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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08화 (109/232)
  • 108화

    [6장-1절] 현실을 지키자!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듯이 인생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다.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있는 게 어디야.’

    죄인처럼 무릎 꿇고 양손의 지문이 사라질 때까지 싹싹 빌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무릎을 꿇을 시간도 안 주는 여자친구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운이 좋은 셈이다.

    “용케 살았네?”

    서혜주 과장님이 멀쩡한 내 몸을 보며 무척 신기해했다.

    “죽을 뻔했어요.”

    “건물 5층에서 뛰어내려도 살 것 같은 네가? 상상이 안 되는걸.”

    “송선영이요.”

    “......”

    “두 번은 없데요.”

    나를 죽이겠다고 경고했으면 긴장하는 척하며 넘어갔을 텐데.

    ‘너무 무섭잖아!’

    이 지구에 송선영만큼 자살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없으리라. 그래서 그냥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네 업보지.”

    “그건... 그렇죠.”

    방심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주인공에게 빙의했던 김은정은 ‘발렌타인’의 행적까지는 몰랐고, 과거로 돌아간 수영의 황제 남해수는 유언만 남기고 죽었기에 ‘박한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 잘못이지.’

    그나마 이때는 송선영의 마음을 몰라서 방황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 들어간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미봉’이랑 함께한 시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할래?”

    “뭘요?”

    “다음 라누벨 환자. 전 세계에 130명쯤 된다고 했잖아.”

    “아...”

    “네가 사업을 시작해도 될 만큼 자신감이 생겼으면 추천하고 싶은 환자가 몇 명 있어.”

    “......”

    사업.

    거북한 단어였다. 사람의 목숨에 가치를 매겨서 차별한다는 소리니까.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 몸은 하나야.’

    완전히 그만둘 게 아니면 치료할 순서를 정해야 했다. 형평성을 위해 줄을 세우는 기준도 꼭 필요하고.

    서혜주 과장님이 추천하는 기준은 환자나 보호자의 사회적인 영향력.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이다.

    “어떻게 할래?”

    “...최강민처럼 치료하지 않으면 곧 죽을 환자가 1순위. 2순위는 남해수 씨처럼 치료하다가 죽어도 원망 안 듣는 사람입니다.”

    “아직 불안해서?”

    “네.”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다음 치료는 언제 할래?”

    “당분간은 봐주세요. 3시간 전에 여자친구에게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저도 현실을 살아야죠.”

    “그건 네 업보잖아?”

    “어흠!”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보다 얼굴도 모르는 환자를 우선시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현실보다 꿈이 더 낫잖아?’

    눈을 뜨지 않고 식물인간처럼 살다가 기력이 다해서 죽는 편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아!”

    “왜?”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최근에 잠든 라누벨 환자는 깨우기 쉬울까, 라는 주제입니다.”

    “과연... 상당히 흥미로운데? 입증된다면 우선순위를 정할 때, 참고할 수 있을 거야.”

    “그렇죠?”

    조기에 치료된다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으리라.

    “가장 최근이라면... 공원에서 기습적으로 너를 꿈속에 끌어들인 환자가 가장 적합하겠네.”

    “이 병원에 있어요?”

    “아니. 집에 있어. 환자의 부모가 장기간 입원시킬 만큼 자금이 여유롭지 않았으니까.”

    “아...”

    “현재, 딸에게 흉기를 휘두른 남자를 상대로 부모가 소송 중이야. 하지만 네 오지랖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어서 지지부진한 상태지.”

    “잘 아시네요.”

    그녀가 환자의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어서 놀랐다.

    “신기해?”

    “네. 솔직히...”

    “치료할 가치가 전혀 없지.”

    “맞아요.”

    서혜주 과장님의 솔직한 대답에 나는 난처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왕 구한 김에 끝까지 구하면 좋잖아? 네가 큰 희생을 치러서 얻어낸 꿈의 정보를 버리기도 아깝고. 이게 가장 크지.”

    “맞습니다.”

    “바로 준비할까?”

    “네.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환자를 위해 제 인생을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알지.”

    미뤄둔 복수를 하나씩 시작하자.

    * * *

    내가 꿈속에서 저지른 죄를 폭로한 마오짜이에게 유감이 많았지만, 내 통장에 찍힌 동그라미의 숫자를 본 뒤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것이 대협(大俠)의 그릇!

