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강 공자님~!”
폴짝!
소림사에서 스님들을 번뇌로 괴롭히고 있던 미봉.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품으로 뛰어들었다.
“잘 지냈습니까?”
“전혀요! 강 공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요!”
(꿈이라고 안심하다가 여자친구에게 딱 걸리면 볼만하겠군.)
“...미봉 소저.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사랑하는 여연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은 앞으로 자제해주세요.”
“두 번째라도 좋아요.”
“미안합니다.”
“흑! 돌아오시자마자 섭섭한 말씀부터 하시네요. 며칠 안 본 사이에 소녀가 질리신 건가요?”
“아닙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보는 미봉.
이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강 공자님. 훌쩍! 이것만 솔직하게 말해줘요. 소녀를 좋아한 적이 한순간도 없었나요?”
“지금도 좋아합니다.”
“훌쩍! 정말요?”
“네.”
“그러면 됐어요.”
의외로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미봉이었다.
(안심하지 마라. 밤에 네 침실로 숨어들어서 아기를 만들 계획이다. 이 아가씨, 결혼하기 글렀군. 너 때문에 남자 보는 기준이 너무 높아졌어.)
“...미봉 소저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뭔데요?”
“혈마전에서 구출한 여인과 아이들이 밖에 있습니다.”
“혹시, 천하제일미도 있나요?”
“네. 지친 그녀들을 며칠만 돌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녀가 왜요?”
밤에 내 침실로 숨어들 계획인 미봉이 거부감을 드러냈다.
“부탁합니다. 제가 안심하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미봉 소저밖에 없어요.”
“으으... 네.”
미봉이 마지못해 승낙했다.
(방금 걷어찬 소녀에게 힘든 일을 부탁하는 네놈에게 양심이 존재하는지 의문이구나.)
이게 마지막입니다.
(정말로?)
꿈속에서 방황하는 나약한 강문수는 앞으로 없을 테니까요!
(큭큭! 두고 보면 알겠지.)
“...권왕 어르신도 부탁합니다.”
“그래!”
“저는 걸룡을 만나러...”
“빈틈- 꾸엑?!”
퍽-!
기습적으로 돌격했다가 내 뒤돌려차기에 맞고 고꾸라진 꼬마 권왕.
파스스...
녹림을 평정한 그의 두 주먹에 뭉친 내공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과연...”
그가 내공을 갑옷처럼 온몸에 둘렀음에도, 힘없는 어린애를 때린 것처럼 저항감 없이 고스란히 박혔다.
이것이 나의 세계.
(오호? 한없이 답답한 애송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론보다 실전에 강한 편이었군.)
“흠...”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살짝 뻐근한 다리.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을 때는 없었던 물리적인 반동이었다.
(얻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마오짜이가 정한 세계의 규칙을 무시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소림사는 여성의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으니,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숭산을 내려가죠.”
“아미타불...”
“아미타불...”
소림사의 엉덩이 무거운 스님들까지 밖에 나와서 정말 미안하다는 뜻을 보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데려온 여인들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미녀들.
미봉 혼자서 소림사를 흔들어놓은 걸 고려하면, 그녀들을 전부 받아들였다가는 부처님마저 잠을 못 이루리라.
이게 다 마오짜이 탓이다.
‘나를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전부 떠넘기다니...!’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하제일미를 포함한 모든 미녀를 내팽겨쳤다.
마음의 빚?
혈마가 혈신을 소환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었다.
(예의를 아는 후배를 지켜주지 못해서 조금 미안하군. 나를 일찍 소환했다면 마오짜이에 중원까지 얹어서 싹 청소해줬을 텐데.)
전설이 사실이에요?
(우문이군. 소설 작가가 독자에게 거짓말해서 무슨 득이 있지? 중원을 피로 물들인 적이 있다.)
왜요?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중원의 후예들이 지구를 죽음의 별로 만드는 암울한 미래를. 100만을 죽이면 100억 인류를 살릴 수 있으면 남는 장사가 아니냐?)
저에게 공감을 기대하지 마세요.
(하하!)
“......”
혈마에게 납치된 미녀들을 우리가 보호 중이란 소식을 접한 문파와 가문에서 사람을 보냈다.
“사매~!”
“내 딸...!”
“누나!”
혈마수호대를 주인공에게만 약하도록 설정한 작가의 생각 없는 설정으로 시작된 비극.
악명이랑 달리, 의외로 아내들에게 다정했던 혈마의 2세가 잔뜩 태어난 찜찜한 형태로 막을 내렸다.
(혈마도 제약을 받은 탓이다.)
