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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1화 (112/232)
  • 111화

    ‘강문수, 착각하면 안 돼. 내가 무당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올림픽 출전은 꿈도 못 꿨어.’

    내 적성은 무당. 운동선수는 무당의 일을 하면서 발생한 부산물로 하는 부업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애? 동정심?

    전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내 목적은 환자의 꿈속에 들어가서 현실에도 반영되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이건 나를 위해서야.”

    “어딜 봐서?”

    “힘든 현실을 벗어나서 달콤한 꿈을 꾸는 환자를 억지로 깨우잖아? 그러니 나를 위해서지.”

    꿈속에서 빠져나오려면 환자를 설득하거나 죽여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치료할 뿐이다.

    이건 나를 위한 이기적인 결정.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는 환자의 꿈은 파악이 끝났기에 내게는 안전한 놀이터나 다름없다.

    “고집쟁이네.”

    송선영이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권도 협회에서 발광할 것 같네. 선수들을 전부 박살 내놓고 올림픽에 불참하면.”

    서혜주 과장님이 각오하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쪽은 신경 안 써요. 불만이면 또 덤벼보라죠. 그보다는 스포츠토토를 못 하게 돼서 아쉽네요.”

    “그건 나도 아쉽거든?”

    “어? 과장님도 스포츠토토를 하셨어요?”

    “아니. 하지만 너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잖니? 연구자금은 많을수록 좋아.”

    “아하!”

    송선영이 무척 어이없다는 듯이 핀잔줬다.

    “엄마도 아빠 몰래 비상금을 털어서 스포츠토토를 하겠다던데. 사람 생각은 다 똑같네.”

    “너는?”

    “...남자친구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조금 할 생각이었지.”

    “그랬구나.”

    우리는 빠르게 준비에 착수했다.

    * * *

    “치료비를 부모에게 청구해줘. 낼 수 없다면 친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환자에게 전가하고.”

    “전가하는 목적은?”

    내가 연락하지 않았음에도 귀신같이 알고 병원을 찾아온 전지은. 그녀는 사정을 듣자마자 조건 없이 가문의 법무팀을 빌려줬다.

    “환자를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시키고 싶어.”

    “...착하네.”

    “오해하지 말아줘. 치료비를 받아내고 싶을 뿐이니까.”

    “이해했어.”

    송선영은 전지은을 매우 좋아하지 않지만, 다방면으로 유능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로 준비 완료.

    나는 여전히 불편한 얼굴을 한 송선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무인도는 안 돼.”

    “다, 당연하지!”

    아직도 그 파기된 계획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빨리 와.”

    “올림픽을 포기하기에는 일러. 가문의 전용기를 대기해둘게. 개막식 전에만 도착하면 참가할 수 있어.”

    내 대답을 가로채듯 전지은이 태연하게 끼어들었다.

    이러면 당연히,

    “언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마오짜이 아저씨의 전용기를 타기로 했으니까요!”

    송선영이 짜증 낼 줄 알았다.

    “어머! 송선영 양. 그 계획은 사전에 문수에게 들어서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대비책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헛수고하시네요!”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

    “......”

    한 소녀는 매우 싫다는 얼굴로, 다른 소녀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서로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괜찮은 걸까?

    라누벨 환자들이 꿈에서 안 깨어나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과장님! 뒷일을 부탁할게요!”

    “하아... 너는 주치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과장님도 일부 책임이 있거든요?”

    그녀가 무당 가문에 나를 소개해서 분란의 씨앗을 끌어들였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책임!”

    “...알겠어. 빨리 다녀오기나 해.”

    “감사합니다!”

    탁.

    뼈와 가죽만 남은 윤소라 양의 앙상한 왼손에 내 오른손을 포갰다.

    * * *

    무한히 반복되는 꿈에서 깨어난 송선영이 본 세상은 개성 없는 흑백 영화랑 비슷했다.

    저 여자도, 저 남자도, 저 아이도...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이 마네킹처럼 보였다. 사회생활을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대해주긴 하지만, 그녀의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왜?

    ‘나는 꿈에서 깨어난 걸까?’

    자살을 자주 반복했을 때도 몸이 피곤하면 잠을 잤다. 그리고 눈을 뜨면 어김없이 ‘내일’이 찾아왔다.

