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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89화 (90/232)
  • 089화

    [5장-5절] 오해는 없다

    마적들이랑 싸잡아서 나를 죽이려고 한 눈앞의 무림인은 ‘악인’이 아닐 것이다.

    눈에 띄는 백색 복장.

    가식 없는 말투와 표정.

    정의감 가득한 눈동자.

    첫인상에서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외견을 무시하고 넘어가더라도,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고?’

    내 목숨을 노린 인간을 용서할 만큼 나는 마음이 넓지 않다.

    챙-!

    “읏?!”

    손에 쥔 도검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여자가 반격을 포기하고 뒤로 쭉 물러섰다.

    과감한 결단.

    “쯧.”

    반격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반월도가 허공을 갈랐고, 기습에 실패한 나는 혀를 찼다.

    ‘제법이네.’

    검술을 제대로 익혔다는 방증.

    하지만 내공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내가 우위에 있음을 단 한 번의 공방으로 확신했다.

    우웅-

    마적의 조잡한 반월도에 내공을 욱여넣었다.

    “마적이 어떻게 그만한 힘을... 아니, 잠깐만요! 당신은 마적이 아닌 건가요?”

    “그래서?”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수를 용서해주세요. 소녀는 남궁세가의...”

    “검을 들어. 이미 늦었으니까.”

    “안 늦었어요! 아직 아무도 다치지 않았-”

    주르륵.

    반월도의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았음을 뒤늦게 눈치챈 여자의 가벼운 혀가 멈췄다.

    살짝 베이면서 흐르는 피.

    전혀 반응하지 못한 그녀를 아직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검을 들어.”

    “소녀를 죽이면 남궁세가에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죽인 줄 모를걸? 혼자라며?”

    “그, 그건...”

    “마지막 경고야. 무기를 들어.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줄게. 기사의 예우로서.”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내 호위기사였던 발렌타인.

    그녀에게 배운 ‘기사의 검술’을 사용한 이상, 나는 항복한 상대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이 기사.

    그리고 나를 사랑해준 기사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는 길이다.

    “죽이세요.”

    “죽여줄 테니 무기를 들어.”

    “당신에게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다가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얼른 죽이세요.”

    “농락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결투를 시작하자마자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갈라서 확실하게 죽여줄게.”

    “...진심인가요?”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기사?”

    “곧 죽을 여자는 몰라도 돼.”

    “......”

    살짝 거리를 벌린 나는 그녀가 무기를 들길 기다렸다.

    “...또 뭐가 문제야?”

    “정말로 몰라서 묻나요? 무기를 들면 죽잖아요.”

    “명예롭게 죽여준다고 했잖아.”

    “죽는다는 건 변함없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사과했습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더 강해서 사과할 뿐이잖아.”

    나의 논리적인 반박에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할 말 없을걸?

    “당신은 힘없는 어린애가 덤벼도 죽일 건가요?”

    “네가 약하다고?”

    “네.”

    마적들을 일격에 썰어버린 여자가 힘이 없다고 주장했다.

    ‘어쩔 수 없지.’

    툭.

    그녀의 궤변에 질린 나는 반월도를 버렸다.

    “어? 용서해주는 건가요?”

    “아니. 무기를 안 든다고 해서 맨손으로 죽이려고. 이러면 공평하니 불만 없겠지?”

    “있어요! 안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당연히-”

    이 여자랑 무의미한 대화로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 같다.

    ‘평범한 낭인은 아니군.’

    저격수에게 당한 뒤부터 주위의 위협을 감지하는 색적(索敵) 능력.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내공을 습득한 뒤부터 눈에 띄게 강화됐다.

    “남궁 소저! 무사하시오?”

    “소저! 갑자기 혼자 달려가셔서 깜짝 놀랐소!”

    “소저. 저 사내를 아세요?”

    “남궁 소저! 괜찮소?”

    서로 다른 개성적인 복장의 남녀가 우르르 몰려왔다.

    청색, 검은색, 가죽, 꽃무늬...

    겉모습의 나이대도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했다.

    유일한 공통점은?

    비범한 외모!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읽고 요약본으로 복습까지 한 나는 이들이 누군지 눈치챘다.

    ‘주인공의 부하, 아내가 되는 구룡오봉이잖아?’

    구룡오봉(九龍五鳳).

    중원 무림의 다음 세대를 이끌 9명의 남성(용)과 5명의 여성(봉황)으로 구성된 친목 모임.

    하지만 이 14명은 소속된 가문과 문파의 대변인 역할도 하기에 정치질이 매우 심하고, 그런 이유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지금도 마찬가지.

    구룡오봉의 일부인 5명만 동행하고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저 소협이랑 오해가 풀리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이에요.”

    나를 가리키는 여자.

