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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0화 (111/232)
  • 110화

    [6장-2절] 내가 있다

    올림픽은 P의 적성검사가 등장하면서 크나큰 변화를 맞이했다.

    첫째, 올림픽 주기 감소.

    동계와 하계 나뉘어서 4년마다 진행되던 올림픽은 뛰어난 운동선수가 무더기로 발굴되면서 그 절반인 2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공백기 없이 매년 올림픽이 열리는 셈.

    “잘 생각했어. 올해를 놓치면 2년이나 기다려야 하잖아.”

    “선영아? 여긴 남자 기숙사... 네. 마음대로 하세요.”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아. 집에 틀어박힌 네가 불쌍해서 잘 살아있는지 보러 왔어.”

    “고마워. 그런데 만약, 그럴 리 없겠지만, 올해를 놓치면 내년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면 돼.”

    “예를 들자면?”

    “스케이트, 검도...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종목이 별로 없네.”

    둘째, 올림픽 종목 감소.

    P의 적성검사기의 ‘적성 항목’에 존재하지 않는 올림픽 종목은 우수한 선수를 구할 방법이 없어서 흐지부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남은 종목은?

    <동계>

    스케이트, 스키, 눈썰매, 하키, 피구, 배구, 승마, 기사도, 역도, 검도, 사격, 양궁

    <하계>

    육상, 수영, 태권도, 권투, 골프, 야구, 수구, 축구, 농구, 배드민턴, 탁구, 테니스

    동계 12종목, 하계 12종목.

    현재 올림픽은 동계와 하계를 합쳐서 총 24종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구세대에 없었던 새로운 종목.

    기사도(騎士道)!

    유일하게 경기 중 살인이 허용되는 무시무시한 종목으로,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인 인기와 높은 배당금을 자랑한다.

    “...기사도는 어떨까?”

    “제정신이야? 기사도는 적성이 이상한 사람들만 나가는 종목이잖아!”

    “나도 무당...”

    “꿈도 꾸지 마! 정 나가고 싶으면 나부터 죽이고 가!”

    “아, 알았어! 안 나갈게! 됐지?”

    “정신 차려. 여기는 현실이야. 너는 미봉과 벽안공주를 좌우에 끼고 히쭉거리는 색룡이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셋째, 올림픽 종목 강도 상승.

    P의 적성검사가 등장하면서 선수들의 평균 기량이 쭉 상승했다. 그래서 기존의 구시대 규칙으로는 분별력이 사라져서 좀 더 힘들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육상과 수영은 결승선이 멀어졌다. 야구도 경기장이 커져서 홈런을 치기 힘들어졌으며, 농구는 선수들이 날아다니다시피 해서 골대 위치가 살짝 높아졌다고...

    “문수야. 역도는 어때?”

    “내 몸을 봐. 잘 들게 생겼어?”

    “그러면 피구를 해보자.”

    “단체 경기인데?”

    “상관없잖아. 어차피 서바이벌게임인데. 너 혼자서 상대편을 다 잡으면 이기는 거 아니야?”

    “과, 과연...”

    듣고 보니 송선영의 말이 맞네?

    피구는 단체전이긴 하지만, 내가 공에 안 맞고 상대편을 다 맞추면 이길 수 있다.

    ‘총알보다 쉽지.’

    피구 선수가 공을 아무리 강하게 던져도 총알보다 빠를 순 없으니까. 하물며 피구공은 총알보다 훨씬 커서 보고 피하거나 잡기도 수월하다.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러게. 이번 올림픽이 끝나면 피구 국가대표도 노려봐야겠는걸.”

    “......”

    “왜? 갑자기 그런 표정으로...”

    “올림픽이 끝나면 너 좋다고 달려들 이상한 여자들이 많아질 것 같아서. 조금 신경 쓰이네.”

    “그, 그렇습니까.”

    지은 죄가 있어서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나만 봐야 해.”

    “보고 있어.”

    “죽을 때까지.”

    “야! 불길하게 죽는다는 소리를-”

    “말 돌리지 마.”

    “어흠! 약속할게.”

    “그래♪”

    내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송선영이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불, 안 빨았는데.”

    “왜? 최근에 몽정(夢精)이라도 했어?”

