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송선영이랑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전지은에게 먼저 했다.
형식적인 통화.
“안녕하세요, 전지은 양. 방금 일어났습니다. 84일 만이네요.”
(벌써 잊었어? 서로 편하게 말하기로 했잖아.)
...그랬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하! 미안. 지금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네.”
(그렇구나. 지금 막 일어났구나?)
“응? 어, 응.”
(기다려. 5분 안에 갈게.)
“아니, 굳이-”
뚝.
통화가 끊겼다.
‘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현재, 내 머릿속에는 송선영을 귀찮게 한다는 남자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띠리링~♪
“......”
띠리링~♬
한창 일하는 중인 걸까? 기다려도 송선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수야!”
“어?”
“이쪽이야.”
엘몰랑스 병원 정문의 승하차 장소에 세워진 검은색 스포츠카 옆에서 전지은이 손을 흔들었다.
일하다가 바로 나왔는지 검은색 여성용 사무복 차림...
그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그녀 옆의 존재감이 강렬했다.
‘이 스포츠카 실화냐?’
차종의 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잡지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굴러다니는 아파트’였다.
“차가 좋네.”
“고마워. 최근에 샀어.”
“그렇구나...”
“옆에 타. 체육대학교 남자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줄게.”
“면허는 언제...?”
전지은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건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마자 운전면허시험을 본 수준이었다.
아무리 길어도 3년-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어. 문수가 깨어나길 기다리다가 땄어.”
“......”
아직 초보라는 소리였다.
“괜찮아. 초보운전이라고 붙여놔서 사람들이 잘 양보해줘.”
“그야...”
스치기만 해도 연봉이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양보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다.
사푼.
보조석에 내 발자국, 지문 등의 얼굴이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앉았다.
“편히 앉아.”
“아니...”
앉자마자 택시, 버스에서 느껴보지 못한 생명의 위기를 강하게 느껴서 어쩔 수 없다.
“간다?”
“어... 안전 운전 부탁합니다...”
부르르릉!
전지은의 검은색 스포츠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출발했다.
‘오...’
내 걱정이랑 달리, 그녀는 안정적으로 운전했다.
그리고 친절한 운전자들!
내가 운전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좌회전이나 우회전 깜빡이를 켜면 바로 양보해줬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서혜주 과장님이 평범한 수액 대신 전용 특제품을 썼다고 했는데, 효과가 있었구나.”
“잘 아네.”
“매일 네 병실에 갔으니까.”
“......”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고급 스포츠카를 모는 능력 있는 연상의 미녀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두근두근.
내 심장이 침착할 수 없었다.
‘음란마귀가 꼈구나!’
실실 쪼개던 혈신의 핀잔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꿈은 어땠어?”
“어떠냐니?”
“꿈속에서 84일 동안 뭘 했는지 궁금해서.”
“믿는 거야?”
“당연하지. 나도 무당이야. 주로 간판 역할을 하긴 하지만.”
운전 중인 전지은이 고개는 정면으로 향한 채 눈만 움직여서 보조석의 나를 흘겨보았다.
“미안. 왠지 실례를 한 기분인걸.”
“괜찮아. 그래서?”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현실처럼 구현한 세계였어. 환자는 소설의 주인공이었고.”
“...내가 준비한 자료는 별로 도움이 안 됐었겠네.”
“뭐... 성격은 참고가 됐어.”
마오짜이의 가족 관계, 불법 이력, 이성 관계, 과거 사건 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도움이라면,
‘송선영이 준비한 핵심요약본이...’
내 기숙사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워서 자던 송선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윽-
바지 위에 양손을 공손히 모았다.
나는 쓰레기다.
“송선영 양은 그 경험자라서 확실히 다르구나.”
“어? 뭐, 그렇지.”
송선영이 말한 건가? 어째서 전지은이 알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미안. 다음에는 빈틈없이 준비할게.”
“아니, 굳이 미안할 필요는...”
“미안.”
“흠... 잘 부탁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스포츠카가 남자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부르릉!
스포츠카의 저 요란한 엔진소리 좀 어떻게 안 되나?
