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93화 (94/232)
  • 093화

    [5장-6절] 달라도 너무 달라

    칼로 단단한 방패도 가르는 무림인들의 대결.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팔다리가 절단되는 사고가 매우 빈번하게 벌어져야 정상이다.

    주인공, 주인공의 동료, 주인공의 연인, 주인공의 친구...

    이들은 패배해도 옷이 찢어지거나 피를 토하는 게 전부다. 며칠 지나면 말끔히 나아서 주인공의 모험이나 일정에 합류.

    하지만 이건 상업성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 만화, 영화이기 때문이다.

    ‘곤란하지.’

    예를 들어,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미녀의 다리가 전투 중에 잘린다면?

    현실성 있는 전개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단 한 번의 실수나 패배로 휠체어 신세가 된다면 주인공의 정신이 혼미해지리라.

    소설에 감정이입 중인 독자들도 포함해서!

    ‘나도...’

    만약, 송선영이 교통사고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나도 미쳐버릴 것이다.

    즉,

    “죽여버리겠어...!”

    “감히 내 여자를 때려?!”

    “아미신검의 복수를!”

    이게 정상적인 남자의 태도.

    검이랑 결혼한 유부녀 아미신검을 사모하는 사내들이 병장기를 들고 나를 습격했다.

    ‘남자라면 이래야지.’

    남해수처럼 몰래 쪽지를 보내서 음해하거나 깡패와 저격수를 고용하는 치졸한 짓은 남자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이 사내들이 나는 싫지 않았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돌격해오는 패기와 만용!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남자들을,

    퍽-!

    푸욱!

    다시는 사랑을 못 하는 몸으로 만들어주기로 했다.

    “......”

    “......”

    앞서 돌격한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한 사내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글보글...”

    “부르르...”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입에 게거품을 문 남자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복수해야죠?”

    “...하하! 실례했습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존경합니다! 대협!”

    사랑이 식은 남자들이 썰물처럼 빠지며 군중 사이로 사라졌다.

    ‘역시 없네.’

    아미신검은 마오짜이의 취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강 공자님~”

    “네.”

    자기 속옷을 담보로 내 식비를 책임지고 있는 미봉.

    그녀는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온종일 내 곁에 붙어 다니고 있었다.

    물론, 내가 그녀에게 공짜로 얻어먹기만 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꾸엑-?!”

    퍽!

    혼란스러운 인파에 숨어서 미봉을 납치할 기회를 노리는 양아치들.

    추적하면 다른 놈이 그녀에게 접근하리란 걸 알기에 한꺼번에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든든하네요~”

    내가 던진 돌멩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양아치를 보며, 미봉이 환하게 웃었다.

    “자주 겪나요?”

    소설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미봉을 지켜줬는데, 이렇게 귀찮을 줄은 몰랐다.

    포기를 모르는 걸까?

    불나방처럼 사천성에 사는 모든 양아치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네. 그래서 평소에는 도룡과 권룡이 지켜줬어요.”

    “멋진 분들이네요.”

    의식주로 모자라서 호위까지!

    같은 남자로서 연민이 느껴지려고 한다.

    ‘미봉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

    가문 좋고 예쁘고...

    미봉 주위의 일반 여성들을 보고는 바로 수긍했다.

    현대의 여성들은 잘 꾸미고 관리하기에 예쁘거나 귀여운 여성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

    아니, 높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세계의 평균 여성 외모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생활이 힘들어서? 무공을 안 익혀서? 영양이 불균형해서?’

    미봉만이 아니다. 아미신검, 검봉도 일반 여성들이랑 차별된 다른 생명체 같았다.

    돌이켜 보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도 귀족 여성은 특별했던 것 같다.

    “꾸아악?!”

    퍽-!

    미봉의 엉덩이를 훔쳐보며 쫓아오는 양아치 한 마리를 돌멩이로 처단한 후,

    “얼른 시합장으로 가죠.”

    “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에서 5번째로 아름다운 미녀랑 싸우러 가자.

    * * *

    무협(武俠).

    강력한 무공으로 세상의 정의를 우뚝 세우는 이야기.

    하지만 온종일 쌈질만 하면 반복된 전개에 금방 질려버려서 상업성이 떨어지리라.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작가도 자본주의의 노예라서 상업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 연애! 질투!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개가 매번 똑같아도 수요가 줄지 않는 소재.

    단, 조건이 있다.

    “소문처럼 미인이네요.”

