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91화 (92/232)
  • 091화

    “사부님~!”

    “음?”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권왕을 구석에 처받아두고,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권룡, 도룡, 검봉.

    숙박업소와 무술대회 관람석을 예약한 후에 관청 앞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구룡오봉의 3인.

    참고로, 독룡은 사천제일 무술대회에 참가하는 형님, 독왕을 보좌하기 위해 따로 행동 중이다.

    “일찍 오셨네요.”

    무슨 일이지?

    도룡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빠르게 설명했다.

    “이곳에 권왕을 쓰러트리고 미봉을 납치한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왔소!”

    “아하!”

    “보아하니... 모두 무사한 듯하여 다행이오.”

    권룡은 식당 구석에 처박아둔 권왕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주먹 하나로 녹림을 평정한 스승님의 손목이 부러지다니...”

    “방심한 모양이에요.”

    “턱과 이빨도 부러지셨소. 이래서는 스승님이 좋아하는 고기를 씹을 수나 있을지...”

    “이 기회에 채식주의자가 되보는 것도 좋겠네요.”

    나는 이까짓 일로 허둥대는 권룡을 위로해줬다.

    탁!

    “강 공자님. 권왕 대협과 미봉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친구를 잃는 줄 알았어요.”

    검봉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라?’

    아까부터 대화가 살짝 엇갈린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정말인 모양이다.

    “강 소협. 스승님을 구해준 은혜를 꼭 갚겠소.”

    “...괜찮아요.”

    “강 공자. 주먹 하나로 녹림을 평정한 권왕 어르신을 쓰러트린 자의 얼굴을 보았소?”

    “...못 봤어요. 그렇죠?”

    나는 동의를 구하듯 웃는 얼굴로 미봉을 돌아봤다.

    “예?”

    “권왕 어르신의 얼굴을 떡으로 만든 자를 못 봤죠?”

    “어...”

    “아무래도 당분간 미봉 소저랑 동행해야 할 것 같군요.”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감시가 필요해 보였다.

    “가, 같이요?!”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좋아요...”

    “다행이네요. 거절하실 줄 알고 조마조마했거든요.”

    그녀가 싫다고 하면 납치라는 다소 과격한 수단을 써야 하니까. 알아서 따라온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남은 건?

    “권왕 대협! 괜찮으세요?”

    “스승님! 스승님~!”

    “권왕 어르신! 어르신~!”

    “......”

    젊은이가 힘들게 번 돈을 훔치려고 한 파렴치한 어른의 입만 확실하게 막으면 된다.

    ‘협상은 내 전문이지.’

    꿈에 사로잡힌 라누벨 환자들이랑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 *

    “주먹 하나로 녹림을 평정한 권왕 어르신. 애송이의 돈을 훔치려다가 처맞았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원치 않으시죠?”

    눈을 뜬 권왕이랑 조용히 대화할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은 그가 구룡오봉을 여관의 객실 밖으로 내보낸 덕분.

    권왕이 퉁퉁 부은 턱을 움직이며 천천히 답했다.

    “우쭐대지 마라. 노부는 손녀처럼 아끼는 미봉에게 눈독 들이는 사내를 시험하기 위해...”

    “원치 않으시죠?”

    “...노부가 손녀처럼 아끼는 미봉을 생각해서 봐주려고 했는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켁켁?!”

    덥석!

    내 손아귀에 목이 붙잡힌 권왕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하늘의 높이는 초등학교- 10년 전에 배워서 잘 압니다.”

    “컥컥?!”

    가본 적도 없는 하늘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무림인들의 한계.

    수준이 너무 차이나서 유치원생이랑 대화하는 기분이다.

    “어떻게 하실래요?”

    “아, 알겠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스윽.

    손아귀의 힘을 풀자마자 권왕은 털썩 주저앉았다.

    “콜록콜록!”

    “지금부터 말을 맞출 거예요. 권왕 어르신은 손녀처럼 아끼는 미봉에게 눈독 들이고 접근했다가 자객에게 기습당한 겁니다.”

    “자, 잠깐! 노부를 사회적으로 매장할 셈이냐?!”

    “흠. 그러면 권왕 어르신은 손녀처럼 아끼는 미봉에게 다가가다가 자객에게 기습당한 걸로 하죠.”

    양보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자꾸나. 노부가 손녀처럼 아끼는 미봉 대신에 자객에게 당한 것으로.”

    “욕심이 지나치시네요. 그건 제 역할입니다.”

    “안 다쳤으면서...”

    “미봉이 믿을 것 같아요?”

    그녀는 내가 권왕의 팔을 부러트리고 턱주가리와 안면을 걷어차는 광경을 보았다.