대학생들의 시선이 스포츠카와 우리에게 모여들었다.
“강문수 선수잖아?”
“옆에 미녀는 누구지?”
“부러운 놈...”
그들은 안 들리도록 작게 속닥거렸지만, 꿈에 들어갈 때마다 성장하는 내 청력을 벗어날 순 없었다.
내가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곤란하구먼.’
하지만 전지은 덕분에 편하게 빨리 온 건 사실이다.
“고마워.”
“신경 쓰지 마. 이게 내 일이니까.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봐.”
“내일?”
“기다리면서 서혜주 과장님이 정리한 지난 자료들을 훑어봤는데,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흠. 알겠어.”
“그러면 내일 몇 시쯤에 올까?”
전지은의 질문에 나는 몇 초쯤 생각하다가 답했다.
“장서연 감독님께 아직 깨어났다고 얘기하지 않았거든. 내일 일정을 본 뒤에 연락해줄게.”
“그래.”
부르릉~
전지은이 모는 스포츠카가 기숙사 주차장을 떠났다.
“......”
“......”
우리를 구경하던 대학생들이 구경하지 않은 척하며 흩어졌다.
‘이거 참...’
일단은 씻고 생각하자.
* * *
꿈에 들어갈 때마다 무방비상태에 놓이는 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엘몰랑스 병원의 안전설비와 경비 등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장시간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촤아아-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니 기분이 고양됐다.
‘중세는 이게 문제야.’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 목욕탕이 존재하긴 했지만, 아무나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되지 않았다.
특히, 여성 중심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답게 남성에 대한 배려심은 전혀 없어서 ‘목욕’은 귀족 여성의 전유물 취급.
남성들은 젖은 수건으로 서민들처럼 씻는다. 차이는 미모의 시녀들이 대신 닦아준다는 정도?
무협 세계도 비슷했다.
“후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는 주인공이 우연히 미녀들의 알몸을 보게 되는 깜찍한 이벤트가 있었다.
그걸 위해 ‘중원 사람’들은 연못이나 시냇물에서 씻는다는 설정을 무책임하게 넣었으니!
그래서 나무꾼과 사냥꾼의 사망 원인 1위가 숲속에서 여성 무림인의 알몸을 훔쳐본 대가였다.
‘현실이 최고지!’
꿈의 세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언제나 허구라는 사실이 마음을 붙잡았다.
나는 라누벨 환자가 아니라고.
나의 진짜 육체는 엘몰랑스 병원 침대에 식물인간처럼 가만히 누워있음을 항상 명심했다.
따르릉♪
샤워실 선반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울었다.
「통화: 송선영」
발신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꾹!
“여보세-”
(깨어났으면 바로 연락해야지!)
“...바로 한 건데.”
(내가 받을 때까지 해야지!)
“아하! 내가 잘못했네!”
조금 억지란 생각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마냥 좋았다.
나는 변태일까?
철학적인 자아 성찰은 포기하고 그냥 변태 쓰레기가 되기로 했다.
(어디야?)
“기숙사.”
(그 여자랑 만났어?)
“누구?”
(전지은. 내가 갈 때마다 병실에 있는 정보 담당. 자기가 간호사인 줄 착각하잖아. 할 일이 없나?)
“어... 아마도? 기다리면서 운전 면허를 땄다던데.”
(나보다 먼저 만났구나?)
“......”
느긋하게 샤워하면서 긴장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
(뭐해?)
“샤워하고 있습니다.”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나와. 나는 10분쯤 걸릴 거야.)
“어? 지금?”
(또 경찰 아저씨랑 면담하고 싶으면 집으로 가고.)
“당장 가겠습니다!”
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몸을 침대로 던질 기분이 싹 사라진 머리로 기민하게 계산했다.
현재 샤워 중.
남은 시간은 10분.
학교 정문까지 뛰면 1분 4초.
물기를 닦고 옷만 입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향수를 어디에 뒀더라? 아! 젠장! 수염! 면도기는?!’