    주인공의 외모가 예쁘거나 멋지지 않으면 인기가 없다.

    그 현상은 시각적인 즐거움도 중요한 만화와 영화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편인데...

    아무튼,

    “강 공자님. 저보다요?”

    “...아뇨. 미봉 소저를 넘기에는 설정상 무리죠.”

    “설정상?”

    “그런 게 있어요.”

    소설 원작에서 작가(주인공)가 주관적인 취향을 토대로 여성들의 외모에 순위를 매겼다.

    1위.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2위. 미봉(美鳳)

    3위. 벽안공주(碧眼公主)

    4위. 아미선녀(峨嵋仙女)

    ...이하생략!

    아무리 주관적이라고 해도, 세계관의 창조자가 정한 ‘규칙’이기 때문에 뒤집을 수 없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 잘난 미남들이 주인공에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갈구했듯이.

    법칙이다.

    ‘나도 제법 무당다워졌나?’

    송선영이 자살할 때만 하더라도 허둥대기 바빴던 강문수.

    지금은 꿈을 이해하고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다!

    “강 공자님! 도도한 척하는 아미선녀의 얼굴을 노려요!”

    “하, 하...”

    사심 가득한 미봉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장으로 나섰다.

    본선 2번째 경기.

    사천제일 무술대회에 참가한 여성 무림인의 마지막 생존자가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아미선녀는 검이랑 결혼한 아미신검의 사저(師姐).

    친언니 같은 동창생이랄까!

    아미선녀가 아미신검의 복수를 갈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오짜이 씨. 보고 있습니까?’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에서 4번째로 아름다운 미녀가 흉악한 사내에게 손찌검당하기 직전인 위험한 상황.

    협객을 동경하는 마오짜이의 오지랖을 자극하기 좋았다.

    “강문수입니다.”

    “......”

    아미선녀는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적의만 드러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또 크라우칭 발주법을 취했고...

    팅~!

    경기진행자가 엽전을 던졌다.

    ‘허! 요것 봐라?’

    파앗-

    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아미선녀는 엽전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움직였다.

    엄연한 반칙!

    “......”

    하지만 심판도 겸하는 경기진행자는 못 본 척했다.

    한통속이란 걸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야압-!”

    그녀가 아직 엎드려 있는 내 머리를 쪼갤 기세로 칼을 수직으로 내리그으며 기합을 질렀다.

    톡.

    중력을 받은 엽전이 땅에 떨어진 것도 그때였다.

    ‘이건 못 참지.’

    예정대로 대지를 박차며 출발!

    순식간에 아미선녀의 품에 파고든 나는 박치기했다.

    빠각-!

    “......”

    “......”

    내 뇌세포는 소중하기에 힘을 조절했다. 그래서 아미선녀를 죽이진 못했지만, 신체의 균형을 무너트리기에는 충분.

    덤으로 코뼈까지!

    반격할 기회는 주지 않는다.

    ‘항복하기 전에...’

    빠각!

    태권도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면서도 강력한 돌려차기!

    내공을 쓰는 민간인은 매우 강하지만, 내공을 쓰는 운동선수는 압도적으로 강하다.

    “...제법이네.”

    “......”

    한 방에 죽일 의도였는데, 왼팔을 희생해서 타점을 분산시키고 내공으로 장기를 감싸서 보호했다.

    그래서 결정타는?

    “멈춰라.”

    “아미파를 적으로 돌릴 셈이냐?”

    “이미 승패가 났느니라.”

    경기장으로 뛰어든 아주머니, 할머니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아미파(峨嵋派).

    무협 소설에서 소림사(少林寺)가 남자들을 위한 불교 학원이라면, 아미파는 여자만 다니는 학원.

    그 이상은 알 필요 없다.

    “...그러죠.”

    나도 목적을 달성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힐끔.

    나와 아미선녀 사이를 가르듯 떨어진 손가락 크기의 날붙이가 땅에 박혀 있었다.

    ‘비도(飛刀).’

    저게 방해하지 않았다면 아미파의 아주머니, 할머니가 뛰쳐나오기 전에 아미선녀가 죽었으리라.

    비도가 날아온 방향에는...

    “......”

    관람석에서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청년이 있었다.

    “빙고.”

    마오짜이를 찾은 것 같다.

    * * *

    자고로 낭만을 아는 무림의 협객이라면, 아름다운 여인을 무조건 옹호해야 한다.

    그 반대 행동을 하면?

