인이랑 좀 더 오랫동안, 진하게 드라이브할 예정이었던 왕세자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귀가했다.

    ‘순조롭군.’

    중원의 무술을 인정받은 나는 왕궁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 * *

    ‘...아름답네.’

    전날에는 도망치기 바빠서 왕궁 내부를 구경할 틈이 없었는데, 왕세자의 손님이 된 현재는 달랐다.

    이른 봄에 수줍게 핀 매화와 난의 은은한 향기, 늘 푸른 대나무와 가을을 기다리는 국화까지.

    매난국죽(梅蘭菊竹).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상징하는 네 가지 식물이 왕궁 곳곳에 자라고 있었는데, 현재는 매화나무의 꽃이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에게 무슨 용무라도?”

    나는 왕세자의 별궁 옆에 심어진 매화나무 밑에서 도적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나리.”

    그런 나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덕순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빗자루로 마당에 떨어진 매화의 꽃잎을 치우던 그녀는 내가 시선을 떼면 금방 또 힐끔힐끔.

    곤란했다.

    ‘송선영을 만나기 전에는 여자친구가 생길 기미가 전혀 안 보이더만...’

    사극 원작을 떠올려보니, 이 궁녀는 단짝인 여주인공의 연애와 젊은 남자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봤자 왕이나 세자의 눈에 못 들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끝날 인생이지만.

    “또 가겠소!”

    “하읏-?!”

    내 청각이 발달한 탓이지만, 별궁 안에서 들려오는 젊은 남녀의 야릇한 신음이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부모, 왕과 왕비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2세 만들기에 돌입한 왕세자!

    ‘저래도 되나?’

    부모는 아들의 상사병이 치료된 사실에 기뻐하며, 둘의 관계를 흔쾌히 수락해준 모양이다.

    그게 사극 설정이기도 하고!

    도적이랑 연애하는 현장을 수차례 발각된 덕춘이가 단 한 번도 처벌받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의 규칙은 절대적이기에.

    “...덕순아.”

    “네? 네! 나리!”

    나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궁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덕순이.

    이 시대 여자들의 이름은 추락한 인권만큼 안타까웠다.

    “너는 왕세자빈 저하랑 친구지?”

    “...네. 6살 때부터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자랐습니다.”

    “왕세자빈 저하께 방해꾼 문제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줄 수 있을까?”

    방해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으리라.

    왕세자빈이 되기로 마음먹은 라누벨 환자, 윤소라에게 도적은 왕궁에 침투해서 자신을 납치할 가능성이 있는 무시무시한 스토커!

    제거 대상 1순위다.

    “죄송합니다, 나리. 소녀도 저하를 만나기가 이젠 쉽지 않아서...”

    “부탁하마.”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미봉이랑 동행한 사실을 송선영에게 들킨 사건을 계기로 약속했다.

    미녀의 도움을 안 받기!

    하지만 이 정도는 허용범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나리...”

    “안 될까?”

    “외람되오나, 덕춘이는 곧 정식으로 왕세자빈이 됩니다. 외간남자를 만나선 안 되는 신분이에요.”

    “흠...”

    사극 원작에서 덕춘이의 단짝 ‘덕순이’는 굉장히 촐싹대고 생각이 단순한 감초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

    ‘친구가 걱정돼서?’

    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갈고 닦은 부드러운 영업용 미소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머!”

    저기요? 남들이 보면 오해할 표정은 곤란합니다.

    “방법이 없을까?”

    “정 그러시면... 알아볼게요.”

    “고마워.”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도적을 바로 버리고 왕세자빈이 된 환자를 설득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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