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01화 (102/232)
  • 101화

    [5장-9절] 같은 편이야!

    나에게는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편리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미봉이 문제네. 저 어린 것이 너무 강력해. 나이가 깡패야! 하! 어떻게 하지?)

    “미봉은 머리카락이 참 곱구나.”

    “감사합니다!”

    “정말 기특하구나. 어린 나이에 여인의 몸으로 무림행을 결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강 공자는 미봉처럼 활발한 여인이 취향이려나? 어머! 또 나를 보고 있어! 설마, 내게 관심이?)

    이토록 속마음이 훤히 보이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다.

    원인은?

    ‘혈마.’

    그가 사천제일미의 몸에 주술적인 무언가를 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속마음만 들릴 리 없으니까.

    혈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정말로 영령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했었는데...”

    “강 공자님. 영령이 보이세요?”

    “흠. 지켜봐야죠.”

    호기심 가득한 미봉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만난다는 거지?’

    나는 사천제일미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혈마의 은신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따로 그에게 귀띔받은 것도 없는 듯한데...

    그리고 닷새가 지났다.

    “아무래도 마룡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네요.”

    “중요해?”

    하남성의 사내아이들에게 무용담을 들려주며 시간을 보내던 꼬마 권왕이 물었다.

    “매우 중요합니다.”

    “천지음양지체가 마룡의 천마신공을 노려서?”

    “잘 아시네요.”

    “마룡이 이미 당했을까?”

    “아마도...”

    이동하지 않고 하남성에서 시간을 보낸 나는 결론을 내렸다.

    사천제일미를 모시러 온 아미파 관계자, 미봉을 만나러 온 모용세가 관계자, 다양한 정보를 가르쳐주는 개방의 거지들, 나에게 도전하는 자살희망자...

    그동안 여러 인간이 왔지만, 마룡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나에게 ‘황제의 사생아’란 약점이 잡힌 걸룡을 이용해서 마오짜이의 이름을 널리 퍼트릴까?

    가장 쓰고 싶지 않은 수단.

    꿈의 규칙을 어기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훈이 그랬으니까.’

    호주머니에 부친의 동영상이 들어있는 외장메모리를 챙겨가서 꿈속에서 활용했다.

    그 뒤부터 차단!

    꿈의 세계에 기본적인 소지품조차 가져갈 수 없게 됐다.

    “강 공자.”

    (나의 공자님~!)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제법 생기가 돌아온 사천제일미가 내게 다가왔다.

    “네. 당 소저.”

    “할 말이 있어요.”

    (제자들도 이해해줄 거야!)

    “뭔데요?”

    “무림의 안녕을 위해 사랑하는 두 제자, 아미선녀와 아미신검을 이만 놔주기로 했어요.”

    (지금쯤 나처럼 혈마의 흡성대법에 내공을 빼앗겼겠지. 이미 구하긴 늦었어. 포기하는 게 맞아.)

    “그렇군요.”

    소설 원작의 사천제일미는 제자들을 딸처럼 사랑했었는데...

    그녀가 주인공을 포기한 이유도 스승과 제자가 같은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도덕적인 문제였다.

    ...는 개뿔, 작가의 윤리관이 개입한 게 틀림없다.

    “그러니 혈마의 꼭두각시가 될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자들의 말만 듣고 사악한 남자로 오해할 뻔했잖아. 강하고 잘생긴 강 공자님 탓을 왜 해?)

    “...네. 믿습니다.”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다.

    “고마워요.”

    (어머! 신뢰로 가득한 눈빛. 나를 가져요! 강 공자님~!)

    “괜찮으시죠?”

    마음이 좀 아픈 것 같다.

    “괜찮... 윽!”

    “왜요?”

    “가, 갑자기 머리가...”

    (천마의 외손자여. 본좌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내일 술시에 몰랑사로 와라. 기다리마.)

    “......”

    사천제일미는 두 제자를 버렸음에도 혈마의 꼭두각시였다.

    * * *

    몰랑사(沒浪寺).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215권에 등장하는 버려진 절이다.

    ‘여길 오게 될 줄이야.’

    몰랑사는 무림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는 장소이며, 세계관 최강자 천마가 목숨을 잃는 곳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위기에 빠진 아름다운 아내들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됐으니!

    즉, 부모 같은 스승을 버리고 여자를 선택한 쓰레기 제자였다.

    “혈마는 안 보이네요.”

