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03화 (104/232)
  • 103화

    [5장-10절] 너의 대답은?

    “마오짜이 씨?”

    “놀랄 것 없습니다. 제가 혈마전에 온 진짜 이유니까요. 천마를 쓰러트리려면 혈신의 힘이 꼭 필요해서 강림을 유도했습니다.”

    “혈신이라면...”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완결편에서 궁지에 몰린 혈마가 소환한 최악의 존재입니다.”

    “저도 압니다. 천마가 목숨이랑 바꿔서 간신히 쓰러트리죠.”

    여색(女色)에 빠진 주인공이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기 여자들을 챙긴 최악의 전투였다.

    혈신(血神).

    소설이 주인공 시점이라서 전투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온전한 강림이 아닌데도 세계관 최강자가 간신히 쓰러트린 진정한 최강.

    그러나,

    “숨 쉴 여유도 안 주는군...”

    혈신은 세상에 강림하자마자 마오짜이의 이기어검술에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을 꿰뚫렸다. 아직 살아있는 게 신기할 지경.

    그리고 남자였다.

    ‘혈신이 저렇게 생겼구나.’

    소설 원작에서는 자세한 묘사나 설명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외견은 30대 초반.

    혈신이라고 해서 피처럼 검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상상했는데,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

    마오짜이가 머리와 몸통만 남은 혈신에게 다가갔다.

    “혈신 소운현이시여.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만큼 당신은 무서운 존재니까요.”

    “말은 잘하는군.”

    “천지음양지체는 모든 힘을 포용합니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죠. 감사히 쓰겠습니다.”

    “흥! 잘해봐라.”

    “물론입니-”

    “피아니스트.”

    “...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피아니스트.

    무림 세계에 없는 직업과 마오짜이의 적성을 어째선지 아는 혈신. 그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승자를 향해 비웃음을 담아 조언했다.

    “집에 가서 피아노나 쳐라.”

    “닥쳐!”

    푹!

    마오짜이의 오른손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혈신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흡성대법이로군?”

    “하하! 최강의 혈마가 흡성대법에 당한 기분이 어떠냐!”

    “흠... 이 피아니스트 실화냐?”

    “닥쳐! 닥쳐~!”

    파스스...

    혈신의 육체가 매우 빠른 속도로 노화되더니 끝내 붕괴했다.

    * * *

    “최악이네. 콜록!”

    혈마에게 배운 흡성대법으로 혈신의 힘을 흡수한 마오짜이는 만족한 얼굴로 떠났다.

    마룡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겠지.’

    그가 마오짜이에게 천마신공도 빼앗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한 것만은 확실했다.

    힘만 빼앗기고 허무하게 죽은 혈신의 강림을 도운 미녀들은?

    “꺅?!”

    “꺄악?!”

    혈마의 주술이 풀리면서 제정신을 차린 그녀들이 양팔로 알몸을 가리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응애!”

    “응애애!”

    우렁차게 우는 아기들도 일단은 무사해 보였다.

    피해는?

    “......”

    정신적인 충격이 큰 여인들이 제법 보였지만, 참혹하게 살해된 검봉이랑 비교하면 엄살이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좋은 부모를 다시 만나길.’

    나는 그녀의 명복을 빌어줬다.

    “...젠장.”

    마법소년 최강민을 상대하며 느꼈던 무력감의 재방송이었다.

    “강 공자...”

    허둥대지 않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을 빠르게 주워입은 사천제일미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저는 괜찮습니다. 안 죽었잖아요?”

    이 세계에 좀 더 오래 머물게 되겠지만, 실패한 건 아니다.

    ‘어떻게든 이겨야 해.’

    마오짜이를 만나서 대화해보고 깨달았다. 그를 설득하려면 힘으로 눌러야 한다는 사실을!

    다른 얄팍한 수단은 그를 자극해서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

    이기려면?

    내공.

    주인공의 육체에 빙의한 마오짜이는 천지음양지체를 가졌지만, 천마가 잘못 보지는 않았을 터.

    P의 적성이 피아니스트인 그는 무술에 소질이 전혀 없다.

    반면에 나는 어떤가?

    “크윽...!”

    “강 공자! 아직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 돼요!”

    “참을 만합니다.”

    세계 태권도 순위 2위의 국가대표도 쓰러트린 몸이다. 여성 태권도 1위에게 깨지긴 했지만, 그 비겁한 여자가 가볍게 치고 빠지면서 점수만 노린 탓!

    아무튼, 피아노 전문가보다 잘 싸울 자신이 있다.

