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96화 (97/232)
  • 096화

    바둑판을 가운데에 놓고 두 아저씨가 대국을 겨루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가 들어간 새하얀 도복을 입은 아저씨가 화산파의 장문인일 터.

    그렇다면,

    ‘검은색 쪽이 천마겠네.’

    못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꽃중년인 화산파의 장문인이랑 비교하면 너무 평범했다.

    그는 대국이 뜻대로 안 풀려서 불편하다는 얼굴로 바둑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장문인! 오랜만이야!”

    나에게 먼저 가라고 했던 꼬마 권왕이 대뜸 앞으로 나섰다.

    “...설마, 권왕인가?”

    “맞아! 장문인은 하나도 바뀐 게 없는걸!”

    “그러는 자네는 너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군. 그리고 그 가벼운 말투는 대체...”

    “내 말투가 어때서?”

    “그야... 아니, 모르면 됐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하늘은 참 공평하군.”

    “뭐래?”

    “과자가 있는데...”

    “오! 얼른 줘!”

    “...무서울 정도로 공평하군.”

    꼬마 권왕을 과자로 얌전하게 만든 화산파 장문인은 내 뒤편으로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모용 가의 여식은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는군.”

    “검왕 어르신을 뵈어요.”

    미봉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검왕(劍王).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가장 검을 잘 다루는 남자에게 붙은 명예로운 별호다.

    검왕의 유일한 대적자는 악의 세력에 몸을 담그고 있는 또 한 명의 천재 검사인 검마(劍魔)뿐.

    이건 작가의 소설 설정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궁금한걸.’

    검술에는 나도 자신 있었기에 검왕이랑 겨뤄보고 싶었다.

    “천마여. 그대의 외손자가 왔는데도 대국만 볼 건가?”

    “...본좌의 집중을 깨려는 얄팍한 속셈에 안 당한다.”

    천마가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대세가 기울은 대국을 뒤집기에는 이미 늦었네.”

    “아직 안 끝났다.”

    “거참...”

    “본좌의 후손을 자칭하는 멍청이는 지금까지 숱하게 보았다. 외손자만 이걸로 3번째다.”

    내 정체를 안 믿는 천마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선인(善人)은 부족한 자(自)의 스승이오,

    불선인(不善人)은 가득한 자의 재원(財源)이랴,

    이름 없는 도(道)의 후왕(後王)을 귀하게 모시라,

    백성들에게 박(博)하여 고르게 이슬이 맺히는구나.」

    “이것도 3번째이신가요?”

    뼈다귀 사부님의 남긴 책의 구절을 읊으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바둑판에서 시선을 뗀 천마가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외손자입니다.”

    “거짓말.”

    “그러면 어머니가 거짓말하신 모양이네요.”

    “...그것을 가지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나는 품에서 뼈다귀 사부님의 유품인 책을 꺼냈다.

    휙~

    “손놀림이 제법이구나.”

    순식간에 내 앞으로 이동한 천마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손버릇이 안 좋으시네요.”

    책을 빼앗기기 직전에 손을 빼서 지켜낸 나는 싱긋 웃었다.

    “버르장머리없는 놈.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

    “제 물건입니다.”

    “본좌의 물건이다.”

    “이젠 제 물건입니다.”

    “본좌에게 돌려주기 위해 찾아온 것 아니더냐?”

    휙~

    말하는 도중에 기습적으로 책을 또 노린 천마였지만, 나의 빠른 반응으로 헛손질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세요.”

    “뭘?”

    “외손자란 사실을요.”

    “...인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본문은 일인전승이다. 그리고 본좌는 이미 제자가 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천마신공에 관심 없습니다.”

    “하아?”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뜬 천마.

    하지만 사실이다.

    ‘천마가 알고 있는 마오짜이의 행방이 궁금할 뿐이지.’

    진짜 외손자가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천마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재능이 없어서 버린 딸아이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천마신공을 무시하는 태도를 두고 볼 수가 없구나.”

    “드디어 인정하셨네요.”

    “그래. 외손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였을 거다.”

    “예?”

    휘청.

    갑자기 중력으로 위에서 찍어 누르듯 온몸이 무거워졌다.

    ‘이게 무슨...?!’

    방금까지 멀쩡했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톡.

