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6장-3절] 현실적인데?
혈신에게 ‘나의 세계’를 배운 덕분에 꿈의 세계에서 정한 규칙을 무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런 나도 지킬 수밖에 없는 규칙이 있다.
처음 들어올 때는 환자 근처.
두 번째부터는 최근에 죽은 위치!
용암에 빠져 죽었거나 감옥에서 갇혀 굶어 죽었다면, 그 꿈은 깔끔히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들어가도 어차피 또 죽을 테니까.
‘아주 좋아.’
시작 복장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내가 편하게 입었던 청색 도복(道服).
나의 세계로 강화된 육체는 마오짜이를 상대했을 때보다 우수했다.
“누구냐!”
“침입자다!”
내가 사극 <궁녀 덕춘이>의 남주인공 ‘도적’에게 허리가 절단되며 죽은 장소는 성벽 위.
곧바로 경비병들에게 들킨 나는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서둘러야 해.’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왕궁 어딘가에 있는 라누벨 환자를 찾아서 설득하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
팟!
가볍게 땅을 박차서 궁궐의 기와지붕까지 단숨에 도약!
“어디로... 저기다!”
“지붕 위에 있다!”
나처럼 높게 뛰어오를 수 없는 경비병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기와지붕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활을 쏴...”
“멈춰라!”
“궁궐 안이다!”
눈먼 화살에 관리와 궁녀 등이 맞을 수도 있기에 완전히 손 놓고 따라오기만 하는 장수들.
나는 먼 거리의 기와집 지붕을 밟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쉽네.’
예전에는 왕궁 곳곳에 배치된 경비병들을 따돌리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꿈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빠른 발, 넓은 시야, 예민한 청각...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빠져나갔다.
탁.
기와지붕을 내려와서 아무도 없는 헛간 천장에 바짝 매달렸다.
“사라졌다!”
“무조건 찾아!”
장수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나를 찾을 순 없겠지만.
“고생이 많-”
(답답한 후배.)
휘청.
갑자기 머릿속에 울리는 친숙한 목소리에 놀라서 하마터면 천장에서 떨어질 뻔했다.
“설마, 혈신...?”
(어허! 다음에 만나면 선배라고 부르기로 했을 텐데.)
“...선배. 하지만 어떻게?”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혈신이랑 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 마오짜이가 아닌 윤소라의 꿈속일 텐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긴. 답답한 후배. 현세로 데려간다는 약속도 꿈이랑 사라질 줄 알았냐?)
“......”
정확하게 봤다.
(후배. 네가 머리를 써봤자 내 손바닥 위다.)
쓸데없는 참견과 잔소리를 ‘또’ 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쓸데없다고?)
“네.”
(현실의 네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는 내가 쓸데없다고?)
“...네?”
이건 무슨 날벼락 맞을 소리야?
* * *
어두컴컴한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후배야.)
네. 선배님!
(앞으로 잘해라. 발렌타인과 박한희의 존재를 여자친구에게 전부 말해버리는 수가 있다.)
“......”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간신히 용서받았는데, 여기서 또 한 번 터지면 수습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즉, 잘못 걸렸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가만히 누워있다가 봉변당할 수도 있잖으냐? 하지만 내가 있으면 안전하지.)
“뭐...”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마오짜이의 조카나 태권도 선수들처럼 나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이 습격할 수도 있으니까. 엘몰랑스 병원의 보안을 믿긴 하지만,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이 늘 존재했다.
(공항으로 이동 중이다.)
벌써요?
(환자랑 거리가 멀리 떨어져도 괜찮은지 시험한다는군. 지금까지는 환자나 네가 위험할 수도 있어서 시도하지 않았지만.)
“어...?”
서혜주 과장님은 윤소라가 죽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다. 치료하지 못하면 어차피 며칠 내로 죽을 테니까.
그러면 나는?
거리가 너무 멀면, 환자의 꿈에 들어간 내가 원래의 육체로 못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고작 거리로 깨질 하찮은 계약이었다면 진즉에 끊어졌다.)