    조만간 낭만을 아는 주인공에게 패배한다는 사망 복선!

    법칙 같은 거다.

    “권왕 어르신.”

    “말 걸지 마라.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괜히 추천해서...”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졸졸 쫓아오는 권왕이 어이없었다.

    “제가 뭘 어쨌다는데요?”

    “아미파의 기대주들을 밟아버리면 어떡하느냐?”

    “그러면 제가 져줍니까?”

    “누가 져주래? 아미파의 무공을 펼칠 기회를 준 후에 훌륭하다고 칭찬 한두 마디 해주고-”

    “죽여요?”

    “죽이지 마! 다른 무인들의 대결을 참고하란 말이다.”

    “흠...”

    보긴 했다. 현대의 중학생 2학년들이 빙의한 줄 알았다.

    ‘소년 만화처럼 기술명을 외치며 한 방씩 주고받으라고?’

    내가 그 짓을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강 공자. 자네처럼 싸우면 사망자가 속출할 걸세.”

    “무술대회에서 어떻게 싸우라는 규칙은 없잖아요?”

    “무인의 예의지.”

    “아하!”

    발렌타인에게 배운 고리타분한 기사도(騎士道)랑 비슷하지만, 한층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잘 듣게. 내공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서 상대의 내공을 먼저 고갈시키는 거야.”

    “......”

    “무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뛰어난 신공절학에 목숨을 거는 이유지. 똑같은 재능과 시간으로 수련해도 결과가 다르... 강 공자?”

    “......”

    “노부의 말을 듣고 있는가?”

    “안 듣고 있어요.”

    “끙... 하여간 다음부터는 무공을 펼칠 시간을 줘라. 그것이 상대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고 약자를 배려하는 의(義)다.”

    “아, 네.”

    하나는 알겠다.

    무림인들이 무술대회에 겁도 없이 참가하는 이유.

    내공이 고갈될 때까지 싸우고 항복하면 되기에 목숨을 잃거나 팔다리가 잘릴 위험성이 낮다.

    ‘마치... 가상현실게임 같네.’

    나는 가상현실게임을 해본 적이 없지만, 편의점 사장님의 설명을 자주 들어서 알고 있다.

    생명력, 마력, 기력...

    붉은색이나 푸른색 막대 중 하나라도 완전히 줄어들면 죽는다. 가상현실게임 아바타가.

    실제로 죽는 건 아니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다.

    “강 공자님~”

    “네.”

    “누구를 찾으세요?”

    마오짜이가 앉았던 빈 관람석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미봉.

    그녀의 생각을 읽은 나는 툭 던지듯 대답했다.

    “여자는 아닙니다.”

    “소녀가 찾는 걸 도와드릴까요?”

    여우 같았던 눈매가 자애로 가득해진 미봉이 제안했다.

    “흠. 검은색 용을 수놓은 회색 무복을 입은 청년입니다. 나이는 20대 중반. 소저들이 한눈에 반할 미장부처럼 생겼습니다.”

    “그건... 딱 마룡인데요?”

    미봉은 내 묘사를 듣자마자 인물을 특정했다.

    마룡(魔龍).

    천마의 제자.

    주인공.

    내가 꿈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오짜이가 빙의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았던 인물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룡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저기에 있어요.”

    “음?”

    미봉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눈으로 좇았다.

    ‘아... 정말이네.’

    나에게 비수를 던지고 달아난 마오짜이가 조금 멀리 떨어진 관람석에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휙!

    그는 우리랑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뭐지?”

    “모르셨어요? 마룡은 여인이랑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

    말도 안 된다.

    유부녀를 제외한 무림의 모든 미녀를 아내로 삼는 주인공이 내성적인 숙맥이라고?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건 다시 말해,

    ‘확실하군!’

    주인공의 알맹이가 다른 인간이란 명백한 증거였다.

    “권왕 어르신. 미봉 소저를 부탁합니다. 같이 가면 마룡이 또 도망갈 것 같으니까요.”

    “그러마.”

    속옷을 담보로 내 의식주를 책임지는 미봉의 안전 확보.

    중요한 사안이다.

    “강 공자님. 조심하세요. 마룡은 여자에게만 약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여자에게만 약하거든요.”

    “예?”

    “다녀올게요.”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픽- 탁.

    바로 날아든 비수!

    허공에서 낚아채지 못했으면 내 머리가 꿰뚫렸으리라.

    ‘정말이네.’

    나는 남자에게 가차 없는 마오짜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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