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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00화 (101/232)
  • 100화

    “죽어라!”

    촤아-

    입술을 질끈 깨문 혈마가 손에 쥔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정확히 가로.

    ‘검풍!’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에 비단이 싹둑 잘려나갔다.

    “이 정도는- 아차!”

    내가 피하면 미봉의 허리가 절단되는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리라.

    스르릉-

    망설임 없이 걸음을 멈추고 허리에 찬 녹림십팔도를 휘둘렀다.

    “큭!”

    파앙!

    천마랑 비교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지만, 검풍을 정면으로 막아선 내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나의 유일한 약점.

    다양한 수단으로 오랜 기간 내공을 쌓아온 무림인들이랑 내공 경쟁이 되질 않는다.

    ‘혈마는 혈마인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215권 완결 직전까지 주인공을 괴롭힌 악역다운 힘.

    특히, 다른 무림인의 내공을 빼앗는 무공 ‘흡성대법’으로 빠르게 쌓은 내공은 양심이 없는 수준이었다.

    “강 공자님...!”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혈마에게 도망칠 시간을 주고 말았다.

    “운이 없는 날이군.”

    “놔라!”

    그 짧은 사이에 혈마는 손발이 포박된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창문틀 위에 선 채로 내게 물었다.

    “사천제일마가 맞느냐?”

    “맞아.”

    “허! 천마의 외손자라더니. 본좌의 검풍을 정면에서 받아내고도 생채기 하나 없는가.”

    쾅! 콰당!

    6층의 소란을 들은 5층에서도 난리가 났다.

    “막아- 으악?!”

    “교주님을 보호해라!”

    “큭! 권왕이다!”

    꼬마 권왕과 혈마의 부하들이 싸우고 있는 듯했다.

    바둥바둥.

    혈마는 꽁꽁 묶인 손발을 비트는 여자의 무의미한 저항을 귀엽게 바라보다가 내게 질문했다.

    “안 덤비나?”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데?”

    “같은 생각인 듯해서.”

    “나도 그래.”

    뼈다귀 사부님도 말했지만, 혈마는 무림인이 아니다.

    술사(術師).

    무인으로서도 강해서 종종 착각하는데, 그는 몸보다 머리를 쓰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건 ‘무당’인 나도 마찬가지. 소모적인 폭력보다 이성적인 협상을 선호하는 편이다.

    “네가 본좌를 적대하는 이유는 미봉 때문이겠지?”

    “맞아.”

    그건 표면적인 이유. 마오짜이가 찾고 있는 천마의 제자 ‘마룡’을 유인할 아미신검을 구하러 왔다.

    “앞으로 미봉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본좌는 미녀가 많다. 미봉보다 아름다운 천하제일미도 있고.”

    “아!”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맞아! 천하제일미가 있었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초반부에 천하제일미가 혈마수호대 1명에게 붙잡히는 사건이 있다.

    고작 1명!

    수면제에 당했다는 설정이다.

    아직 햇병아리였던 주인공은 힘들게 혈마수호대 1명을 쓰러트리고 천하제일미를 구출하는데...

    ‘안 구했구나!’

    주인공에게 일찌감치 최고의 미녀를 붙여주고 싶었던 작가. 하지만 원작의 개연성 없는 전개가 천하제일미의 인생을 망쳐놨다!

    “이해했겠지? 본좌에게는 천하제일미가 있다. 그래서 미봉에는 큰 욕심이 없노라.”

    부들부들.

    순위에서 천하제일미에게 밀렸다는 굴욕에 몸을 떠는 미봉.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천하제일미를 수소문해봐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중원 최고의 미녀!

    실종됐다면 당연히 난리가 나야 정상이지만, 그녀의 평소 행실이 불량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방랑벽.

    남장.

    여행을 좋아하는 천하제일미는 남자로 변장해서 아름다운 얼굴과 정체를 항상 감췄다.

    이러면 누가 알겠는가?

    수면제에 당할 정도로 한심한 천하제일미가 매우 강하다는 설정을 욱여넣은 작가 탓도 있다.

    아무튼,

    “당장은 증명할 수 없잖아?”

    혈마는 진실만을 얘기했지만, 지금은 믿기 힘들다는 식으로 밀어붙여야 협상할 수 있다.

    “흠. 천하제일미는 본좌도 아끼기에 보여주긴 어렵다.”