듬성듬성 자라기 시작한 턱수염이 아직 낯설었다. 그래서 내일 느긋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꼴로 밖에 나갈 순 없었다.
슥슥-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도 긴장하지 않았던 내가 면도하면서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었다.
‘3분 13초... 됐다!’
찰칵!
큰마음 먹고 산 옷을 입고, 기숙사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복도를 바람처럼 질주했다.
“좋아.”
늦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기에 비상구로!
휙~
계단을 거의 밟지 않고 뛰어내리다시피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육체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어? 너는...”
“안녕하세요!”
안면이 있는 기숙사 이웃이나 선수들에게 인사하며 빠르게 지나쳤다.
팟!
땀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달렸다.
‘...어?’
체육대학교 정문 카페에 10분쯤 걸린다던 송선영이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괜찮다. 내가 늦은 건 아니니까.
문제는?
나를 만나러 온 그녀가 다른 남자들이랑 대화 중이란 점이었다.
“안녕? 누구-”
“늦었잖아!”
남자들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송선영.
그녀는 9분 만에 도착한 나를 비난하듯 째려봤다.
‘늦은 건 아니지만...’
호위로 짐작되는 동갑내기들을 거느린 청년의 얼굴을 보자마자 억울하다는 생각이 쏙 들어갔다.
내가 늦은 시간은?
10분이 아니라 84일이다.
“미안.”
“잘못했지?”
“매우 잘못했습니다.”
“알면 됐어. 저녁은 네가 사.”
“그럴게!”
흔쾌히 수락했다. 한두 푼에 벌벌 떨던 과거의 내가 아니니까!
“오랜만에 기분 내고 싶어졌어. 수족관에 먼저 갔다가 빠르나루 레스토랑으로 갈 거야.”
“알겠어!”
흔쾌히 수락했다. 손끝이 벌벌 떨려도 오늘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봐. 서민.”
“......”
나는 무시하고 있었던 청년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송선영이 말한 남자친구가 너냐?”
“그렇습니다만?”
“통장 계좌번호를 적고 꺼져. 무슨 말인지 알겠지?”
“...더 미안해졌네.”
나를 기다려준 송선영이 고마웠다.
“뭐해? 안 적어?”
“흠...”
카페에 감시카메라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설마, 남자의 자존심이란 거냐?”
“자존심은 중요하지.”
“서민이-”
“야. 서민 타령 그만하고 집에 가서 바이올린이나 연주해.”
“...처리해.”
청년의 지시를 받은 호위들이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며 다가왔다.
부웅~
그리고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억?!”
“커억~?!”
털썩! 철푸덕!
반사신경이 중요한 종목의 운동선수가 아니면 아예 반응조차 할 수 없는 발차기 속도.
내가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을 것이다.
“이 녀석이?”
“겁을 상실했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사내들이 해결사처럼 달려왔다.
스윽-
품에서 식칼을 꺼내면서.
“헉?!”
“히익?!”
대학생들과 카페 손님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빠르게 도망쳤다.
송선영은...
“또 경찰서에 가겠네.”
뒷수습을 더 걱정하는 그녀의 무신경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게.”
식칼을 들고 강자 행세하는 굼벵이들을 상대해줬다.
우선 하나.
휙~
“억- 끄악~?!”
압도적인 힘으로 식칼을 빼앗아서 허벅지를 찌르고 비틀었다.
우득!
무림인처럼 환골탈태라도 하기 전에는 치료할 수 없으리라.
“이 새끼가-”
부웅~!
동료가 당하는 틈에 내 목을 식칼로 노리는 자에게 뒤돌려차기.
순간적으로 힘이 더 들어가서 죽일 뻔했다.
“죽어- 아...?”
털썩.
내가 던진 식칼이 복부에 박혔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마지막 남자의 무릎이 접혔다.
사망자 없이 상황 종료.
남은 건?
“헉!”
“보면 볼수록 삼촌을 많이 닮았네.”
“오, 오지 마!”
“너도 무협 소설을 좋아하냐?”
겁에 질린 마오짜이의 조카를 협객의 미소로 안심시켜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