    그녀의 말에 구룡오봉의 절반이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경계할 필요 없어요.”

    “무슨 오해인지요?”

    “우리의 소개를 하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여자에게 주의를 받은 탓일까? 그들은 포권을 취하면서 평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기소개는 덤.

    도룡(刀龍), 독룡(毒龍), 권룡(拳龍), 미봉(美鳳), 검봉(劍鳳).

    듣다가 잠들 뻔했다!

    참고로, 마적들과 나를 싸잡아서 죽이려고 했던 난폭한 여자의 별호는 검봉.

    무림의 방식으로 직역하면, 혼기가 찬 여성 무림인 중에서 가장 검을 잘 다루는 신붓감이랄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저 여자가 검봉이라고? 너무 약하던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검봉은 상당히 강한 실력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림의 다음 시대를 책임지는 구룡오봉 중에서 무공 실력이 상위권에 들어가는 강자!

    내 앞에서 얼쩡대는 다섯 중에서는 가장 강했다.

    “정리해보면... 죄없는 사람을 다짜고짜 죽이려고 했던 저 여자가 검봉이고, 여러분은 그녀의 친구인 구룡오봉이라고요?”

    “그건 오해라니까요!”

    자신의 죄를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던 검봉이 발끈했다.

    “죽을래요?”

    “제 동료들이 온 뒤부터 말투가 공손해지셨네요?”

    “강자에게만 예의를 차리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의 말싸움을 들은 나머지 구룡오봉이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로 그랬소?”

    “남궁 소저. 정말이오?”

    “어찌 그런...”

    동료들에게 매도당한 검봉이 손사레치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오, 오해에요! 마적들이 아부하는 모습을 보고 두목으로 오해했을 뿐입니다! 마적 두목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다면야...”

    “소저를 믿소.”

    “오해라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걸까? 검봉의 치졸한 변명에 넘어간 그들이 내게 화살을 돌렸다.

    “마적들이랑 무슨 관계요?”

    “솔직하게 대답해주시오.”

    “아직 정체도 듣지 못했구려.”

    이 상황에서 불필요한 싸움이나 오해를 피하려면 협조적인 대화가 필수이리라.

    나도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읽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삐딱한 태도로 문제를 키우는 주인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가 되니,

    ‘이해가 되네.’

    내공은 사람을 거만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는 게 틀림없다. 폭력성과 호전성은 덤.

    그렇지 않다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리 없으니까.

    “덤벼. 한꺼번에. 나를 이기면 가르쳐주지.”

    * * *

    무협 세계관에만 존재하는 ‘내공’을 습득했을 때,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나는 이제 막 첫걸음을 뗐을 뿐이니까. 오랫동안 내공을 수련한 무림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상식적으로 맞고.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오만한 작자로군!”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겠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드리리다.”

    가소로웠다.

    특히,

    “하늘 위에 하늘이라... 하늘 위를 가보고 하는 말이야?”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는 인간이 하늘 위를 안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가 우스웠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나 알까.

    내가 무협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

    공기의 구성 성분조차 모르는 무림인들이 ‘호흡’을 연구하고, 우주와 자연을 이해한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니 소설이겠지만.

    “놀리는- 컥?!”

    발끈하는 도룡에게 달려가서 복부를 가볍게 걷어찼다.

    퍼엉-!

    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내가 기습해서?

    아니다. 내공을 익히기 전의 내가  무당신검의 제자에게 꼼짝 못 했듯이, 압도적인 능력 차이에서 오는 인식 장애일 뿐.

    ‘이제야 알겠네.’

    나는 P의 적성검사에서 괴물이라고 판명된 ‘운동선수’마저 압도한 사기적인 육체의 소유자.

    그런 내가 ‘내공’을 익혔다.

    “하늘이 어쨌다고?”

    이건 무림인과 무림인의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니다.

    일반인과 운동선수의 싸움!

    개인의 역량을 무시하는 비대칭 무기라도 가져오지 않는 한, 나의 우위는 절대적이다.

    “도룡...!”

    동료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당했음을 뒤늦게 눈치챈 권룡.

    그는 내공이 깃든 주먹을 내지르면서 돌진해왔다.

    우득!

    그리고 나의 뒤돌려차기에 수수깡처럼 팔이 부러졌다.

    “아아악~?!”

    “온종일 몸의 하중을 지탱하는 다리의 근육은 팔보다 강해.”

    “내 팔~!”

    “...들을 준비가 안 됐네.”

    퍽.

    부러진 팔에 허둥대는 권룡의 턱을 발등으로 올려쳤다.

    일명, 앞차기.

    태권도의 가장 기본적인 발차기 중 하나다.

    “감히...!”

    독룡이 품에서 꺼낸 다수의 단검을 내게 던졌다.