    “콜록! 아니거든?!”

    “뭐야, 그러면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

    삑!

    나는 송선영의 방문으로 잠시 꺼뒀던 텔레비전을 다시 켰다.

    “드라마도 봐?”

    고개만 살짝 든 소녀가 무척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다음 라누벨 환자가 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거든.”

    “아하! 환자가 여자구나? 응. 또 예쁜 여자네?”

    “......”

    “저 사극(史劇)은 나도 전부 봤어. 로맨스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엄마가 좋아하거든.”

    “그래?”

    “큰 줄거리는 왕세자와 도적이 궁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구도야. 나는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몰입이 전혀 안 됐지만.”

    “그렇긴 하지.”

    저 시대의 궁녀는 왕(王)의 소유물이기에 인권도, 선택권도 없다.

    그런데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왕세자가 일개 궁녀 따위의 눈치를 보면서 힘들게 구애를?

    그냥 말이 안 됐다.

    즉, 사극 <궁녀 덕춘이>는 건축물과 복장만 시대 고증을 따른 현대인 감성의 로맨스 드라마.

    ‘그래도 인기가 많으니...’

    평론가도 아닌 내가 작품성을 따져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그런데 문수야. 이 사극, 의외로 액션도 많아.”

    “그런 것 같더라.”

    “맨몸으로 왕세자랑 경쟁할 만큼 도적의 능력이 엄청나거든. 백두산에 사는 신선(神仙)에게 선술(仙術)을 배운 제자라는 설정이니까.”

    “흠...”

    괘씸죄로 곤장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궁녀 ‘덕춘이’의 연애질에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나도, 그 액션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러니 내가 썰렸지.’

    순수한 전투력이 잠룡 마오짜이의 강화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속(神速)의 검술과 이기어검술은 기본이고, 자신을 복제하는 분신술까지!

    여기서 끝이냐?

    아니다.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먼 거리를 순간이동하고, 적외선 망원경처럼 벽 내부를 훔쳐볼 수 있으며, 후각은 왕궁 밖에서 여주인공의 냄새를 맡을 만큼 변태적인 경지를 자랑했다.

    ‘진짜 너무하네!’

    힘과 권력, 모든 걸 가진 왕세자랑 경쟁시키기 위해 감독이 무책임한 설정을 잔뜩 첨가한 결과였다.

    “강문수, 네 계획을 말해봐.”

    “내 계획?”

    “안 말해줘도 돼. 나중에 환자에게 직접 들으면 되니까. 이 사극에 유명한 여배우들이 제법 등장했었지?”

    “......”

    내 신용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말해.”

    “응. 일단은 왕세자를 도와서 도적부터 제거할 거야. 도적만 죽으면 나머지는 쉽지. 환자를 납치해서 무인도 같은 곳에 가두고 설득할 거야.”

    “무인도? 여자랑?”

    송선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조, 조용한 장소에서 설득한다는 의미였어!”

    “내가 오해한 거지?”

    “어! 오해한 거야! 선영이가 있는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나도 믿어♪”

    “......”

    이 계획을 송선영에게 검열받지 않고 실행했으면 위험할 뻔했다.

    “사극은 얼마나 봤어?”

    “절반 정도?”

    우리는 사극 <궁녀 덕춘이>를 분석하면서 함께 시청했다.

    그때,

    “음? 과장님이잖아?”

    띠리링~♬

    내 스마트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받아봐.”

    “그래. 여보세요.”

    (문수야. 지금 뭐 하고 있어?)

    “집에서 선영이랑 사극 보는 중입니다. 왜요?”

    (더 보지 않아도 돼.)

    서혜주 과장님이 살짝 유감이란 어조로 말했다.

    “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곧 죽을 거야.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환자가 못 버텨.)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내가 가장 경계했던 상황 중 하나가 터졌다.

    * * *

    내가 지금까지 치료한 라누벨 환자는 지갑이 쪼들리지 않았다. 쪼들리긴커녕 매우 빵빵한 편이랄까!

    송선영, 최강민, 김은정, 남해수, 마오짜이.

    이 중에 가장 평범한 가정에 속했던 송선영의 부친마저 의사라서, 엘몰랑스 병원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가 크고 작은 편의를 봐줬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순 없지.’

