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정당방위가 인정된 나는 조사만 받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면 끝난 거잖아요?”
“귀하게 자란 조카가 바지에 똥을 싸고 혼절했으니까.”
“저는 여자친구를 빼앗기고 식칼에 찔려 죽을 뻔했는데요?”
“그래서 무죄잖아.”
“......”
서혜주 과장님이랑 3번째 똑같은 대화를 쳇바퀴처럼 반복했다.
그녀의 옆에서,
“너는 진짜 반성해야 해. 법이 무서워서 여자친구를 노린 쓰레기를 쉽게 용서해줬잖아.”
매우 못마땅하다는, 불편한 얼굴로 송선영이 거들었다.
“미안해.”
“너를 보러 올 때마다 그 쓰레기가 방해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죄송합니다.”
삼촌의 병문안을 온 조카가 송선영에게 반해버렸다는 것 같다.
“사과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달란 말이야.”
“어떻게?”
“몰라서 물어? 그 쓰레기의 유전자가 세상에 퍼지지 못하도록 꾹꾹 밟아줬어야지!”
“네가 밟았잖아.”
그래서 마오짜이의 조카가 바지에 똥을 쌌다.
‘안 쌌으면 진짜 터졌을지도...?’
아끼는 구두에 오물을 묻히기 싫었던 송선영이 두 방으로 용서해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아무튼,
“강문수. 솔직하게 말해봐. 나랑 법 중에 뭐가 더 중요해?”
“당연히 너지!”
여기서 법(法)이라고 대답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두 사람, 여기는 병원임을 잊지 말아 줄래? 연애는 밖에서 해줘.”
“......”
“......”
서혜주 과장님의 중재에 나와 송선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곳은 엘몰랑스 병원.
감정을 추스르고 기력을 제법 회복한 라누벨 환자, 마오짜이를 만나기 위해 애써 시간을 냈다.
“너희는 아직 사회초년생이라서 실감이 안 되겠지만, 세상에는 법보다 무서운 인간이 많아.”
“그래서 왔잖아요?”
피해자가 가해자의 삼촌에게 사과하러 가는 중이다.
“너는 조금 달라. 최강민 씨의 아버님이 후견인처럼 버티고 있으니까. 함부로 못 건드려.”
“헤에~”
그 아저씨가 나를?
“오늘은 네 후견인을 늘리기 위한 만남이라고 생각하면 돼.”
“조카를 밟았는데요?”
“이름도 모르는 조카의 짓밟힌 자존심이 자신의 목숨과 명예보다 위에 있을까?”
“아니죠.”
“그런 거야.”
우리는 VIP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기다림 없이 19층까지 한 번에 올라갔다.
띵!
정계나 재계의 유명인 혹은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는 특별 병동.
꿈에서 눈을 뜬 마오짜이는 이곳으로 옮겨진 모양이다.
“대우가 달라졌네요?”
“당연하지. 더는 숨만 붙어 있는 가주가 아니니까.”
“가주(家主)?”
“마오짜이 씨는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직계의 장자(長子). 그동안 방계에서 가주의 빈자리를 맡고 있었을 뿐이야.”
“방계에선 아쉽게 됐네요.”
“맞아. 네가 원수지.”
“......”
원치 않은 원한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고 말았다.
“너를 지켜줄 후견인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했어?”
“이해했습니다.”
「1906호: 마오짜이 씨」
과거에 최강민이 장기입원했던 병실에 마오짜이가 있었다.
“오...”
“와아...”
나와 송선영은 살짝 놀랐다. 1906호실 앞 복도에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달라진 위상.
그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를 통치하는 황제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혜주 과장님이 입구를 막아선 경호원에게 먼저 인사했다.
힐끔.
경호원는 그녀의 옆에 있는 나와 송선영을 빠르게 훑어본 후에 회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손님들을 데려왔어요.”
“강문수 씨입니까?”
“네.”