    싸움 좀 한다고 까부는 무당 따위가 감히 욕할 분이 아니었다.

    “...방심할 수 없지.”

    라누벨 환자를 깨우는 내 능력이 영원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번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없다.

    절약! 예금! 적금! 연금!

    적성을 무시한 아버지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듯, 적성을 맹신하다가 당할 가능성도 있다.

    “감독님. 기록은 어떤가요?”

    “조금 떨어졌네.”

    “흠...”

    초시계로 내 기록을 본 장서연 감독님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무협의 세계에서 수영할 일이 없으니까. 최근에 죽어서 잃은 신체 능력을 회복하길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내공이 문제네.’

    마오짜이에게 당하기 전까지 적수라고 할 인간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단련에 소홀히 하고 미봉이랑...

    하여간 게을렀다!

    “그나저나 한수야.”

    “네?”

    “선영이가 무척 자존심 상한 얼굴로 수영을 다시 시작한다고 하던데, 뭔가 짚이는 점이 있니?”

    “어... 제가 데이트 도중에 혼혈 여성의 몸에 시선을 빼앗겨서 그런 것 같은데요.”

    원인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 등장하는 벽안공주. 작가가 설정한 중원 최고의 몸매 미녀였다.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이유?

    송선영 앞에 무릎 꿇고 3시간 동안 추궁당했기 때문이다.

    “잘못했네.”

    “이미 혼났어요.”

    “하지만 무조건 나쁜 자극은 아니니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선영이가 모델로 이미 자리를 잡긴 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던 수영을 다시 시작한 건 좋은 증상이야.”

    “뭐...”

    진실은 단순히 한눈판 수준이 아니었지만, 송선영이 말하지 않은 꿈을 내가 할 필요는 없으리라.

    촤아-!

    수영장의 물 밖으로 올라온 내게 감독님이 수건을 건내며 말했다.

    “이 성적이면 2000m, 4000m 자유형은 문제없어. 1000m도 나쁘진 않아서 국가대표로 참가할 순 있지만, 메달은 힘들 것 같아. 10km는 네가 워낙 압도적이라서 걱정이 전혀 없고.”

    “세 종목이네요.”

    “배부른 소리이긴 한데, 다른 선수들은 한 종목이 보통이야. 운이 정말 따라주면 두 종목이고.”

    “그렇죠.”

    구시대에는 수영의 황제 남해수처럼 혼자서 여러 종목을 나갔지만, P의 적성검사기로 숨은 재능을 간단히 알 수 있게 된 후에는 힘들어졌다.

    반면에 나는 수영만 세 종목.

    서둘러야 했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올림픽 준비 기간이야. 당분간은 잠들지 말고 몸을 사려줘. 올림픽이 우리를 기다려주진 않으니까. 또 잠들면 올해는 진짜 포기야.”

    “조심하겠습니다.”

    올림픽.

    매년 열리긴 하지만, 한 번 놓치면 어영부영 1살을 더 먹는다.

    특히, 수영이나 육상처럼 경험과 기예보다 순수한 육체 능력이 중요한 운동에 치명적!

    ‘남은 시간은 2주.’

    내가 마오짜이의 꿈에서 며칠만 더 늦게 깼어도 올림픽 국가대표로 참가 등록조차 할 수 없었다. 출전만 하면 금메달 확정인 내 마라톤 기록이 아쉬워서 기다려줬다고 할까!

    “이만 가볼게요.”

    “바쁘네.”

    “그래도 한가한 것보다는 낫죠. 선영이도 열심히 하는데.”

    “뭐... 요즘은 딸이 용돈 달라는 소리를 안 해서 좋긴 하더라.”

    “하핫!”

    나는 장서연 감독님께 손을 흔들며 체육대학교 수영장을 나섰다.

    수영은 재등록 완료.

    내가 장시간 불참하면서 자연스럽게 올림픽 참가가 흐지부지된 육상과 태권도 재등록을 해야 했다.

    ‘육상은 문제 없고...’

    나라에서 육상은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기에 마라톤 100km를 뛰는 조건으로 흔쾌히 수락할 분위기였다.

    문제는 태권도.

    내가 저번에 세계 2위까지 한 방에 날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형~!”