    사극 <궁녀 덕춘이>의 여주인공에게 빙의했으리라고 짐작되는 라누벨 환자가 그 예외였다.

    이름은 윤소라.

    집안이 가난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녀는 대학교 후문 카페에서 일하며 가세를 떠받드는 중이었다.

    마른 체형과 하얀 피부가 연민과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병약한 분위기를 풍겨서, 대학교 후문 카페에는 그녀를 보러 오는 대학교 남학생들로 늘 가득했다고...

    그리고 문제가 터졌다.

    “윤소라 양이 남자를 사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질투한 남자가 사고를 친 거야.”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간 엘몰랑스 병원에서 만난 서혜주 과장님이 불구경하듯 말했다.

    “그건 이미 알아요. 중요한 건, 어째서 그녀가 죽게 생겼냐는 거죠.”

    “부모가 생활력이 전혀 없어. 가상현실게임 중독이거든.”

    “......”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편의점의 사장님도 가상현실게임 중독이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평범한 게이머가 세계적인 가상현실게임 전체 순위 4위가 말이 되나?

    사장님은 편의점 관리를 나에게 거의 떠넘기고, 인생의 대부분 시간을 가상현실게임에서 보냈다.

    “연락이 안 돼서 내가 그녀의 집에 병원 사람을 보냈는데, 정말 끔찍한 상태였어. 부모는 딸이 저축한 돈으로 가상현실게임 중이고, 쓰레기처럼 방치된 윤소라 양은 오랫동안 갈아주지 않은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더라.”

    “최악이네요.”

    “소송도 이미 합의금을 받고 조용히 마무리됐어.”

    “허...”

    “현장에서 체포된 부모는 재판을 받고 있어. 문제는 딸이야. 오랫동안 방치된 윤소라 양의 건강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거든.”

    “결과적으로 구해냈잖아요? 아! 입원비가 문제인가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내가 그녀의 입원비와 치료비를 낼 의향도 있다.

    “회복이 안 돼.”

    “예?”

    “라누벨 환자의 특징이야. 한 번 떨어진 기력은 회복되지 않아. 몸이 현실을 거부한다고 할까? 생명이 계속 깎여갈 뿐이지. 환자의 건강 관리를 잘하면 남해수 회장이나 최강민처럼 오래 버틸 수 있긴 하지만.”

    “......”

    “여기야.”

    끼익-

    일반병동에 외롭게 누워있는 윤소라 양은 90일쯤 안 본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수분 빠진 송장이랄까?

    대학교 후문 카페에서 일하는 인기 많은 미녀라는 게 믿기지 않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엘몰랑스 병원의 산소호흡기는 정말 대단하네요.”

    “인권 문제가 걸려서 보여줄 순 없지만, 환자의 이불을 치우면 더 감탄할걸? 그래도 네가 올림픽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는 못 버텨.”

    “그럴 것 같아요.”

    질끈.

    눈을 감고 생각했다.

    ‘부모의 잘못... 쓸데없는 부분에서 공감하고 말았네.’

    이 환자에게 부모가 없었다면 정부에서 돌봐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안락사로 삶을 정리해주거나.

    잠자코 듣기만 하던 송선영이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사연은 딱하지만, 문수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세상에는 이 여자보다 불쌍한 사람이 많아. 네가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

    “......”

    “그리고 가상현실게임에 중독된 부모 탓에 깨어나도 또 불행한 삶이야. 그녀에게 구원은 없어. 그럴 바에 꿈속에서 잘생긴 왕세자와 도적의 품에 안긴 채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맞는 말이야.”

    “돌아가자. 애초에 만나러 오지 말았어야 했어.”

    덥석.

    송선영이 내 손을 붙잡고 끌었다.

    “그녀에게 구원은 없지.”

    “너...?”

    하지만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있어.”

    “야! 현실을 자각해. 올림픽 개최일까지 1주일밖에 안 남았어!”

    마치 자기 일처럼 송선영이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아.”

    “진심이야?! 모르는 여자 때문에 올림픽을 포기하겠다고?!”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하하! 가끔 깜빡하는데, 내 적성은 운동선수가 아니야.”

    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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