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90화 (91/232)

090화

“으으...”

“아우으...”

나에게 맞고 기절한 구룡오봉이 하나둘 깨어났다.

팔이 부러진 권룡이 가장 불만이나 원한이 클 줄 알았는데...

“묶을게요. 많이 아플 거예요.”

“나는 준비 됐소.”

꾸욱.

미봉이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대고 응급조치를 해주는 내내 표정이 헤벌쭉 풀린 권룡.

틀림없이 아플 텐데,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돈이 없을 만하네.’

그녀가 지갑을 안 들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남자에게 돈을 안 쓰는 이유도.

미봉에게 치료받는 권룡을 불편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도룡은 정서불안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급기야,

“권룡. 팔이 부러진 게 무슨 자랑이라고 웃는가? 스승이신 권왕께서 통탄하실 거요.”

권룡의 스승인 권왕(拳王).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주먹질을 가장 잘하는 무림인에게 붙은 별호.

자신의 스승을 들먹이자 권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기에 의존하는 도룡다운 발언이구려. 뼈는 부러졌다가 붙으면 더욱 단단해지지.”

“자주 부러져서 뼈가 약해졌다는 말을 잘못한 게 아니오?”

“하늘 위의 하늘을 보지 못한 누구보다는 훨씬 낫소.”

“권룡. 그런 팔로 혼자서 뒷간이나 갈 수 있겠소?”

“멀쩡한 팔로 칼도 뽑지 못하는 도룡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오.”

고오오오-

같잖은 자존심만 남은 두 남자가 살벌한 눈싸움을 벌였다.

자주 있는 일인 걸까?

미봉은 슬그머니 둘 사이에서 빠져나왔고, 검봉과 독룡은 멀찍이서 구경만 했다.

“...빨리 가시죠.”

권룡의 부러진 팔을 응급치료하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강 공자님. 갑자기 말투가 공손해지셨네요?”

이마에 혹이 생긴 검봉이 놀리듯 말했다.

“그래서 불만인가요?”

“불만은 아니고요. 남자는 젊고 예쁜 여자만 보면 다 똑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미봉을 힐끔 보는 검봉.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나는 피식 웃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잘 보여서 뭐합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예의일 뿐. 약자와 남자를 깔보는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무림인을 깔보는 천마의 외손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천마(天魔).

주인공의 스승.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 최강자이며, 그 힘은 재앙, 자연재해나 다름없다.

‘마오짜이가 천마의 육체에 빙의한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당신은 인격적으로 대우해줘서 불만인 모양이네요. 일상생활이 가능하세요?”

“그래서 검봉의 주위에 남자가 없소.”

암살자처럼 조용히 다가온 독룡이 거들었다.

“누가 없다는 거예요!”

“사실이 그렇잖소? 5년을 함께한 내가 보장하리다.”

“윽!”

독룡의 지적에 반박하지 못한 검봉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유쾌하네.’

소설 원작에서도 구룡오봉은 혈기가 넘쳤지만, 직접 만나보니 청춘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만약, 송선영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상당히 부러웠을지도?

지금의 나는 평온하다.

“강 공자님. 그 표정은 뭔가요?”

“제 표정에 무슨 문제라도?”

“약자를 깔본다기보다는... 외로운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 작년에 결혼한 오라버니랑 비슷해요.”

“그렇군요. 기분 탓이 아닙니다.”

“배려를 모르시네요!”

“굳이?”

내가 송선영 외의 여자애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다. 눈을 뜨면 사라질 꿈이라면 더욱.

그때,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오던 미봉이 말했다.

“저희는 사천제일 무술대회를 구경하러 가는 중이에요.”

“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소설로 간접경험을 해본 나는 자연스럽게 아는 척했다.

사천제일 무술대회.

중원 ‘사천성’ 일대의 문파와 세가에 소속된 무인들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다.

사천당가(四川唐家).

아미파(峨嵋派).

점창파(點蒼派).

청성파(靑城派).

이들이 사천성을 대표하는 강자들이며, 분파나 분가의 무인들은 예선전만 통과해도 선전한 것이다.

즉, 그들만의 리그랄까!

“그러면 사천당가 소속인 독룡도 참가하겠군요?”

내 시선을 받은 독룡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독왕으로 불리는 형님을 응원하러 가는 중입니다.”