    (강 공자님이 미봉을 버리고 나를 선택해줬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절 안으로 들어가죠.”

    (아무도 없는 절 안에서 강 공자님의 품에 푹 안겼으면...!)

    “...네.”

    나는 혈마의 꼭두각시인 사천제일미만 데리고 몰랑사에 왔다.

    꼬마 권왕과 미봉은?

    혈마를 신뢰할 수 없기에 혈마수호대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소림사에 맡기고 왔다.

    소림사(少林寺).

    하남성에 위치한 중원의 5대 명승지 숭산(嵩山)에 있는 절.

    중원 불교의 심장이며,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강력한 스님은 전부 소림사 출신일 정도로 막강한 무공과 전력을 자랑한다.

    ‘무림의 여자들은 위기의식이 너무 없는 것 아니야?’

    수면제를 먹고 허무하게 납치된 천하제일미나, 위험한 장소에 데려가라고 떼쓰는 미봉이나...

    소림사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게 애원하던 미봉의 얼굴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휘잉~

    벽과 문이 파괴된 몰랑사의 안쪽까지 바람이 들어왔다.

    “슬슬 술시인데...”

    술시(戌時).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이 시대에는 정확한 시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어림짐작할 뿐이지만, 해의 위치로 대략적인 시간을 가름할 수 있다.

    “해가 아직 떨어지지 않으니 기다려보죠.”

    (지금 말할까? 기다릴까?)

    “...당 소저.”

    “네?”

    “혹시, 하실 말씀이 있나요?”

    “아니요.”

    (기다리자! 나도 여자로서 자존심이 있지! 하지만 미봉, 그 요망한 여우가 마음에 걸리는데...)

    “그러시군요.”

    사천제일미가 중요한 비밀을 우리에게 감췄다고, 잠시나마 의심했던 내가 너무 한심했다.

    스윽-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서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

    “...늦네요.”

    “강 공자는 혈마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나요?”

    “따로 들었습니다.”

    사천제일미는 혈마의 주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자신이 여전히 그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음을!

    이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상당히 충격받지 않을까?

    우리는 좀 더 기다렸다.

    “이상한데...”

    “함정이 아닐지...”

    (제자들은 잊어! 흔들리지 마! 강문수 공자님만 생각해!)

    “차라리 혈마의 함정이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때는 미약하게나마 도울게요.”

    (그때는 강 공자님을 돕고 점수를 따는 거야!)

    “...마음만 받을게요.”

    젊음을 유지할 내공만 남은 사천제일미가 전력에 보탬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덜컹!

    절 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강 공자!”

    “가보죠!”

    우리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몰랑사 밖으로 달려갔다.

    “으윽...”

    문 앞에 피투성이의 복면인이 쓰러져 있었다.

    “혈마수호대?”

    “맞아요. 아미파를 습격한 혈마수호대가 틀림없네요.”

    (혈마는 안 오고 어째서 다 죽어가는 혈마수호대가?)

    나도 사천제일미랑 같은 생각이다.

    “혈마는?”

    “스, 습격을...”

    복면인이 힘겹게 대답했다.

    “습격받았다고?”

    “이, 이것을... 크윽!”

    털썩.

    숨이 멈춘 복면인의 손에는 주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걸 나에게 전달하기 위해?

    뼈를 엮어서 만든 그 목걸이는 매우 꺼림칙했다.

    “흠. 한 번 써보죠.”

    “강 공자님!”

    (너무 위험해요!)

    “괜찮습니다. 지금은 망설일 시간이 없는 것 같네요.”

    혈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함정일 가능성?

    그것보다는 혈마가 죽어서 유용한 주술을 배울 기회를 놓칠 위험성이 더 걱정됐다.

    슥-

    목걸이를 써봤다.

    “...아무런 일도 없네요.”

    “정말요?”

    (내가 예민했나?)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고 사천제일미에게 건냈다.

    “당 소저도 한 번 써보세요.”

    “...네.”

    (불안하긴 하지만, 강 공자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 없어!)

    슥-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진 사천제일미가 목걸이를 착용했다.

    “조금 꺼림칙할 뿐이네요.”

    (정말이었군. 지금부터 본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잘 어울리세요.”

    내가 아닌 사천제일미가 써야 효과가 있는 목걸이였다.

    “예?”

    “당 소저에게 잘 어울려요.”

    “그, 그렇다면야...”