    ‘내공만!’

    우리의 내공만 비슷하면 승산은 충분하다!

    (답답한 새끼일세.)

    “음?”

    나를 부축해주는 사천제일미의 얼굴을 돌아봤다.

    “...왜요?”

    “당 소저. 제가 답답합니까?”

    “예? 아뇨. 무모한 줄 알면서도 검봉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강 소자는 대협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포기해. 네가 마오짜이의 내공을 따라잡을 가능성은 없어.)

    “......”

    혈마라고 보기에는 말투가 매우 가볍고 생동감 넘쳤다.

    (소설 원작 1권 시기부터 내공을 쌓은 주인공을 215권 완결에서 시작한 네가 뛰어넘겠다고? 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하지 않냐?)

    뚝.

    걸음을 멈췄다.

    “강 공자?”

    “잠시만요.”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

    “......”

    우리를 조용히 뒤따라오는 혈마의 여자와 아이들 외에는 없었다.

    ‘내가 사천제일미에게 소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나?’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참 답답한 새끼일세! 아직도 눈치를 못 챘냐?)

    “혈신인가...”

    아직 안 죽은 모양이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하마. 나랑 계약하면 마오짜이를 이길 방법을 가르쳐주마.)

    “계약?”

    “강 공자?”

    (마음속으로 말해도 들리니 촌스럽게 떠들지 마라.)

    “......”

    무슨 계약인데?

    (나를 현세로 데려가면 지혜를 빌려주마.)

    현실로? 방법을 몰라.

    또한, 중원을 피로 물들인 혈신의 약속을 신뢰할 수 없다.

    (송선영을 레온이란 이국의 왕자에게 빼앗기고 싶냐?)

    어떻-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마라. 시간 없다. 이번에 또 죽으면 재개하기 힘들 텐데? 여자친구가 한심해진 너를 안 버린다고 장담할 수 있냐?)

    “...마오짜이가 흥분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네.”

    혈신은 사람의 예민한 부분을 잘 건드렸다.

    “강 공자. 괜찮나요?”

    “멀쩡합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네.”

    (강문수, 너는 송선영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여자친구가 모른다고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다니? 양심이 있으면 헤어져라.)

    ...이건 일이야.

    (변명하지 마라. 추하다. 네가 약해서 다른 여자에게 의지할 뿐이잖냐? 남자친구가 일을 핑계로 다른 여자를 껴안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만...!”

    “강 공자?”

    “...미안합니다.”

    계속 듣고 있으면 자괴감에 죽고 싶어질 것 같다!

    (진짜 마지막으로 물으마. 계약할 생각이 없냐?)

    “......”

    현세로 데려가는 방법을 몰라.

    (그건 신경 쓰지 마라. 너는 대답만 하면 돼.)

    “후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이건 꿈이야.’

    혈신이 무슨 술수를 부리더라도 꿈에서 깨어나면 끝이다.

    결정했다.

    (그래서 대답은?)

    “하겠다.”

    (답답한 애송이. 나와 계약한 걸 후회하지 않을 거다.)

    내가 알던 세계가 바뀌었다.

    * * *

    시체로 가득한 혈마전을 빠져나온 우리는 피와 바람을 피하려고 몰랑사로 들어갔다.

    검아미선녀, 아미신검.

    상대적으로 최근에 붙잡혀서 정신이 멀쩡한 두 여성이 경계를 서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했다.

    “흑흑!”

    “흑흑흑!”

    혈마가 못되게 굴지 않았던 걸까?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비탄과 눈물로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다.

    내 잘못도 아니잖아?

    (네가 마오짜이보다 강했으면 혈마와 검봉도 안 죽었겠지.)

    “...그렇죠.”

    궁지에 몰린 혈마가 당신을 소환할 생각도 안 했을 테고요.

    (오! 말이 조금 늘었구나. 맞다! 네가 매우 약한 덕분에 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 나오자마자 예의 없는 놈에게 당했지만.)

    “강 공자. 몸은 괜찮나요?”

    “버틸 만합니다.”

    (여자 앞이라고 강한 척하지 마라. 마오짜이가 한 말을 잊었냐?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그래서 정말로 목숨만 살려놨다.)

    “......”

    혈신의 지적대로다. 힘줄에 문제가 생겼는지 팔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운동선수에게 치명적!

    현실이었다면 수술로 끊어진 힘줄을 이어붙일 수 있겠지만, 중원의 의학 기술로 그게 가능할까?

    (너는 어렵지.)

    어렵단다.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으로 고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힘줄이 앞뒤로 끊어져서 돌돌 말렸거든.)