    내가 힘겹게 버티는 틈에 천마가 손쉽게 책을 빼앗았다.

    “놀랄 거 없다. 내공으로 찍어 눌렀을 뿐이니.”

    “큭...!”

    내공이라고?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맙소사... 이 공간 전체가 천마의 내공이었다고...?’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지구에 사는 인간이 만유인력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바보 같다.

    이것이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 최강자.

    이길 수 없다.

    “평범한 무인이 내공을 쌓으려면 꼼짝할 수 없다. 하지만 천마신공은 자유롭게 내공을 쌓을 수 없다. 언제든지 항상.”

    “망할...”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 익힌 무공의 효과도 조사하지 않고 꿈에 들어왔을 리 없잖는가?

    다만,

    ‘이건 너무하잖아!’

    소설 원작에서 주인공에게 아깝게 패배한 악역들이 불쌍했다.

    주인공의 승리는 당연하니까. 사기적인 무공을 익힌 주인공을 상대로 이길 뻔한 악역들의 투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놀랐다.”

    “그런가요?”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버티면서 옆을 보았다.

    “큭...”

    “아으...”

    권왕과 미봉은 위에서 짓누르는 내공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사라락~

    천마가 책의 상태를 세심하게 확인하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저 둘은 살살봐주고 있으니.”

    “...저도 봐주고 있나요?”

    “당연하다. 본좌가 애송이를 상대로 진심을 보일 것 같으냐?”

    “아직 버티고 있는데요?”

    “이젠 아니다.”

    톡.

    천마가 손끝으로 내 몸을 살짝 건드리자마자 무너진 뚝처럼 균형이 허물어졌다.

    “크윽?!”

    털썩.

    나도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엎드리고 말았다.

    “본좌의 책을 돌려준 보답으로 가르침을 주겠다.”

    “......”

    “너는 내공이 너무 적다. 화산파 문지기만도 못하다.”

    “그랬나요?”

    “괜찮은 내공심법으로 1년만 내공을 쌓으면 본좌 외에는 적수가 없을 것이다.”

    “.......”

    살짝 소름이 돋았다. 뼈다귀 사부님도 나에게 비슷한 조언을 했었으니까.

    ‘딱 3년만 몸을 사리면서 숨만 쉬면 천하의 모든 강자가 내 앞에 무릎 꿇는다고 했는데...’

    3년.

    뼈다귀 사부님이 말한 모든 강자에는 부친인 천마도 포함되리라.

    천마가 혀를 찼다.

    “본좌를 시샘한 하늘의 장난이 틀림없다. 재능 없는 딸아이의 뱃속에서 이런 괴물이 나오다니.”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애비가 누구냐?”

    “모릅니다. 그리고 질문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버르장머리없는 놈.”

    스륵-

    책을 소매에 넣은 천마가 몸을 돌리자마자 내공의 압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푸하!”

    “콜록콜록!”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던 권왕과 미봉이 살았다는 환희에 찬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이네.’

    둘의 몸에는 이상이 없는 듯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본좌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고민해보겠다.”

    “할아버지.”

    “뭐냐?”

    바둑판 앞에 도로 앉은 천마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

    “마적의 습격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제자로 받으시지 않았나요?”

    “없다.”

    “분명히 있을 겁니다.”

    “천마신공은 일인전승이다. 본좌가 사문의 규율을 어길 것 같으냐?”

    “흠...”

    천마가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내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아!’

    내 실수를 깨달았다.

    “할아버지.”

    “...또 뭐냐?”

    씰룩.

    매우 귀찮다는 천마의 표정이랑 대조되는 입꼬리.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 최강자의 약점을 발견했다.

    할아버지!

    뼈다귀 사부님처럼 재능이 없었다면 무시당했겠지만, 나는 천마의 기대치를 충족한 것 같다.

    “마적의 습격으로 고아가 된 사내아이를 본 적 없으신가요?”

    “있다.”

    “어디서...”

    “그런데 그런 사내아이가 한둘인 줄 아느냐?”

    질문하는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 천마.

    나는 피하지 않고 답했다.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한 사내아이가 있었을 겁니다.”

    “...확신하는 이유가 뭐냐?”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애독자인 마오짜이가 천마신공을 쉽게 포기할 리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재능?