내 대답에 경호원이 옆으로 비켜서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가주님께서 은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인(恩人).
마오짜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단어였다.
“수고하세요.”
스윽-
우리는 부드럽게 열리는 1906호실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 * *
최강민이 이용했던 1906호실은 경호원과 사용인이 곳곳에 배치된 것 외에는 그다지 바뀐 게 없었다.
침대에 누운 환자 빼고.
산적처럼 덥수룩했던 수염을 정리하고 몸단장한 마오짜이는 온화한 서생 같은 인상이었다.
위이이잉-
“.......”
각도를 바꿀 수 있는 의료용 침대를 조작해서 상체를 일으킨 그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흠.”
서혜주 과장님이 헛기침으로 내게 눈치를 줬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문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송선영입니다.”
우리의 인사를 받은 마오짜이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왜?
“반갑군. 중원에서 작은 가문을 이끄는 마오짜이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작은 가문’의 기준이랑 다를 것 같다.
“그런데 처음이라? 나는 자네가 처음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그렇습니까.”
“그 심정도 이해는 가. 지금의 나는 잠룡이 아니니까.”
“......”
“나처럼 다르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자네는 현실에서도 똑같군.”
“무당이니까요.”
더는 감추거나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디까지 기억하는가?”
“전부요.”
“내가 의원님께 부탁해서 자네를 부른 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네. 내가 병실에 틀어박힌 한심한 가주가 아니란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반자니까.”
“아...”
마오짜이가 꿈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다.
유일한 동반자.
틀린 표현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숙녀는 우리의 대화가 조금 따분할 수도 있겠군.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아뇨. 신경 쓰지 마세요, 가주님. 역으로 흥미로우니까요.”
호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낸 서혜주 과장님은 의사가 아닌 연구자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저도 괜찮아요. 소설 원작을 읽어서 이해에 문제없어요.”
송선영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애독자 마오짜이가 좋아할 말을 해줬다.
“소파에 편히 앉게. 여봐라. 귀빈들께 어울리는 다과(茶菓)를 준비하라.”
“네. 가주님.”
탁, 탁, 쪼르륵...
나에게 낯설지 않은 ‘무림인’ 복장을 한 간호사가 우아한 몸짓으로 탁자에 차와 과자를 준비했다.
다시 무협으로 돌아간 기분.
내 생각을 읽은 마오짜이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사람은 익숙한 것을 찾는 법이지.”
“그래도 연못에서 씻는 것만은 참아주세요.”
“하핫!”
그는 진심 어린 내 부탁을 유쾌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이 아저씨가...?’
살짝 불안했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천마에게 버림받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실력을 키웠지.”
“천지음양지체가 재능이 부족하다는 건 억지 같은데요.”
“그래서 보기 좋게 복수했잖은가?”
“천마를 못 이기셨잖아요.”
“아직 안 싸웠을 뿐이야. 혈신의 힘을 흡수한 시점에 내 경지는 천마를 추월했으니까.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뭐...”
천마의 제자를 굴복시킨 시점에 복수는 달성했을지도?
“그리고 쉽기만 한 건 아니었네. 부끄러운 얘기지만, 돈이 귀한 줄 몰랐던 나는 생활력이 전혀 없었거든. 무공을 익혀보지도 못하고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초기에 고생하신 모양이네요.”
“매우 고생했지. 내가 서민이라고 얕잡아보던 사람들에게 지배받는 밑바닥까지 몸소 경험했으니까. 강 공자는 어땠는가?”
“저요?”
“자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공이 거의 없었지. 그전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안 봐도 훤해.”
“사막에서 도마뱀을 잡아먹으며 닷새 정도 고생했어요.”
“닷새? 겨우?”
“네. 가주님이 아직 빼먹지 않은 기연을 찾아서 내공을 흡수했거든요.”
“허허...!”
너무나 다른 시작점이 기가 막혔던 마오짜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길 잠시,
“송선영 양.”
그는 내가 아닌 송선영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네?”