“아하!”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독왕은 주인공이 침 발라둔 미봉을 사랑한 죄로 죽는다.

그런데 아직 살아있다는 건?

‘소설 전개가 바뀌었나? 아니면 주인공이 침 바르기 전이라서?’

마오짜이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

이건 연애의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겠지.

“미봉은 천마의 제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어머! 외할아버지의 제자가 신경 쓰이세요?”

“당연하죠.”

“네. 만난 적이 있어요. 거만한 태도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사내였어요. 저에게 최강의 아이를 낳는 영광을 준다고 헛소리했죠.”

“허...?”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는 없었던 주인공의 대사!

주인공에게 호색 기질이 있는 건 틀림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예의를 잃지 않는 신사였다.

‘이상한걸.’

얘기만 들어보면 마오짜이가 주인공의 육체에 빙의한 것 같지만, 사전에 조사한 그는 주인공 못지않은 훌륭한 신사.

마오짜이가 <이 천마 실화냐?>를 좋아한 이유도 주인공과 자신의 성격이 비슷해서 공감과 대리만족하기 쉬웠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건 대체...

“분해요!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여자를 가축 취급한 소마를 베어버렸을 텐데!”

남자를 혐오하는 검봉이 주인공의 생식기를 자르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에 탄식했다.

소마(小魔).

천마의 제자에게 붙은 별호.

하지만 이것도 조금 이상했다.

‘시기가 꼬였네.’

주인공이 ‘소마’라고 불리는 시기는 독왕을 포함한 여러 강자를 쓰러트린 사실이 공개된 후니까.

그전에는 실력을 감춘 신비주의 전략 때문에 ‘천마의 제자’란 사실조차 대부분 알지 못했다.

“검봉. 노파심에 말하지만, 그만두는 편이 좋소. 다음에는 옷만 베지 않겠다고 경고했으니.”

독룡이 흥분한 검봉을 말렸다.

“옷만?”

그런데 흘려넘길 수 없는 얘기를 듣고 말았다.

“그렇소. 소마에게 모욕을 당한 건 미봉인데...”

“그러면 옆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다는 건가요? 그건 모든 여자를 향한 모욕이었어요!”

도와주지 않는 독룡을 째려보며 비난하는 검봉.

하지만 독룡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으면 끝이오.”

“당신, 같은 남자라고 소마를 옹호하는 건가요?”

“이거야말로 모욕이군.”

“그래도 당신은 가만히 있을 거잖아요?”

“......”

검봉이랑 더 대화하기 싫었던 독룡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주인공처럼 여자의 옷만 벨 수 있을까?’

주인공의 무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검봉의 성격상, 모욕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

그런데 상처 하나 없이 옷만 베어냈다고?

내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차원적인 기예였다.

“천마의 제자는 굉장히 강한 모양이군요.”

“네. 하지만 저희를 가볍게 제압한 강 공자도 보통은 아니에요.”

“흠...”

초승달처럼 휜 야릇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칭찬하는 미봉.

그 탓에 권룡과 도룡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아...”

“후우...”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고 싶은 한숨 소리마저 들렸다.

‘같이 힘내자고.’

나도 이웃국의 왕자 ‘레온’을 압도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

* * *

주인공의 달라진 성격.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주인공이었던 김은정처럼, 마오짜이도 <이 천마 실화냐?>의 주인공에게 빙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우연이 아니야.’

나의 시작 장소는 사천제일 무술대회가 열리는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로 한복판.

그리고 무술대회는 참가자 외에도 견문과 인연을 넓힐 목적으로 찾아오는 강자가 많은 편이었다.

‘정황상 딱 맞아.’

무공에 열정적인 마오짜이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아무튼,

“드디어 사람다운 식사를 할 수 있겠군.”

관청에서 미봉의 도움으로 포상금을 받은 후, 대장간에 마적들의 반월도를 팔았다. 그 외에 잡동사니도 만물상 같은 곳을 찾아가서 빠르게 처분.

짤랑!

돈주머니를 흔들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 공자님. 옷부터 새로 맞추시는 게 어떠세요?”

“흠... 그러죠.”

이 도시를 잘 아는 미봉의 도움으로 편하게 포상금을 받고 물건도 처분할 수 있었다.