    나의 완벽한 논리에 권왕은 무척 억울하다는 듯이,

    “정말로 시험만 할 생각이었다. 노부가 거지도 아니고, 젊은이의 돈을 훔쳐서 뭐하겠는가?”

    “악의가 느껴졌는데요.”

    “그건 말이다. 내 제자, 권룡이 눈독 들이는 미봉을 가로챈 공자가 괘씸해서... 어흠!”

    “악의가 맞네요.”

    “크흐으음!”

    스스로 돌아봐도 유치했다는 건 아는 걸까, 권왕은 내 시선을 피하며 딴청부리기 바빴다.

    ‘권왕이라...’

    권왕(拳王).

    주먹 하나로 산적 소굴의 연합인 녹림을 평정한 남자.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보여준 어른스러운 모습이 온데간데없는 유감스러운 상태지만, 그의 명성만은 여전하다.

    ‘쓸모가 있을지도?’

    마오짜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권력자랑 손을 잡아둬서 나쁠 건 없다.

    “좋습니다.”

    “뭐?”

    “미봉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권왕 어르신에게 최대한 맞춰드리도록 하죠.”

    “오오! 강 공자!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네!”

    “네.”

    잊으면 바로 사형이다.

    “...아! 그렇지. 공자는 돈에 상당히 집착하는 것 같던데, 무술대회에 나가보는 게 어떤가?”

    “늦어서 포기했어요.”

    주인공처럼 참가하고 싶었지만, 사천제일 무술대회 참가 접수는 이틀 전에 마감됐다. 사천성 소속의 무림인도 아니고.

    권왕이 계속 물었다.

    “사문(師門)이 어디인가?”

    “없습니다.”

    “그래도 스승은 있겠지? 자네 같은 실력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

    “......”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만?

    “밝힐 수 없다면 무공의 이름이라도 상관없네.”

    “대단한 비밀은 아닙니다.”

    이미 구룡오봉에도 말했기에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되리라.

    “저는 천마의 외손자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없죠.”

    “......”

    “잘 부탁합니다.”

    나는 손버릇 나쁜 어른을 놀리는 나쁜 무당이다.

    * * *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는 215권이나 되지만, 주인공은 무술대회에 총 3번 참가했다.

    구룡오봉 무술대회.

    황궁 무술대회.

    천하제일 무술대회.

    그리고 주인공의 뻔한 승리와 우승을 원치 않았던 작가는 예선전부터 강자들을 투입했다. 재미를 위해 개연성을 과감히 버린 건데...

    ‘버린 게 아니었다고?’

    권왕 덕분에 사천제일 무술대회 참가 자격을 얻은 나는 대진표를 보자마자 헛웃음을 들이켰다.

    독왕, 낭왕, 권마, 아미신검, 아미선녀, 검귀, 청성일검. 점창마도, 사천제일검, 색걸, 암흑대제...

    진짜 실력을 감췄거나 소설이 완결될 때까지 살아남는 강자들의 이름이 제법 보였다.

    “강 공자님! 응원할게요!”

    “노부를 구한 공자를 믿네!”

    미봉은 이해하겠는데, 권왕이 계속 따라오는 이유는 뭘까?

    그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권왕 어르신. 저에게 거셨습니까?”

    “허허! 아무도 공자에게 안 걸기에 조금 보탰지.”

    “돈은 많으시다면서요.”

    “흉작으로 고통받는 양민들에게 자선사업 한다는 마음으로 팔의 치료비까지 탈탈 털었네.”

    “아, 네.”

    위선자의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소녀도 강 공자님의 우승에 돈을 걸었어요.”

    “미봉 소저도? 돈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당포에서 빌렸어요.”

    전당포.

    귀중품이나 채권 등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곳.

    “뭘 맡겼는데요?”

    “입고 있던 속옷이요.”

    “......”

    속옷을 담보로 받은 전당포 주인이 제정신인지 묻고 싶다.

    다른 녀석들은?

    “나는 작년 우승자인 사천제일검에게 걸었소.”

    도룡은 배당금이 가장 낮은 자를 선택했다.

    “올해는 긴 수련을 마친 아미선녀가 이길 거예요!”

    검봉은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만만했다.

    “스승님의 영원한 호적수인 권마에게 걸었소. 악인의 우승을 기대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제자야.”

    “네. 스승님!”

    “정말 고맙구나.”

    “예?”

    배당금을 올려준 권룡에게 흐뭇한 미소를 보내는 권왕.

    참된 스승의 모습이었다.

    ‘마오짜이도 무술대회를 관전하러 왔겠지?’