    “이해해.”

    “하하! 말이 통하는 자는 참으로 오랜만이군!”

    혈마는 대화보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무림인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

    ‘내 목적을 잊은 건 아닌데...’

    마오짜이.

    그리고 마오짜이가 노리는 마룡.

    아미신검은 마룡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서 구출할 계획.

    그런데 혈마랑 말이 통한다는 걸 깨닫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여자는 누구야?”

    “사천제일미다.”

    “......”

    사천제일미.

    아미파의 자존심이 혈마의 옆구리에 짐짝처럼 들려 있었다.

    원인은?

    이것도 혈마수호대가 주인공 앞에서만 약해지도록 설정한 작가의 무책임한 만행 탓이다.

    “사천제일미를 주마.”

    “할머니잖아!”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아미선녀와 아미신검, 친자식처럼 아끼는 두 제자의 목숨이 본좌의 손에 있는 한, 사천제일미는 절대 반항하지 못한다.”

    “철저하네.”

    “강하고 아름다운 꼭두각시지.”

    부르르.

    꼭두각시 취급당한 사천제일미는 지독한 굴욕감에 몸을 떨었지만, 혈마에게 반항하진 못했다.

    “비열한 놈...”

    딸처럼 여기는 두 제자를 인질로 잡고 복종을 강요하는 혈마!

    악당의 모범다웠다.

    “나를 바보로 알아? 아미신검과 아미선녀가 당신의 손에 있는 한, 사천제일미는 감시자일 뿐이야.”

    “하핫! 제법이군.”

    순순히 인정한 혈마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

    조금 전에 ‘아미신검’에서 바뀐 요구를 말했다.

    “혈마. 나에게 주술을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뜬금없군.”

    “나는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령이랑 대화할 수 있거든.”

    뼈다귀 사부님 외의 망령은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님은 천마가 확인시켜줬다. 소설 <이 천마 실화냐?> 원작에도 없는 ‘딸’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과연... 그랬군. 아까부터 느꼈던 동질감이 이거였나.”

    “가르쳐줄 수 있어?”

    “본좌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동맹.”

    혈마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협상 같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탈출할 생각부터 했다.

    무림은 철저한 약육강식!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제자가 아니라 동맹?”

    “나보다 약한 당신의 제자가 될 리 없잖아? 그리고 혈마수호대가 미봉을 노리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에 있지도 않았어.”

    “살짝 거슬리긴 하지만... 네놈을 인정하마. 맞는 말이야.”

    혈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내가 혈마수호대를 조금 죽이긴 했지만, 미봉을 노린 대가로는 싸다고 볼 수 있는 수준.

    초면인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훈훈하게, 빠르게 협상을 진행했다.

    “강 공자님?”

    옆에서 조용히 듣는 미봉은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망령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

    그녀에게는 얘기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강 소협...!”

    우당탕!

    계단을 부술 기세로 뛰어 올라온 꼬마 권왕이 합류했다.

    “교주님!”

    “침입자입니다!”

    “권왕이... 헉!”

    마찬가지로 5층에서 창문을 타고 올라온 혈마의 부하들이 6층을 빠르게 채워갔다.

    “좋다. 받아들이지.”

    휙~

    혈마는 꼼짝달싹 못 하는 사천제일미를 내 앞에 사정없이 던졌다.

    “꺅?!”

    단단한 바닥이랑 충돌한 그녀의 고통 섞인 비명은 깔끔히 무시.

    “이 할머니는 왜?”

    “시험이다.”

    “아하!”

    “사천제일마. 네가 정말로 영령(英靈)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펄럭~

    몸을 돌린 혈마가 부하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안 쫓아도 돼?”

    주먹이 피로 물든 꼬마 권왕이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고통을 호소하는 사천제일미를 어깨에 짊어졌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 * *

    -속보! 천마의 외손자가 사천제일미를 구출했다!

    -충격! 사라진 천하제일미가 혈마의 여자였다고?

    -홍보! 지금은 미봉시대!

    중원 무림에 뉴스가 존재한다면 대충 이런 제목의 기사로 길거리가 도배되지 않을까?

    특히, 중원 최고의 미녀가 악당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은 수많은 협객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나는 말한 적이 없는데...”