당장 노점상이 몰려 있는 시장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녀의 조언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도 따르기로 했다.

“여기에요!”

“...딱 봐도 비쌀 것 같은데요.”

미봉이 안내한 의류점에는 비단옷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제가 사줄게요.”

“돈이 없다면서요?”

거짓말?

“돈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홍보해주는 조건으로 구할 수 있어요.”

“아하!”

연예인과 모델들이 협찬받는 원리랑 비슷한 것 같다.

“거절하면요?”

“그때는 사천성의 단골 의류점을 바꾸면 그만이에요. 점주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과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녀처럼 행동하던 미봉.

하지만 그녀의 본모습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모용 소저! 어서 와요!”

의류점 앞에서 인사하는 미봉이랑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가 호들갑스럽게 뛰쳐나오며 환대해줬다.

“공자님께 어울리는 옷을 구하고 싶어서요.”

“혹시, 옆의 공자님께 옷을 선물하시는 건가요?”

“네.”

“...딱 좋은 물건이 있어요. 한 쌍으로 제작된 옷이에요.”

“한 쌍이요?”

“호호! 모용 소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선물이에요. 혼수도 여기서 해주면 고맙고요.”

“노, 놀리지 마세요.”

“어때요?”

“...네.”

“호호! 잠시만 기다려요.”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는데, 선물이란 명목으로 비싼 비단옷을 구할 것 같았다.

‘또 공짜...’

공짜를 좋아하면 안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하지만 지금처럼 거지로 오해받으면 더욱 큰 시비에 휘말릴 터. 이번만 넘어가기로 했다.

펄럭~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에 묻은 흙먼지를 닦은 후, 점주가 추천한 흰색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

‘꽃무늬... 모란(牡丹)인가?’

공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으리라.

“어머!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강 공자님. 어때요?”

팔랑팔랑~

옷을 자랑하듯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도는 미봉.

모란이 활짝 핀 새하얀 비단옷과 옥으로 된 비녀가 그녀의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해줬다.

“...잘 어울리네요.”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찾아온 보람이 있네요.”

“전부 얼마인가요?”

“괜찮아요. 그래도 신경 쓰이시면 사천성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쭉 입어주세요.”

“흠... 네.”

우리는 정말로 돈을 안 내고 의류점을 나섰다.

“같이 또 와요.”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주머니도 금전적인 손해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

정말로 협찬인 걸까?

깨끗한 옷을 공짜로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선 생소한 경험이었다.

‘모델은 좋겠다...’

나는 성공해도 수영복이나 운동복 협찬밖에 못 받으니까. 정말 불공평한 세상이다.

“이젠 시장으로 가도 됩니까?”

“네. 이 근처에 실력 좋은 주방장이 운영하는 식당을 알지만, 강 공자님은 시끌벅적한 노점상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싸서 선호할 뿐이죠.”

“어머! 죄송해요. 소녀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괜찮습- 이 새끼가!”

빡!

나의 소중한 돈주머니를 훔치려는 아저씨의 손을 힘껏 걷어찼다.

“어흑?!”

“뒤질려고 환장했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기 시작한 뒤부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부류가 좀도둑.

알사탕처럼 작은 물건은 수량이 안 맞을 때까지 눈치채기 힘들어서 사장님께 자주 혼났었다.

“자, 잠깐!”

“닥쳐!”

손목이 부러진 아저씨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하고,

빠각!

시원한 뒤돌려차기로 턱주가리를 후려쳐서 허공에 띄운 후, 발꿈치로 안면을 내리찍었다.

“......”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아저씨는 실신해서 미동조차 없었다.

“저기... 강 공자님?”

“괜찮아요. 죽이진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 도둑, 아는 분이에요.”

“음?”

“주먹 하나로 녹림(綠林)을 평정한 권왕(拳王) 어르신이세요. 조부님이랑 의형제라서 어릴 적부터 자주 뵈었어요.”

“...실망이 크겠네요. 권왕이나 되는 분이 도둑질이라니.”

“예? 아, 네. 그렇죠?”

“이만 가죠.”

“이렇게 길거리에 버려두면 안 되는 분이란 얘기였어요...”

“흠. 이해했습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정말로요?”

“네.”

나는 권왕의 팔을 잡고 질질 끌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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