“송 소저라고 해도 되겠는가? 그쪽의 호칭 방식이 입에 붙어버려서 바꾸기가 쉽지 않아.”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꿈속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마오짜이의 상태를 잘 아는 송선영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나저나... 송 소저.”
“네.”
“조카를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송 소저는 보기 드문 미인이군.”
“감사합니다.”
“임자 있는 미인을 노린 대가는 매우 비싸지. 사죄의 의미로 조카의 오른손을 잘라서 보내주겠네. 무림처럼 목숨을 내줄 순 없으니.”
“다른 곳을 잘라주세요.”
“흠. 거긴 봐주게. 방계에 젊은 사내가 그 녀석뿐이라.”
“그러면 눈을 뽑아주세요.”
“아아, 그 정도라면...”
조카의 신체를 아무렇지 않게 자르고 뽑으려는 마오짜이!
그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픽픽 죽어나는 무림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현실 감각이 무뎌졌으니까.
그런데 송선영은?
전혀 위화감이 없어서 마오짜이보다 더 무서웠다.
“선영아. 잠깐만.”
“왜?”
“네 마음은 내가 잘 알지. 하지만 이번 일은 이제 용서하고 넘어가자. 너에게도 잘못이 있잖아?”
“나에게?”
“너무 예쁜 죄.”
“......”
“내 말이 틀려?”
“...어쩔 수 없네.”
바로 옆에서 서혜주 과장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송선영은 도도한 말투로 수긍했다.
이걸로 문제 해결!
내가 한 남자의 인생을 살렸다.
“강 공자는 욕심이 많군.”
“제가요?”
“이만한 미인이 곁에 있었으면서 미봉을 차지하다니.”
“가주님?”
“생각해보니 벽안공주도 내게서 빼앗아갔군.”
“자, 잠깐만요!”
내가 꿈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마오짜이밖에 없다.
그건 다시 말해,
“문수야?”
송선영이 매우 상냥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네.”
“조금 전에, 네가 미봉을 차지했다는 게 무슨 말이야?”
“......”
“벽안공주를 빼앗았다는 이상한 소리도 들은 것 같은데.”
“......”
같은 꿈을 공유한 마오짜이가 있는 한,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당장 말해.”
“...저는 싫다고 했는데, 미봉이 자꾸 따라왔습니다.”
“정말로?”
“네.”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강 공자가 미봉의 환골탈태를 도와주면서 호감을 샀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하지만 마오짜이가 바로 참견하며 훼방을 놓았다.
“그건 오해입니다.”
“미봉의 환골탈태를 도운 건 사실이잖은가?”
“전력 상승을 위해...
“사천성에서 커플티도 맞췄다던데.”
“오, 오해입니다.”
주르륵...
예상치 못한 위기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위험해!’
점점 짙어지는 송선영의 미소가 심상치 않았다.
“문수야. 미봉이 2위였지?”
“네. 그럴걸요.”
“벽안공주는 미모 서열 3위의 백인 혼혈이었고.”
“아마도요...?”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천하제일미는? 1위는 문수의 취향이 아니었어?”
“천하제일미는 수면제를 먹고 혈마에게 끌려가서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
“가주님이 안 구해줬어.”
나는 자연스럽게 마오짜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강 공자.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는 천하제일미의 나신(裸身)까지 보지 않았는가?”
“......”
도움이 안 됐다.
“혈마에게 붙잡힌 천하제일미를 자네가 구해놓고는.”
“가주님이 구하셨죠! 저는 다 끝나고 도착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도착해서 천하제일미를 본 건 인정하는군?”
“......”
정말 도움이 안 됐다.
“가주님. 실례가 안 된다면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 색룡으로 불린 강 공자의 영웅담을 들려주지!”
“색룡...?”
내가 살려면 송선영과 마오짜이를 당장 떼어놔야 한다.
“선영아! 일단은 내 얘기를...”
“나가 있어.”
“......”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