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02화 (103/232)

102화

“뭐...?”

그 이름을 들은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뚝.

이리저리 비행하면서 나를 공격하던 수많은 검도 허공에 멈췄다.

명백한 당혹감.

“마오짜이 씨!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무기를 내리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맙소사! 실화냐?’

혈마수호대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땅에 어울리지 않는 미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소설 원작에서는 귀신같이 찾아와서 방해하는 주인공 때문에 납치하지 못하는 중원의 미녀들.

하지만 주인공이 바뀌면서 전부 납치당했다.

“응애!”

“응애!”

그리고 그녀들은 혈마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아미선녀, 아미신검, 검봉처럼 최근에 붙잡힌 여성은 아직 혈마의 2세가 없었지만, 대부분은 젖먹이를 하나씩 품에 안고 있었다.

‘혈마는? 아!’

내가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고 도착한 게 아니었다.

“왔나... 큭!”

옆구리를 깊게 베이고 오른팔을 잃은 혈마는 구석에서 미녀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악당답다고 할까?

혈마는 힘없는 여자와 아이들을 방패 삼아서 버티고 있었다.

‘다행인가?’

마오짜이가 마법소년 최강민 같은 위선자였다면 여자와 아이들을 무시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기어검술로 포위만 하고 있었다.

“잠룡에게 이런 실력이...?”

“잠룡이요?”

“네. 잠룡이 틀림없어요.”

내 등에 업혀 있던 사천제일미는 어깨너머로 본 마오짜이를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다.

잠룡(潛龍).

잠자는 용.

무림에서 가장 기대되는 신랑감에게 주어지는 애매한 별호.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 원작에서 주인공은 천마의 제자라서 ‘마룡’이란 별호가 주어졌고, 잠룡은 무당파의 게으른 숫총각이 가져갔다.

‘바보 같은...!’

주인공에게 빙의한 마오짜이가 천마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구룡오봉’의 명단부터 확인해봤어야 했거늘!

반성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잠룡이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며 물었다.

“제 이름은 강문수. 무당입니다.”

슥-

나는 등에 업고 있던 사천제일미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답했다.

“무당?”

“네.”

“무당이 저에게 무슨 볼일인지...?”

“당신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주인공이 되는 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소설 제목까지?!”

나는 혼란에 빠진 마오짜이를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실패는 금물.

혈마전을 혼자서 쓸어버린 마오짜이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싸우면 죽겠지.’

그리고 이번에 죽으면 현실에서 운동선수로 활동하기 힘들 만큼 몸이 약해지리라.

절대로 죽어선 안 됐다.

“마오짜이 씨.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해보세요. 이 소설의 세계가 진짜라면 소설을 쓴 작가는 창조신이란 소리인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성적으로?”

“네. 이성적으로요.”

마오짜이는 자신(自身) 주위를 위성처럼 빙글빙글 도는 검들을 보며 되물었다.

“소설이 가짜라면?”

“예?”

이건 무슨 논리야?

“내가 마오짜이로 살아온 시간이 꿈이라면?”

“......”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지식이 큰 도움이 된 건 맞습니다. 하지만 마오짜이의 삶은 훨씬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소설의 주인공이 10년 넘게 걸린 이기어검술. 저는 스승과 천마신공 없이 5년 만에 해냈습니다.”

“아...?”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천마는 마오짜이에게 재능이 없다고 했는데?’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난해한 무공구결도 한두 번 보면 이해했고, 완벽하게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뭔...”

괴물이잖아?

“천지음양지체는 보조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의 주인공도 똑같은 성장을 보였겠지요.”

“이해가 안 되는-”

탁!

나는 기습적으로 날아온 검을 손등으로 쳐냈다.

“강문수 씨? 그 시대를 아는 당신도 저랑 똑같습니다.”

“제가요?”

“당신보다 내공이 100배쯤 되는 무림인들이 방금 수준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건...”

내가 운동선수이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건 무공을 잘 모르는 내 추측일 뿐이었다.

“무공의 기원은 불교와 도교.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고 부처나 신선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무공은 그 부산물이죠.”

“설마...?”

마오짜이의 설명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주의 섭리.

머릿속의 흩어진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공서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저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중원은 세계의 일부이며, 생명은 어떻게 태어나고, 우주는 얼마나 방대한지를...”

“...맞아요.”