    천하제일미가 혈마에게 납치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와 미봉밖에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흥~ 흐응~♪”

    미봉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미봉 소저. 요즘 기분이 좋은 것 같네요.”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던 언니가 변태 늙은이랑 결혼했거든요.”

    “참... 솔직하시네요.”

    “소녀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닙니다. 상관없죠.”

    소설 원작에서는 천하제일미와 미봉이 친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 공자님이 원치 않으시면 앞으로는 내색 안 할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미봉 소저의 솔직한 모습이 좋으니까요.”

    “어머!”

    “정말입니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원작이랑 다른 행동을 보이는 미봉은 좋은 참고가 됐다.

    덤으로 권왕도...

    “내가 주먹 하나로 혈마수호대를 해치웠지!”

    다른 의미로 참고가 됐다.

    무공(武功).

    외모와 연애에만 관심 있는 미봉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줬다.

    “미봉 소저.”

    “네!”

    “걸룡이 제대로 소문내고 있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부탁한 일은 똑바로 하는 거지니까요.”

    “흠.”

    나는 넋을 놓은 채 창문 밖의 푸른 하늘만 바라보는 아름다운 할머니를 힐끔 쳐다봤다.

    사천제일미.

    혈마에게 당한 충격에서 제법 회복됐지만, 여전히 말수가 없고 표정은 온종일 어두웠다.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마룡이 너무 늦어.’

    그 소심한 남자가 아미신검을 구하고 싶다면 사천제일미를 구출한 나를 찾아와야 정상.

    그새 마음이 식은 걸까?

    마룡이 아미신검을 찾으러 떠났다는 정보의 출처는 걸룡이었다.

    ‘그 거지가 거짓말을?’

    마룡이 아직 남남인 아미신검을 포기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찾으러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상식적으로 이게 정답이고.

    마오짜이를 유인한다는 내 계획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현령 사태(師太).”

    “......”

    소설 원작에서는 그녀를 이 호칭으로 자주 불렸는데?

    하지만 별 반응이 없다.

    “사천제일미?”

    “...혈마에게 내공을 빼앗긴 본녀에게 그 호칭은 과분하네요.”

    사천제일미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보살님!”

    “혈마에게 더럽혀진 몸이에요. 속세의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현령 할머니.”

    “당사양입니다! 현령은 귀의하며 받은 법명(法名)이고요!”

    “당사양 할머니.”

    “혈마가 선심 쓰듯 젊음을 유지할 내공은 남겨줬어요.”

    그러니 할머니라고 부르지 말라는 소리였다.

    “갑자기 말씀이 많아지셨네요.”

    “......”

    내가 괜한 말을 한 걸까, 사천제일미가 다시 입을 닫았다.

    “당 어르신.”

    “...몸이 더럽혀졌어도 본녀의 마음은 아직 소녀예요. 상처 될 발언은 삼가세요.”

    “그러면 뭐라고 불러들일까요?”

    “당...”

    “뭐라고요?”

    사천제일미는 내 시선을 피하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당 소저...”

    매우 뻔뻔한 요구를 했다.

    탕!

    “당 장로님! 아미파의 큰 어른답게 체통을 지켜주세요!”

    듣다가 폭발한 미봉이 사천제일미를 맹비난했다.

    “어머! 본녀는 최근에 끔찍한 일을 겪었어요. 너무 몰아붙이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연민을 자극하는 반격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당 소저.”

    “...고마워요.”

    원하는 호칭으로 불러줬을 뿐인데, 구원받은 어린 양 같은 표정을 짓는 사천제일미.

    주인공의 역할을 똑바로 하지 못한 마오짜이 탓이다.

    “혈마가 말한 시험이 뭘까요?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전혀...”

    (어머! 강 공자가 나를 소저라고 불러줬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

    이건 뭐지?

    “미안해요. 도움이 안 돼서.”

    (안 돼! 강 공자랑 눈을 못 마주치겠어! 침착해. 아니야! 틀렸어! 그냥 망가질래!)

    “저기, 괜찮으신가요...?”

    “끔찍한 기억 때문에 여전히 힘들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할 만큼 했어! 이젠 내 인생을 살 거야! 강 공자! 한 번 더 소저라고 불러줘요!)

    “...당 소저.”

    “네.”

    (꺅꺅! 또 불러줬어! 어머! 더러워진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너무 멋져...)

    “짐작이 가네요.”

    혈마가 사천제일미를 나에게 넘긴 이유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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