    그 별호답게 칼날에 독은 기본.

    그래서 살짝만 스쳐도 중독되어 매우 위험할 수 있다.

    툭, 툭, 툭.

    하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 없다.

    “느려.”

    “헙- 아악?!”

    잽싸게 독룡의 뒤를 잡고 꼬리뼈를 걷어찼다.

    부웅~

    그는 묘기를 부리듯 허공에서 앞구르기를 하며 모래 위로 팔다리 쭉 뻗고 엎어졌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에 가서 전염병이나 개발해라.”

    “......”

    구시대를 공포에 빠트렸던 전염병만 퍼트려도,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는 쑥대밭이 되리라.

    싸울 줄 모르는 의사가 강력한 독이 든 주삿바늘을 든다고 강해지진 않는다.

    같은 이치.

    독이 묻은 칼은 비슷한 선수끼리 싸울 때만 효과가 있다.

    “너는?”

    “항복이요. 싸울 의사가 없는 아녀자(兒女子)에게 폭력을 행사하진 않으시겠죠?”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의 앳된 미모의 소녀가 항복하듯 양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미봉.

    중원 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혼녀로 평가받는 그녀는 구룡오봉 중에서 가장 약했다. 무공을 익히긴 했지만, 사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미봉의 가녀린 체형은 전투에 비효율적이니까.

    즉, 미봉은 무력을 포기하고 매력을 챙긴 셈.

    당연히 장단점이 있다.

    “공자님. 제 몸이 탐나서 넘어가는 건 아니죠?”

    “냄새 나는 발바닥으로 뺨을 후려쳐줄까?”

    “아뇨.”

    “깔보지 마. 너보다 예쁜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거짓말!”

    안 믿는 미봉을 무시하고 옆을 돌아봤다.

    “안 덤벼?”

    “저도 항복요!”

    나랑 눈이 마주친 검봉이 항복한 동료의 흉내를 냈다.

    “싫은데?”

    “이런 차별은 부당-”

    빡!

    항의하는 그녀의 이마에 기습적인 딱밤을 먹였다.

    고통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뇌진탕이 온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벌러덩 넘어졌다.

    “너무해요. 여자의 생명인 얼굴을 때리다니...”

    용기를 간신히 쥐어짠 미봉이 나를 비난했다.

    “그래서 때린 거야.”

    “고의로?!”

    “내 목숨을 노린 값으로 이마의 혹이면 정말 싼 거지.”

    “그건... 그렇네요.”

    나의 자비심 넘치는 판결에 미봉도 수긍하고 넘어갔다.

    “미봉.”

    “조금 전에 소개했지만, 저는 모용세가의 차녀인 모용...”

    “돈 좀 줘.”

    “공자님. 정말로 마적 두목이 아닌 거죠?”

    “내가 붙잡은 마적들을 너희가 죽이는 바람에 현상금이 절반으로 줄었잖아. 이건 정당한 요구야.”

    “검봉에게 청구하세요. 저는 돈이 없어요.”

    “거짓말.”

    “정말인데... 필요한 게 있으면 도룡과 권룡이 사주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돈은 안 챙겼어요.”

    “진짜 글러 먹었구나?”

    소설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개인정보였다.

    “제가 사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해서 곤란하니까요.”

    “정말 곤란하네!”

    구봉오룡은 장래에 주인공의 부하 혹은 아내가 될 만큼 비중 있는 주요인물들.

    약하다고 막 죽여버리면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

    ‘마오짜이를 찾을 때까지는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짤랑!

    나는 마적들의 머리와 금품을 챙겨서 자루에 담았다.

    “...왜?”

    그런 나를 미봉이 신기한 생물을 보듯 계속 구경했다.

    “돈이 필요해요?”

    “이거면 충분해.”

    “제가 모용세가의 이름으로 공증해줄게요. 그러면 머리가 없어도 포상금을 받을 수 있어요.”

    “어? 정말?”

    생각해보니 그랬다.

    주인공은 마적을 포함한 수많은 흉악범을 토벌했지만, 단 한 번도 머리를 주운 적이 없었으니까.

    “대신에 가까운 관청까지 동행해야 해요.”

    “그 정도쯤이야.”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마적들의 머리를 안 챙겨도 된다면 그 정도 수고는 해줄 의향이 있다.

    “잘 부탁해요.”

    “그래.”

    “실례가 안 된다면, 공자님의 이름과 사문을 알 수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내 신상정보를 캐묻는 미봉.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기에 1초쯤 고민하다가 답했다.

    “강문수.”

    “아! 강 공자님이셨군요.”

    “천마의 외손자야.”

    “...예?”

    “잘 부탁해.”

    뼈다귀 사부님의 유품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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