    그가 주인공의 몸에 빙의했다면 사천성 출신이 아니라서 참가하진 못했으리라.

    나는?

    사문이 없고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천성 무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나는 앞으로 다른 지역의 무술대회에 나가지 못한다. 30세 미만이면 누구나 가능한 구룡오봉 무술대회, 나이 제한이 없는 천하제일 무술대회만 빼고.

    아무튼,

    “열심히 해야지.”

    다른 인간의 몸으로 관전하는 마오짜이의 눈에 띄기 위해.

    * * *

    무술대회의 대진표는 무작위로 결정되지 않는다.

    작년 우승자, 유력한 우승 후보, 대회를 후원하는 세력, 유명인, 유명인의 제자, 황실의 인물...

    검증된 실력자들이 예선전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배치해서 부상이란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문수입니다.”

    “사천제일검이다.”

    작년 우승자랑 예선전 3경기에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네.’

    내가 권왕의 추천을 받았다는 사실을 무술대회 주최자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나는 사천제일검이 본선 진출 전에 밟고 지나가는 수많은 재물 중 하나로 선택됐다.

    “나를 모르는가?”

    “압니다.”

    얼굴에 사선으로 그어진 흉터는 그가 사천제일 무술대회에 처음 참가했을 때 얻은 상처.

    그날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현재는 사천제일검의 외모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특징이 되었다.

    “아는데도 기권하지 않고 나에게 도전하겠다는 건가?”

    “네.”

    스르릉-

    주먹 하나로 녹림을 평정한 권왕이 전리품으로 챙긴 반월도. 좋아보여서 잠시 빌렸다.

    녹림십팔도(綠林十八刀).

    반월처럼 생긴 칼날에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그건...?”

    “빌렸어요.”

    “흠. 무기만 좋다고 잘 싸우는 건 아니지.”

    그는 상처 하나 없는 내 피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아냥거렸다.

    “당신보다는 험한 꼴을 훨씬 많이 당했다고 장담하죠.”

    마취도 없이 팔다리를 뜯기는 경험은 돈 주고도 못 한다.

    “어이가 없군.”

    “보시면 압니다.”

    우웅-

    뼈다귀 사부님께 배운 내공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한 수 가르쳐주지.”

    슥-

    말로는 잘난 척하지만, 근처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는 미봉과 권왕을 신경 쓰는 사천제일검.

    저 둘 때문에 방심을 유도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작년 우승자의 실력을 볼까?’

    팟!

    녹림십팔도로 공기를 가르면서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흡!”

    사천제일검의 칼에 내공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불길이 치솟았다.

    “예선전에서 검풍이라니!”

    “우승자가 검풍을?!”

    “정말 훌륭한 검풍이군!”

    무공을 조금 아는 구경꾼들이 환호와 감탄을 내질렀다.

    검풍(劍風).

    무협 소설마다 명칭과 설정이 다르지만, <이 천마 실화냐?>에서는 바람으로 통칭한다.

    권풍(拳風), 지풍(指風), 음풍(音風), 봉풍(棒風), 장풍(掌風)...

    천마가 세계관 최강자인 이유도 천재지변 규모의 장풍을 연달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천제일검의 검풍을 보며,

    ‘심각하네.’

    내공으로 밀어붙인다는 단순한 검술에 표정을 굳혔다.

    휙~

    그의 검풍이 나를 덮치는 속도보다 빠르게 파고들었다.

    “헙?!”

    경악하는 사천제일검.

    검풍에 내공을 소진한 그의 움직임은 거북이처럼 느렸고, 나는 바람보다 빨랐다.

    촤악-!

    피가 튀었다.

    ‘기관총을 든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 같네.’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에 뿌리를 둔 무협 세계관의 모든 무술은 ‘내공’을 바탕으로 한다.

    내공으로 시작해서 내공으로 끝난다고 할까!

    즉,

    “쉽네요.”

    내공에 의존하는 무협 세계의 무술은 겉멋만 든 결함품.

    실용성이 없었다.

    “이, 이럴 수가...?”

    털썩.

    사천제일검이 갈라진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이걸로 시합 끝?

    아직 아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저는 천마의 외손자. 당신의 패배는 숨 쉬듯 당연한 겁니다.”

    “아?”

    “제 설명이 어려웠나요?”

    “아니, 하지만...!”

    “이해했으면 부지런히 소문을 내주세요. 상대를 잘못 만나서 예선전도 통과하지 못했다고.”

    “......”

    “이해했나요?”

    “...예선전에서 천마의 외손자를 만나다니. 운이 나빴다. 아니,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맞아요.”

    참 잘했어요! 사천제일검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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