무슨 제약이요?
(소설 원작이 정한 규칙이지. 주인공이 구하러 올 때까지 미녀들을 헤치지 않고 곱게 모셔둘 것.)
“아...”
현실성 없는 황당한 제약이었다.
(계획은 있느냐?)
“흠...”
계획? 검봉을 살해하고 잠적한 마오짜이를 수소문할 예정이다.
‘의외로 쉬울지도?’
검봉의 부모와 가문 사람들이 잠룡에게 복수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것이다. 사천제일미 덕분에 그의 별호도 파악해뒀고.
잠룡(潛龍).
중원의 정보력을 쥐고 있는 걸룡에게 의뢰해뒀고, 마오짜이의 표적인 천마의 위치도 수시로 살피고 있다.
“순조롭군...”
이젠 마오짜이가 나오길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흠! 색룡 강문수는 황명(皇命)을 받들라~!”
복스럽게 생긴 관리가 다짜고짜 찾아와서 내게 외쳤다.
그런데,
“색룡...?”
(음란마귀가 낀 네놈에게 어울리는 별호 같구나.)
“어허! 아직도 서 있다니! 색룡 강문수는 당장 무릎을 꿇고 지엄하신 황명을 받들라!”
“실례지만,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별호는 사천제일-”
“황명을 받들라~!”
“아, 네.”
털썩.
무릎을 꿇고 일단은 황제의 명령을 받기로 했다.
“사천무술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색룡 강문수는 황실연회에 참석할 것을 명한다!”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대답하라!”
“황명을 받듭니다.”
(큭큭! 솔직하게 말해봐라. 송선영과 벽안공주, 둘 중에 누구의 몸매가 더 마음에 드냐?)
제발 닥쳐주세요.
* * *
색룡(色龍).
여자를 밝히는 신랑감!
내가 혈마전에서 수많은 미녀를 구해냈다고 소문이 난 탓이었다.
“마오짜이...!”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내 계산대로라면 마오짜이가 곧 움직일 거다.)
어떤 계산인데요?
(마오짜이가 흡성대법으로 빼앗은 내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의외로 논리적이었다.
‘그나저나...’
중원을 다스리는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는 무척 화려했다.
황제와 무림인의 관계는?
현대사회의 정부와 기업의 관계랑 비슷하다. 평소에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협조하지만, 황제가 내정에 간섭하면 삐딱해지는...
물과 커피랄까?
(그것도 능력이군. 비유를 너처럼 못하기도 쉽지 않은데.)
나는 혈신의 헛소리를 무시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호호! 나리.”
“오랜만입니다!”
통통한 노인부터 아리따운 소녀까지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비단으로 된 고급스러운 복장. 그리고 근처에 앉은 손님들을 견제하는 듯한 날카로운 표정과 말투였다.
‘낯설지 않은 분위기야.’
내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 아몰랑 백작으로 활동할 당시에 귀족들의 정치판이 이랬다.
웃는 얼굴로 이웃의 머리카락을 뽑는다고 할까!
(이번 비유는 마음에 드는군.)
감사요.
“......”
황제의 근처에 앉은 벽안공주의 시선과 관심이 느껴졌다. 보는 눈이 많고 거리가 있어서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면서 옆의 여성에게 계속 속닥거렸다.
‘모친이겠지?’
벽안공주처럼 새하얀 피부와 푸른 눈동자를 가졌는데, 혼혈이 아닌 순수한 서양인의 얼굴이었다.
“이거 참...”
아르바이트 면접받는 기분이다.
(걱정하지 마라. 벽안공주는 너보다 마오짜이에게 마음이 있다.)
“음?”
이게 무슨 소리야?
(황제는 천마의 외손자인 너를 데릴사위로 생각하지만, 옛날부터 밀회한 마오짜이에게 약점 잡힌 벽안공주는 갈등하고 잇다.)
무슨 약점인데요?
타인의 속마음을 마음껏 훔쳐볼 수 있는 혈신이 벽안공주의 비밀을 시원하게 공유해줬다.
(첫 경험을 녀석에게 줬다.)
그게 왜요?
(아름다운 공주는 황제가 정치적으로 쓸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이지. 그런데 이 상품에 흠집이 생겼다는 사실을 황제가 눈치채면 어떻게 될까?)
매우 분노하겠죠.
(그리고?)
마오짜이가 사위로 인정받지 못하면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 같네요.
(정답이다.)
“...불안한걸.”
나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보검을 힐끔 내려다봤다.
암살과 반란의 위험성이 있어서 연회장에 무기를 반입할 수 없지만, 이 보검은 황제의 하사품이라서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신뢰의 증표.