“과연...”
(아는 척하지 마라.)
“......”
죄송합니다.
(나는 구경만 할 거다. 현실의 네 몸뚱이를 조종하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거든. 지금은 비행기 좌석에 가만히 누워있기 때문에 잠시 편하게 대화할 뿐이지.)
...선배는 목적이 뭐에요?
(답답한 너를 돕는 목적은 간단해. 네가 데이트 장소를 바꿔가면서 수시로 송선영의 다리를 훔쳐보는 이유랑 흡사하지.)
“쿨럭!”
(음란마귀 새끼. 네 취향 탓에 내가 가짜란 사실을 금방 들켰다.)
선영이에게요?
(그래! 아무튼, 여러 세계를 보고 싶을 뿐이다. 위로 더 올라가봤자 거기서 거기고.)
왕궁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판단한 나는 천장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좋아.’
극도로 발달한 내 청각이 주위에 사람이 없다고 알려줬다.
“침입자다!”
“동대문이다!”
“또 왔다~!”
들켰을 리 없는데,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하자마자 장수와 병사들이 시끄러워졌다.
방향은 동쪽.
무시하고 왕세자를 만나서 협력을 제안하거나, 나라를 흔들 만큼 아름답다는 설정의 궁녀로 둔갑 중인 환자를 찾으러...
“아니지.”
혼란을 틈타서 도적을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왕세자에게 협력을 제안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도적의 뒤를 밟으면 궁녀의 위치도 알 수 있지. 괜찮은 판단이다.)
“네.”
사극 <궁녀 덕춘이>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도적 새끼는 심각한 애정 결핍 장애가 있었다.
순간이동을 조금만 활용하면 안 들키고 궁녀를 만날 수 있는데, 왕궁의 경비병이나 궁녀 등에게 매번 들켜서 소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뭘까? 관심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
(바보냐?)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왕세자가 있는 중앙의 대궐이 아닌 동쪽으로 향하며 물었다.
(그래야 드라마 분량이 나오지. 땅 파서 장사해? 전체관람가에서 남녀가 할 게 뭐가 있냐? 분위기 잡고 주둥이 좀 털다가 심의에 안 걸릴 정도로 가볍게 포옹한 후에 입맞춤하면 끝. 생각 좀 하며 살아라.)
“......”
(그냥 재미로 봐. 시대 고증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중원에서 넘어온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 인권은 밑바닥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선택? 몰매 맞고 죽겠다는 소리지.)
“잘 아시네요.”
살짝 분노한 것 같기도 했다.
(아아, 당연하다. 내가 중원을 피로 물들인 이유 중 하나니까. 유교 사상이 뿌리내리기 전에 말살할 계획이었다. 실패했지만.)
“...다 왔네요.”
대화하는 사이에 반쯤 붕괴한 동쪽 성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데?’
도적은 애정 결핍으로 관심받기를 좋아하지만,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는 병사들이랑 대치하지 않고 적당히 농락하다가 따돌렸다.
이건 사극 원작 작가와 감독이 정한 세계의 규칙.
그렇다면 이건 무슨 상황일까?
“아악?!”
“컥?!”
병사들의 고통 섞인 비명이 지나치게 많았다.
‘도적답지 않아.’
나는 허리가 잘렸지만, 도적은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인물 설정이 존재하니까.
멋진 액션은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무의미한 살인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비호감을 사기 때문이다. 시대 고증을 무시한 현대인의 감성으로 보더라도 살인을 즐기는 미남을 사랑하는 건 무리수기에.
서걱-
그때, 단단한 성문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뚫렸다.
“어? 어어?!”
끼기긱-
칼날처럼 생긴 두 쌍의 팔과 다리를 가진 인형이 성벽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저건...
(너의 영원한 친구, 검귀로군.)
“아니거든요... 어?!”
끼긱-
끼기긱-
한 마리가 아니었다. 온몸에 인간의 피를 뒤집어쓴 검귀가 뚫린 성문을 통해 추가로 들어왔다.