    “흠...”

    설명만 들어도 끔찍했다.

    (하지만 내가 있으니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치료할 방법이 있어요?

    (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면 아주 간단하지.)

    구조?

    (이곳은 마오짜이의 꿈이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그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

    마녀가 만들었는데요?

    (원리는 나도 모르니 따지지 마라. 내가 우주의 모든 주술에 통달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장담하지. 네가 마녀라고 부르는 여자도 세계의 규칙을 어길 수 없다.)

    규칙...?

    (마녀는 네 몸을 건드리지 못해.)

    음?

    (기억을 뒤져봐라. 그 마녀가 네 몸을 건드린 적이 있냐?)

    ...없다.

    하지만 불필요한 신체접촉은 친구끼리도 피하는 편이잖아? 딱히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이 답답한 새끼!)

    또 왜요?

    (잘 들어라. 그 마녀는 방해꾼인 너를 꿈에서 쫓아낸 적이 없어. 별장 바닥을 지우고 마법소년 최강민을 호텔로 유도했지. 그녀가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내 몸을 건드릴 수 없어서?

    (정답이다!)

    “강 공자. 아까부터 이마를 자주 찡그리는데,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어때요?”

    “노력해볼게요, 당 소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송선영이 알면 네놈의 눈을 접착제로 붙여서 영원히 못 뜨게 해줄 텐데.)

    “......”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무섭다.

    (너는 이 세계에 초대받지 못한 이물질이다. 그건 간섭받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이물질.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명심해라.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나만의 세계.

    (복습이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가 배경인 이곳은 마오짜이의 세계다. 맞지?)

    네.

    (그렇다면 너의 세계는?)

    ...내 몸?

    (정답이다! 이번에도 헛소리하면 송선영에게 네 만행을 전부 까발릴 생각이었는데...)

    “안 돼~!”

    “강 공자?! 괜찮아요?!”

    “...미안합니다. 끔찍한 악몽을 꾼 모양이에요.”

    (하지만 너는 마녀의 말장난에 속아서 스스로 족쇄를 찼더구나.)

    언제요?

    혈신이 마녀의 말투와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냈다.

    (이 세계에 당신이 제멋대로 들어와서 훼방을 놓았잖아요? 아직도 아니라고 잡아뗄 셈인가요?)

    그게 왜... 아!

    (세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유도했지. 이때부터 너는 세계에 침투할 때마다 엄격한 검열을 자발적으로 했다.)

    “......”

    당했다!

    혈신의 말대로다. 송선영과 최강민의 꿈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복장이 바뀌지 않았다. 그 꼼수로 마법소년 최강민을 간단히 무너트렸고.

    하지만 그 뒤부터는 어땠던가?

    ‘현지민 복장이었어.’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도,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도 현지화가 잘 됐다.

    남해수가 바꾸고 싶은 과거의 구시대에서는 방역 마스크가 호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이제야 알겠냐?)

    “...네.”

    내 몸은 나만의 세계. 그런데 이걸 안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진짜 답답한 새끼일세!)

    진짜 미안합니다!

    (이 세계의 규칙을 준수하는 몸부터 갈아치워라. 너는 내공이 실존한다고 믿냐?)

    “아뇨... 아!”

    혈신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내공? 당연히 아니지!

    실존했다면 운동선수들은 훈련 대신 공기 좋은 휴양지에 틀어박혀서 내공을 쌓았을 것이다.

    빠직-

    이 세계의 규칙을 준수하던 내 육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강문수, 너의 세계는 뭐냐?)

    “나의 세계...”

    내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운 송선영의 매끈한 다리가 아른거렸다.

    (이 새끼가?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득실거려서 글러 먹었네!)

    득실거려서 미안합니다!

    ‘나의 세계.’

    무당?

    아니다.

    (무리하지 마라. 지금의 네 몸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싹 갈아치우진 못 해.)

    “...압니다.”

    “강 공자?”

    나에게 무릎을 빌려주고 있던 사천제일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떡!

    나는 가벼워진 상체를 힘차게 일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 나았습니다.”

    “저, 정말요?!”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여자의 속마음을 엿듣는 주술을 가르쳐달라고 보채지 마라.)

    어?! 왜요?!

    (우리의 계약이 너무 강하거든. 천체망원경으로 송선영의 속옷을 엿볼 수 없는 이치지.)

    비유가 좀 불편하네요.

    (그건 네 머릿속의 음란마귀에게 따지지 그러냐?)

    “...미치겠네.”

    빨리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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