    “어? 강훈이잖아?”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후배 최강훈. 수영장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주변에는 체육대학교 여학생들이 잔뜩 있었다.

    ...모든 걸 가진 남자답군.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게 맞았다.

    “너무해! 좀 만나려고 시간을 내면 맨날 자고 있어!”

    “하하! 미안, 미안!”

    수개월 안 본 사이에 조금 더 남자답게 변한 최강훈. 무산소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걸까?

    예전보다 살짝 넓어진 어깨와 두꺼운 팔뚝이 눈에 띄었다.

    ‘뭔가... 최강민이 깨어난 뒤부터 의욕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

    내 시선의 의미를 바로 눈치챈 최강훈이 우쭐댔다.

    “운동 열심히 했어!”

    “그런 것 같네.”

    “하지만 형은 그새 더 대단해졌네. 학교 앞에서 흉기를 든 조폭들을 순식간에 때려잡았잖아. 태권도 공식서열 2위도 때려눕히고!”

    “그 정도야...”

    그래봤자 여자친구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수컷일 뿐이란다.

    “두고 봐! 나도 형처럼 멋진 남자가 될 거야!”

    “그, 그래...”

    강훈아. 안 봐도 된단다...

    “수영이 지금쯤 끝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10분 전부터 형을 기다리고 있었어. 다음 일정은 뭐야?”

    “10분...?”

    “응! 별로 안 기다렸어.”

    “그렇구나.”

    네가 자석처럼 끌어들인 체육대학교 여학생들의 숫자만 보면 1시간쯤 기다린 것 같은데?

    인생은 참 불공평하다.

    “태권도 도장에 갈 예정이야. 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형을?”

    “어.”

    “태권도 협회가 형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맞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원래는 있어선 안 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최강훈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곧 적성검사를 보겠네. 시간이 참 빨라.”

    올림픽 개최일과 적성검사는 항상 비슷한 시기였다. 여러 노림수가 있겠지만, 좋은 적성을 받은 학생들에게 지나친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란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인간이 알아도 바꿀 수 없는 기상이변이나 대재앙 같은 미래를 정확히 맞추기에 나라에서 국보로 취급되는 0순위 적성이다.

    “아빠가 적성이랑 상관없이 유학을 권유해서 고민이야.”

    “아저씨가... 흠...”

    “형의 생각은 어때?”

    “적성을 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형이 아빠에게 말 좀 해줘! 아빠는 형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니까!”

    “내가 뭐라고...”

    “정말이야!”

    최강훈은 태권도 도장이 있는 체육관으로 향하는 나를 계속 따라왔다.

    “강민 형은 어떻게 지내?”

    “형님은 기력을 회복한 뒤부터 아빠의 일을 조금씩 돕고 있어. 꿈의 지식이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아...”

    한 방 맞은 기분이다.

    마법소년 최강민.

    부친을 살해하고 동생을 감옥에 넣은 뒤에 정의로운 영웅 행세를 한 위선자지만,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똑같진 않겠지만.’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꿈과 현재가 완벽히 같을 순 없으니까. 그래도 세계의 큰 흐름을 남보다 먼저 알고 있다는 점에서 최강민은 ‘예언자’랑 비슷했다.

    “아! 맞다. 쭉 미뤄뒀던 형님의 적성검사결과가 나왔어.”

    “오! 적성이 뭐야?”

    “사업가.”

    “......”

    아저씨의 후계자로 가장 적합한 적성이 틀림없었다.

    ‘바보 같은...’

    최강민이 어릴 적에 이복동생 최강훈을 괴롭히지 않고, 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본인이 그토록 바라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강훈아.”

    “응.”

    “너도 적성검사결과를 받아본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적성이 영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응!”

    체육관 앞에서 서성거리던 태권도 선수가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가 왔어...!”

    “뭐? 강문수가 왔다고?!”

    “훈련 중지! 정렬해!”

    나의 방문 소식이 알려지면서 체육관 내부가 시끌시끌했다.

    “누가 보면 내가 태권도 도장을 깨러 온 줄 알겠네.”

    “역시 형이야!”

    “그런데 너도 들어와도 되나?”

    “괜찮아. 형을 기다리면서 주식을 조금 사뒀어.”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탕!

    살짝 열려 있는 여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외쳤다.

    “내가 돌아왔다! 시간 아까우니 한꺼번에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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