그만큼 황제가 세계관 최강자 ‘천마’랑 연결고리를 만들어두고 싶어 한다는 방증. 이건 내 추측이 아닌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인물 설정이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는 감이 좋구나.)
네?
혈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회장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침입자다!”
“폐하를 보호하라!”
“이게 대체?!”
쿵!
그리고 연회장의 대문(大門)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마오짜이.
그의 뒤를 무림인들이 수하처럼 따르고 있었는데, 내게 낯익은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걸룡, 마룡...’
마룡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건 의외였지만, 정보를 담당하는 걸룡마저 나를 속였을 줄은 몰랐다.
(거참! 나도 한 방 먹었군.)
모르셨어요?
(시커먼 수컷의 속마음은 안 보는 주의라서.)
아하!
같은 남자로서 혈신을 이해했다.
“황제 폐하. 오랜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연회장 한복판에서 멈춘 마오짜이가 단상 위의 옥좌에 앉은 황제를 올려다보며 당당히 인사했다.
“또 네놈이냐. 짐의 결정은 변함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황제가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그의 대화에 응해줬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천마의 제자를 동행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마룡은 저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소인이 천마의 제자보다 폐하의 사위로 적합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혈신이 보충설명에 들어갔다.
(마오짜이는 벽안공주랑 결혼해서 다음 황제 자리를 노릴 계획인데, 소설 원작 설정에 발목이 잡혔다.)
“아...”
소설 원작 설정.
「황제는 천마랑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서 벽안공주를 이용한다.」
이것이 세계의 규칙.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도 주인공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황제와 왕자 등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소설 원작 1권부터 주인공의 행동이랑 상관없이 ‘설정’으로 고정된 사랑하는 감정.
예를 들어?
「제국의 황제는 어릴 적에 만났던 안질리나 치맥을 사랑한다.」
그래서 황제는 주인공 ‘김은정’을 지키기 위해 제국을 배신하는 비상식적인 행동까지 했다.
지금도,
‘마오짜이는 주인공으로 시작했음에도 천마의 제자가 되지 못했지.’
소설 원작 1권에서 마오짜이가 ‘천마의 제자’로 시작됐다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
그는 주인공인데도 천마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같은 비상식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황제 폐하. 소인은 천마의 제자를 굴복시키고 천마신공도 익혔습니다. 이 정도면 벽안공주의 부마로 자격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오짜이는 황제를 설득하기 바빴다.
설득력 있는 주장!
“흠. 천마는 짐이 아는 가장 강한 무인이지만, 남을 가르치는 소질은 부족했던 모양이군.”
그러나 소설 원작의 설정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닙니다! 마룡은-”
“황궁에 잠입해서 짐의 보물을 건드리고 연회까지 망쳐놔?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구나.”
“......”
황제에게 은밀한 비밀을 들킨 마오짜이는 입을 다물었고, 벽안공주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이젠 어떻게 될까?
(마오짜이는 여기서 황제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다. 아직은 갈등하는 단계지만, 황제가 한 번만 더 그를 자극하면-)
“황제 폐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감히- 음? 오! 천마의 외손자로군!”
“발언을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한다!”
황제는 내가 천마의 외손자란 이유만으로 무한한 호의를 보냈다.
“외조부의 제자를 쓰러트리고 기고만장해진 낭인에게 폐하의 넓은 아량을 보여주심이 어떻습니까?”
“과연...”
소설 설정의 친분 보정을 받은 내 제안에 황제가 턱을 쓰다듬으며 짙은 흥미를 드러냈다.
반면,
“죽고 싶습니까?”
내게 묻는 마오짜이의 표정은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깔끔히 무시.
“폐하. 소인이 이 낭인을 이기면 벽안공주를 주십시오.”
“하하! 천마의 외손자는 당당한 사내대장부로군! 하지만 귀여운 공주의 의사도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넙죽!
딸을 생각하는 척하는 황제의 다정한 미소를 본 벽안공주는 매우 기쁜 목소리로 신속하게 대답했다.
“시상식에서 처음 뵌 순간부터 흠모하고 있었사옵니다!”
(살려고 애쓰는군. 네가 마오짜이에게 죽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굳이 해설해주지 않아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나도 송선영보다 다리가 짧은 당신에게 관심 없습니다.
“...강문수 씨. 이번에는 자비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마오짜이 씨. 나중에 3판 2승제라고 우기지 마세요.”
(쩝. 팝콘이 아쉽군.)
우리는 살기를 머금은 채 다시 한번 대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