나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고 있다.

“무림인들이 스승과 책으로 막연히 상상하는 지식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우주선과 비행기를 타봤다면 더욱 생생하게.”

“아...”

내가 내공을 습득한 순간부터 눈에 띄게 강해진 이유가 이해됐다.

시작부터 최고의 경지!

무림인이 평생 공부해서 간신히 얻는 깨달음을 이미 갖고 있다.

그래서?

“강문수 씨. 현실은 이곳입니다. 우리는 기이한 꿈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했을 뿐입니다.”

“기이한 꿈...”

“당신은 무당의 신묘한 통찰력으로 같은 꿈을 경험한 것 같군요.”

“......”

마오짜이가 역으로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 * *

“잠룡. 네 요구대로 흡성대법과 본좌의 목숨을 주겠다. 그 대신에 계집과 아이들을 살려줘라.”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상처를 지혈한 혈마가 참견했다.

여자와 아이들.

강제이긴 했어도 정(情)을 나눈 아내와 자식이란 걸까?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 세계관 최악의 악당답지 않은 부탁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나랑 비슷한 의문을 품은 마오짜이가 무척 의외라는 눈빛으로 혈마를 경계하며 질문했다.

“조금 전까지 믿을 수 없다며 거절하더니 무슨 심경 변화지?”

“변화가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자가 도착했을 뿐.”

혈마가 나와 사천제일미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만한 신뢰가 있을 턱이 없지만, 무고한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흠...”

혈마의 논리에 마오짜이가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녀들에게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제때 구해주지 못한 마음의 빚이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승낙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좋다.”

혈마의 확인 요구에 마오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슥, 스윽-

이기어검술로 구축한 포위망이 천천히 해체됐다.

“사천제일마. 염치없지만, 본좌의 식구들을 부탁하지.”

“어... 알겠습니다.”

저 무리에 나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아미신검과 아미선녀가 있어서 꺼려졌지만, 혈마가 목숨 걸고 지킨 여자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검봉만 빼고 전부 살려주지.”

“마오짜이 씨...?”

마오짜이의 변덕에 나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잠룡 소협?!”

이젠 살았다고 안도하던 검봉은 너무 놀라서 공황에 빠졌다.

슥, 스윽-

이기어검술로 허공을 부유하는 수많은 검의 칼끝을 검봉에게 겨눈 마오짜이가 말하길,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검봉이 남자를 깔보는 태도가 늘 거슬렸다. 그래놓고 주인공 앞에서는 아양 떠는 모습이 구역질 났지.”

“잠깐만요! 그건 검봉이 아닌 작가에게 따질 문제인데요?!”

죽이려는 이유가 황당했다.

작품의 등장인물이 마음에 안 들면 그녀를 탄생시킨 작가를 욕하는 게 순리에 맞지 않을까?

그러나 마오짜이의 귀에는 내 지적이 통하지 않았다.

“작가? 아! 검봉을 잘못 키운 부모에게도 죄를 물어야겠군.”

“죽어...!”

부모를 죽인다는 말에 눈이 뒤집힌 검봉이 마오짜이에게 달려들었다.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돌격.

슝! 슝! 슝!

검봉 주위를 맴돌며 칼끝을 겨누고 있던 검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안 돼!’

팟!

나는 마오짜이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대지를 박차며 도약했다.

그러나,

“큭?!”

천마에게 당했던 수법에 몸이 무거워졌다.

푹! 푹! 푹! 푹!

그 탓에 변변찮은 방어도 못 한 나를 수많은 검이 꿰뚫었다.

“강 공자?!”

놀란 사천제일미가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왔다.

털썩.

그녀는 온몸에 칼이 박힌 채 쓰러지는 내 몸을 받았다.

“강문수 씨. 당신의 약점은 보자마자 눈치챘습니다. 내공으로 찍어 누르면 간단하죠. 그게 아니더라도 제 상대는 안 되지만.”

“콜록! 콜록!”

현실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만큼 치명적인 피해.

내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유는 순전히 내공 덕분이었다.

‘검봉은...?’

댕강.

마오짜이의 이기어검술에 양팔을 잃은 소녀의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살인(殺人)?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사람을 제법 죽여봐서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었다.

“강문수 씨. 검봉의 생명을 지키려는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진 않았기에 죽이진 않았습니다.”