    뭐가 바뀌었지?

    똑같다.

    강문수가 무릎 꿇고 애원해서 자살을 그만뒀지만, 지금도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과거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시험하지 않는 이유는,

    “...바보야.”

    순전히 강문수 때문이다.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인간. 그리고 남자.

    과거로 돌아가도 기억을 잃지 않기에 이론상으로는 영원히 함께하는 운명의 동반자였다.

    이브와 아담.

    최초의 여자와 최초의 남자.

    송선영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강문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를 쳐다봐?’

    마네킹 따위랑 비교됐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끓었다. 자살해서 초기화하고 싶었을 만큼!

    그런데도 참은 이유는?

    “......”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가 앉은 소녀는 곤히 잠든 소년의 태평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처음보다 남자답게 변한 얼굴.

    얼굴만이 아니다. 약 1년 동안 체격도 좋아졌고, 주위에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며 ‘힘’이 생겼다.

    그런데,

    ‘초기화되면 허탈해하겠지.’

    기억을 잃지 않은 강문수는 틀림없이 그녀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서 참았다.

    “...다음에는 어림없지만.”

    또 마네킹에 한눈팔면 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릴 거다. 그때는 지은 죄가 있어서 원망하지 못하겠지!

    번뜩-!

    “어?”

    “...성공했군.”

    “어어?!”

    송선영은 라누벨 환자의 꿈에 들어간 강문수가 5분도 안 지나서 눈을 다시 뜨는 바람에 당황했다.

    “무슨 일... 벌써?”

    능숙하게 링거를 준비 중이던 서혜주 과장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뚝.

    소파에 앉아서 가문의 법무팀이랑 통화하던 전지은이 스마트폰을 끄고 일어섰다.

    “설마, 또 당했어?”

    송선영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환자를 돌아본 후에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니. 아무래도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 같아.”

    “새로운 능력?”

    “이젠 꿈과 현실, 두 세계를 동시에 활동할 수 있어.”

    “아!”

    강문수의 차분한 설명을 들은 송선영은 탄성을 터트렸다.

    꿈 혹은 현실.

    매번 선택과 희생을 강요받았던 강문수에게도, 그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송선영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했어?”

    링거를 내려놓은 서혜주 과장이 짙은 흥미를 드러냈다.

    의사에서 연구자로.

    그녀가 강문수를 돕는 가장 큰 이유이자 원동력일 것이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집중력 훈련을 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 같아요.”

    “집중력 훈련?”

    “무림인들이 폭포 밑에서 가부좌하고 하는 수련 같은 거요.”

    “연관성을 못 찾겠는걸.”

    “저도 아직 혼란스러워요. 두 세계의 시야가 겹쳐서 보이고, 소리도 뒤섞여서 들리고... 진짜 정신없네요.”

    강문수는 두통을 호소하듯 머리를 문지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서혜주 과장이 수첩을 들었다.

    “흐응~ 두 세계를 공유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니? 가상현실게임 아바타와 현실의 몸을 동시에 조종하는 감각이려나? 매우 흥미로워.”

    “과장님. 실험은 사양할게요. 가상현실게임도 해본 적 없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봐.”

    “정중히 사양할게요. 가상현실은 꿈으로 충분해요.”

    “유감인걸.”

    하지만 서혜주 과장은 전혀 포기한 말투가 아니었다.

    “문수야, 축하해. 예정대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겠네.”

    짝짝!

    입가에 미소를 그린 전지은이 가볍게 손뼉을 치면서 무산될 뻔한 강문수의 올림픽 참가를 축하해줬다.

    “고마워. 쭉 어지러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네. 나도 올림픽을 포기하기 아쉬웠거든.”

    “어지러워?”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양쪽을 전부 보고 있으니까.”

    “경기를 뛸 수 있겠어?”

    “어... 아마도?”

    강문수의 말투는 참가에 의미를 두자는 수준으로 매우 가벼웠다.

    “가서 망신 안 당하려면 발이 꼬여서 넘어지거나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겠는걸?”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내가 도와줄게. 환자인 윤소라 양이나 사극 <궁녀 덕춘이> 정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아! 맞네! 앞으로는 확실히 편리하겠는걸?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겠어!”