    뺨이 살짝 빨개진 그녀는 목걸이에서 손을 뗐다.

    “같이 산책하실래요?”

    “기꺼이!”

    (몰랑사의 후문에서 일직선으로 쭉 달려라. 본좌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 가라.)

    “...조금 뛸까요?”

    “네.”

    들짐승의 발톱으로 겉을 할퀸 것 같은 소나무 앞에서,

    (멈춰라.)

    “당 소저. 여기서 잠시 쉬죠.”

    “네? 네. 좋아요.”

    (이제 동쪽으로 가라.)

    “...이제 가죠.”

    “예? 아직 쉬지도 않았는데...”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쉬려던 사천제일미가 당황했다.

    “제가 업어드릴게요.”

    “그, 그건...!”

    (본좌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천천히 걸어가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면 길을 잃게 된다.)

    “싫으세요?”

    “조금 무거울 수도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러면... 실례할게요.”

    목부터 귀까지 새빨개진 사천제일미를 등에 업고, 정말로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스르르...

    물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멈춰라.)

    뚝.

    혈마의 지시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강 공자?”

    (이 앞에는 본좌가 설치한 진법이 있다. 함부로 발을 들이면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지!)

    “안개가 정말 짙네요.”

    수증기가 응결된 자연적인 안개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네요.”

    (지금부터 본좌가 길을 알려줄 테니 집중해서 따라와라. 북동쪽으로 조금 걸으면 돌탑이 6개 보일 것이다. 왼쪽에서 2번째와 3번째 돌탑 사이의 길로 가라.)

    “2번째...”

    “강 공자?”

    “이건 혈마의 진법이에요. 저를 믿고 따라와주세요.”

    “네...”

    (멈춰라. 이 앞에는 사문이...)

    나는 안개가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 * *

    “이건...?”

    처음부터 함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목이 없는 혈마수호대의 시체를 보고 깨달았다.

    혈마가 위험하다고.

    “강 공자! 대체 무슨 일이?”

    “꽉 잡으세요.”

    “예? 꺅?!”

    안내가 사라지면서 시야가 확보된 나는 빠르게 달렸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산골 마을.

    하지만 소설 원작의 설정을 아는 나는 단번에 이곳이 어디인지 보자마자 눈치챘다.

    혈마전(血魔殿).

    엄밀히 따지면 이 마을은 경비초소 같은 역할이고, 진짜는 마을 뒤편에 숨겨져 있다.

    ‘마룡은 아니야.’

    만나본 그는 강하긴 하지만, 혈마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세계관 최강자 천마를 제외하면 단 한 명밖에 없다.

    “마오짜이...”

    “네?”

    (천마의 외손자여. 중원을 피로 물들인 천마가 잠들어 있는 혈마전에 온 것을 환영하마.)

    “환영은 개뿔.”

    소설 원작을 읽은 주인공의 습격으로 망하게 생겼는데.

    “으윽...”

    “크으윽...”

    마을 뒤편의 공동묘지에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뒤엉켜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평소에는 매우 강한데, 주인공 앞에서만 약해지는 혈마수호대.

    그들의 시체가 공동묘지 너머의 바위산까지 이어졌다.

    “혈마는?”

    “저, 저쪽에... 크윽!”

    그나마 멀쩡한 복면인이 손끝으로 혈마의 위치를 알려줬다.

    “고마워.”

    팟!

    아직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속력을 올렸다.

    ‘마오짜이가 어째서 여기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드디어 만날 기회가 왔다.

    만약, 혈마가 죽고 그를 놓친다면?

    다시 원점.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양하고 싶다.

    “헙?!”

    사천제일미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풀며, 허리춤에 찬 녹림십팔도를 뽑아서 휘둘렀다.

    캉-!

    불꽃이 튀겼다.

    나를 기습한 흉수의 정체는?

    ‘허! 이기어검술이냐!’

    주인 없는 검이 드론처럼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

    내공을 이용해 검을 허공에서 조종하는 최고급 기교.

    마룡처럼 비도를 던지던 주인공은 소설 100권쯤부터 이기어검술을 쓰기 시작하는데...

    ‘오! 맙소사!’

    캉! 캉! 캉! 캉...!

    사방에서 날벌레처럼 달려드는 검을 쳐내며 빠르게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멈춰! 같은 편이야!”

    “......”

    “마오짜이~!”

    나를 보지도 않고 공격하는 남자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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