총 2마리.
굳이 구분하자면 남성형 검귀와 여성형 검귀.
“접근하지 마라!”
“활을 쏴!”
“창으로 찔러!”
근거리에서 총알도 관통하지 못한 검귀의 강철 같은 피부에 화살촉이 박힐 리 없었다.
끼긱-
“사, 살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도 예능 담당처럼 무능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었기에 더욱 심했다.
그나마,
“히이잉~!”
“히잉~!”
예전에 나를 애먹였던 궁기병들이 검귀를 도발하듯 멀리서 활을 쏘며 똑바로 견제하고 있었다.
팅, 팅, 푹...!
숨어서 여주인공에게 치료받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도적의 팔뚝에 박혔던 전적이 있는 궁기병의 화살은 검귀를 위협할 만큼 강력했다.
‘작품 고증 미쳤네!’
상업성을 위해 시대 배경은 시원하게 무시하지만, 사극 <궁녀 덕춘이>에 한 번이라도 등장한 작품 설정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끼기긱-?!
끼긱...?!
저건 달리는 준마(駿馬) 위에서 인간이 활대를 당겨 낼 수 있는 화살의 위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히익?! 죽기 싫-”
서걱!
말을 타지 않은 일반병사는 검귀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궁기병들도 아군 사이로 파고든 놈들을 쏘지 못하고 우왕좌왕.
검귀 둘이서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했군. 입국 절차를 밟아야 해서 당분간 정신없을 테니, 그동안 혼자 놀고 있어라.)
“이게 노는 거로 보이세요?”
(......)
대답은 없었다. 정말로 비행기에서 내리느라 정신없는 걸까.
일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앞의 상황 분석에 집중하기로 했다.
‘피해가 크긴 해도 자력으로 막긴 하겠네.’
궁기병이 그만큼 사기적이었다.
문제는,
“또 요괴가 침입하다니...”
“점점 침입하는 빈도가 많아지는 것 같지 않아?”
“어? 나도 느꼈어. 둘이었던 적은 오늘이 처음이고.”
궁기병들이 쏜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고 죽은 두 검귀를 보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병사들.
검귀의 습격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출현 조건이 있나?’
나는 이 상황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왜?
예전에 보았으니까. 배신으로 살해된 라누벨 환자, 남해수가 꿈속에서 검귀로 변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사극 <궁녀 덕춘이>에 검귀랑 비슷한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크게 한몫했다.
‘세계의 규칙에 없는 존재.’
그렇다면 나처럼 외부에서 침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놈들의 목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토록 와닿은 적도 없으리라.
“가볼까.”
왕궁에 침입한 검귀를 도적으로 착각해서 헛걸음하긴 했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됐다.
탁-
몸을 돌린 나는 기와지붕을 밟으며 중앙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
환자의 건강이 좋았다면 검귀에 대해 좀 더 조사해봤겠지만, 지금은 여유부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괜히 올림픽을 포기했던 게 아니다.
왕세자의 숙소.
어째선지 매우 어두웠다.
“흠...”
다음 왕이 되기 위해 한창 제왕학을 공부할 시간인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선 방 안에 아예 없는 듯했다.
이 상황을 추측해보자면?
왕세자가 침입자를 직접 처치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는 그게 상식이다. 왕세자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도적을 추적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니까.
‘엇갈린 모양인데...’
또 헛걸음했다는 생각에 혀를 차며 몸을 돌릴 때였다.
“음?”
“어?”
내 허리를 절단한 도적이랑 기와지붕 위에서 딱 마주쳤다.
팟-!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와장창!
내가 방금까지 서 있었던 지붕 주변의 기왓장이 우수수 파괴되고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피했다!’
반응을 전혀 못 하고 허무하게 당했던 저번이랑 달랐다.
그 의미는?
“같은 수법은 안 통해.”
사망으로 잃어버린 내 능력의 원한을 갚을 수 있다!
“...제법인데?”
“웃어? 척추를 뽑아주마!”
와장창~!
내가 올림픽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원흉을 향해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