“큭!”

온몸에서 고통을 호소했다.

“당신의 잘못은 저보다 약하다는 겁니다.”

“젠장... 콜록!”

“혈마가 믿고 맡긴 여자와 자식들을 돌보며 여생을 보내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휙!

소설 원작에서 거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봉을 죽인 마오짜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부탁하마.”

“혈마...”

나에게 가족을 맡긴 혈마가 자기 발로 마오짜이를 따라갔다.

* * *

“강 공자! 상처가 벌어질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마세요!”

“......”

굳이 말하지 않아도 움직일 힘이 없었던 나는 순순히 사천제일미에게 응급처치를 받았다.

“너희는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거냐...!”

양손이 피범벅인 그녀는 마오짜이와 혈마가 떠난 뒤에도 가만히 서 있는 미녀들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심지어,

“......”

“......”

그녀의 애제자인 아미선녀과 아미신검마저 우리를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할 뿐.

“본녀가 그렇게 가르치- 읔?!”

철푸덕.

제자들에게 고함을 지르던 사천제일미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 직후,

(천마의 외손자여! 잘 와주었다. 하지만 동맹의 대가로 주술을 가르쳐준다는 약속은 못 지킬 것 같군.)

“혈마?”

(하지만 본좌는 약속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해라. 본좌보다 더욱 뛰어난 스승을 너에게 소개해줄 테니!)

“무슨...?”

혈마는 마오짜이를 따라갔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응애!”

“응애!”

미녀들이 우는 아기를 달랠 생각도 안 하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뭘 하려는 걸까?

뚝뚝...

그녀들은 아기와 자신의 손목을 깨물더니,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천제일마. 늦지 않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 이 술법은 근처에 술사가 없으면 발동할 수 없으니까.)

“술법...?”

(네게도 술사의 재능이 있기에 조건은 갖춘 셈이지.)

혈마의 조종을 받듯이 움직인 미녀들이 피로 그린 기하학적인 도형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듯 횡렬로 섰다.

“응애!”

“응애!”

어미에게 손목을 물린 아기들이 아프다고 울었지만, 그녀들은 무심하게 도형 중앙만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뭘 하려고...”

사천제일미의 목소리를 빌린 혈마가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분은 혈마의 씨를 받은 선녀의 자궁에서 태어났다. 혈마는 본좌가 맡으면 되지만, 선녀의 조건이 모호했지. 그래서 중원의 유명한 미녀들을 전부 납치해서 변수를 줄이기로 했다.)

표준편차를 줄이기 위해 수많은 미녀의 인생을 망쳐놨다는 의미.

악당다운 사고방식이었다.

“그분?”

(혈마의 아들로 태어나서 중원을 피로 물들인 천마! 모두가 두려워한 탓에 끝내 봉인된 비운의 마신.)

“...어?! 잠깐.”

이건, 소설 원작 215권에서 궁지에 몰린 혈마가 외친 대사랑 똑같았다.

우우웅-

미녀와 아이들의 피로 그린 기하학적인 도형이 불길한 색채로 빛나기 시작했다.

“강림하소서!”

“강림하소서!”

사라락~

일제히 옷을 벗고 전라(全裸)가 된 미녀들이 도형 중앙을 향해 절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악마를 숭배하는 교단의 집단 광기를 보는 듯했다.

(강림하소서!)

“강림하소서!”

사라락~

사천제일미마저 무언가에 홀린 얼굴로 옷을 벗고 그녀들을 따라 했다.

“당 소저까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응애!”

“강림하소서!”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미녀들의 기도가 뒤섞인 혼돈.

스르륵...

혈마수호대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기하학적인 도형의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듯 서서히 흘러갔다.

이윽고,

(때가 됐노라!)

혈마가 그분의 강림을 알렸다.

쿵-

운석처럼 묵직한 무언가가 이 세계의 심장부에 떨어졌다고 느껴지는 기묘한 예감.

도형 정중앙에서 솟아난 그 운석이 말했다. 자신을 경배하듯 바닥에 바짝 엎드린 미녀들을 둘러보며,

“예의를 아는군.”

슝! 슝! 슝!

그리고 이기어검술로 수많은 검을 조종하며 되돌아온 마오짜이를 보며,

“예의가 없군.”

푹!

혈마의 그분은 이 땅에 강림하자마자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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