    그 재능을 온전히 살릴 수 있는 우수한 무공이 없으면 소용없다.

    “보았거든요.”

    “보았다고?”

    “저는 무당이라서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무당? 점쟁이 말이냐?”

    “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 *

    “그 아이는 천 년에 한 번 태어나는 천지음양지체였다.”

    천지음양지체(天地陰陽持體).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에서 무공을 배우기 가장 적합한 체질(體質).

    모친의 자궁 밖으로 나올 때부터 환골탈태를 10번쯤 한 경지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그만큼 사기적인 몸뚱이다.

    “허어! 천지음양지체라니...!”

    가만히 듣고 있던 화산파 장문인마저 눈이 돌아갔다.

    천지음양지체.

    주인공은 엉덩이 무거운 명문학원의 학원장마저 탐내는 재능의 소유자란 뜻이다.

    “그런데 왜 버리셨어요?”

    “이미 사문이 있었다.”

    “아...”

    나는 마오짜이가 현실에서 전통 무술을 배우고 다녔음을 상기했다.

    “그 아이는 아니라고 했지만, 본좌의 눈을 속일 순 없다.”

    “그래도 천지음양지체인데요?”

    사문이 있다는 이유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이상한 무공으로 망가진 천지음양지체였다.”

    “이상한...”

    현실의 잘못된 지식이 그에게 독이 됐다.

    “본좌도 그 아이가 정말 아까웠다.”

    “그러셨을 것 같아요.”

    “이뿐이면 천고의 영약으로 고쳐서 써보겠는데,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집중력과 인내심마저 떨어졌다.”

    “이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주인공의 집중력과 인내심은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알몸으로 등산하기.

    폭포 위에서 명상하기.

    절벽에서 잠자기.

    가혹행위로 보이는 엽기적인 훈련이 매우 많았는데...

    재벌 2세로 태어나서 편하게 살아온 마오짜이에게 주인공 같은 생활은 무리였으리라.

    “발이 꼬여서 넘어지고 질질 짜는 녀석을 어디에 쓰겠느냐?”

    “......”

    최악인데?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라누벨 환자를 과대평가한 것 같다.

    상상 그 이상!

    그날을 회상한 천마가 툭 던지듯 말했다.

    “자기를 제자로 안 받아줄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정말 가소롭지 않으냐?”

    “...감사합니다.”

    “음?”

    “할아버지 덕분에 살았어요.”

    “도움이 됐다면 됐다.”

    씰룩.

    천마는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듯 바둑판에 다시 집중했다.

    ‘후회하게 해준다고?’

    천마는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그 천지음양지체 애송이의 정신연령을 몰라서 그렇다.

    마오짜이의 목적.

    무협 소설에서 강해지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게 없긴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천마.’

    하지만 세계관 최강자에게 도전해서 패배하면 어떻게 될까?

    천마는 도전자를 용서할 만큼 자비롭지 않다.

    “할아버지.”

    “...귀찮게 또 뭐냐?”

    “건강하십시오. 외손자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기 싫으면 내공을 쌓아라.”

    “네.”

    지금까지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 사천제일 무술대회에서 간단히 우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천마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앞으로는 네 것이다.”

    휙~

    천마가 던진 책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내 품으로 날아왔다.

    “이건...?”

    책에는 붉은 실로 짠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예전에는 없었는데?’

    천마가 말했다.

    “펼쳐봐라.”

    “...아!”

    책갈피에는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귀가 쓰여 있었다.

    「혈운(血雲)이 드리우니 자하(紫蝦)가 우는구나.」

    “이건...?”

    “봉인이다.”

    “무슨 봉인이요?”

    “책과 책갈피가 원래 한 몸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소용없다.”

    “아!”

    봉인의 방식을 이해했다.

    하지만 대체 왜?

    “위험하기 때문이다. 힘의 대가로 감정을 잃는다.”

    “감정...”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아내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딸아이를 버릴 수도 있다. 과거에 어떤 남자가 그랬다.”

    “...할아버지.”

    “뭐냐?”

    “또 오겠습니다.”

    “오늘처럼 또 엎드릴 생각이면 오지 마라.”

    “네.”

    잃을 게 없는 남자에게 복수하려는 마오짜이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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