    기뻐하는 강문수에게 전지은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당장 활용해볼래? 예정에 없었지만, 사극 <궁녀 덕춘이> 촬영장에 가보자. 네가 원한다면 감독과 작가의 만남을 추진해볼게.”

    “좋은 생각이긴 한데...”

    강문수는 조심스럽게 송선영의 눈치를 봤다.

    “괜찮아. 이건 일이잖아?”

    “어흠! 최근에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러면 물어봐. 나는 같이 가도 상관없어.”

    전지은의 대범한 태도는 1살 연하의 소녀를 도발하는 듯했다.

    네 그릇은 어느 정도냐고.

    “흠... 선영아?”

    강문수는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여자친구를 불렀다.

    “너, 누구야?”

    “음? 선영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냐니.”

    “너는 문수가 아니야.”

    “저기요? 나는 아직 아무런 잘못도 안 했거든요?”

    여자친구의 비난에 소년은 매우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의했다.

    “나를 봐.”

    “보고 있는데?”

    “틀려. 강문수는 틈만 나면 내 다리를 훔쳐보니까. 하지만 너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단 한 번도.”

    “......”

    “너는 문수가 아니야.”

    송선영은 강문수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며 단언했다.

    “......”

    “......”

    “...하핫! 진짜 대단한걸!”

    존재를 부정당한 소년은 짧은 침묵을 깨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너는 누구야?”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음란마귀 흉내는 무리였나? 아니면 이 짧은 시간에 간파해낸 아가씨의 관찰력이 대단한 걸까? 솔직히 감탄했어.”

    “누구냐고 물었잖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송선영은 공황에 빠졌다.

    강문수가 아니다.

    강문수가 없다.

    강문수가 죽었다?

    강문수가...!

    “진정해. 나는 아군이니까. 여자친구의 다리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변태 녀석의 몸을 빼앗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안심해라.”

    “저, 정말로?”

    “그래. 나는 아군이다.”

    “그거 말고! 문수가 내 다리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어?”

    “...그래. 아가씨도 보통은 아니군.”

    소년은 초점이 살짝 어긋난 송선영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당신은 누구죠?”

    가짜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전지은이 굳은 얼굴로 ‘가짜 강문수’에게 질문했다.

    “철학적인 질문이군.”

    “분열된 인격(人格)이나 또 다른 자아(自我) 같은 건가요?”

    “아가씨의 가문에서 이 답답한 녀석의 혈통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답변이군.”

    “......”

    굉장히 모욕적인 평가에 전지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기중심적인 혹평이네요. 강문수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존재를 달리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집중력 훈련이란 말도 했고요.”

    소년을 신중하게 관찰하던 서혜주 과장이 그녀를 변호해줬다.

    “하핫! 한 방 먹었군. 미래의 자신에게 농락당한 의사에게.”

    “......”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그건 강문수의 생각인가요?”

    “아니. 그 녀석은 당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어. 사분면이 잘못된 화학식을 전달한 사실도 모르지.”

    툭.

    서혜주 과장의 손에서 수첩과 필기구가 떨어졌다.

    “다, 당신은 대체...?”

    “나는- 켁켁?!”

    “당장 말해!”

    붕붕!

    인내심이 폭발한 송선영이 소년의 목을 양손으로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아, 알겠으니 그만 흔들어!”

    “먼저 말해!”

    “이 몸이 힘들면 꿈속의 강문수도 힘들어진다...!”

    스윽-

    그 말에 설득된 송선영이 목을 움켜쥔 손을 풀었다.

    “...말해.”

    “나는 과거와 미래를 보는 자.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매개로 현세에 강림한 망자의 왕...”

    “소설 인물?”

    “소설은 매개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교통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누구야?”

    송선영의 인내심이 또 한계에 도달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혈신.”

    “아!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자마자 천마에게 패배하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관심 없어. 문수가 뭘 하고 있는지나 가르쳐줘.”

    바로 무시당한 혈신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채지 마라. 나는 중원을 피로 물들인 혈신 소운현이다.”

    “안 물어봤어.”

    “아가씨. 나는 강문수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다. 잘 생각-”

    “소운현 오빠♪”

    “...하는군.”

    무당의 육체로 현세에 강림한 신(神)은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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