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88화 (89/232)
  • 088화

    “흠... 망했네.”

    동굴에서 주운 무공 비급을 30번쯤 읽었을까?

    강해질 조짐은 전혀 없고, 꼬르륵 소리는 점점 커지고,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은 아깝고, 내공의 정수는 먹고 싶고...

    그래서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먹자.’

    여기서 허탕을 치더라도 갈 수 있는 보물의 장소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이곳에 지나친 미련을 갖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스윽-

    (잠깐! 먹지 마~!)

    “음?”

    완두콩처럼 생긴 내공의 정수가 입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내 머릿속에 울리는 다급한 목소리.

    주위를 둘러봤다.

    (설마,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냐?!)

    “...아주 잘 들립니다. 그런데 어디서 말하는 중인가요?”

    (정말로?!)

    “네. 정말로.”

    (그러면 밑을 봐라. 아니, 발밑을 보지 말고! 이런 답답한 중생을 보았나! 살짝 왼쪽!)

    “처음부터 뼈다귀를 보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평평한 바위 위에 누워있는 무림인의 시체였다.

    (뼈다귀? 무슨 뼈다귀?)

    “자신의 모습이 안 보이세요?”

    (...안 보이는구나.)

    “흠. 보존이 아주 잘 된 뼈다귀가 되셨어요.”

    (더 말하지 마라.)

    “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는 없었던 황당한 전개.

    뼈다귀만 남은 무림인이랑 대화가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무당이라서?’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기에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먹지 말라는 건 무슨 의미이세요?”

    (평생 쌓아온 업적이 하찮은 똥이 되는 광경을 보고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내공심법.)

    “호흡 잘하는 방법이요?”

    (솔직하게 말하려무나. 무공을 배운 적이 없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알지! 아이고... 죽어서도 편히 쉬질 못하는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탄식하는 유령의 목소리에 괜히 미안해졌다.

    (내게 9번 절해라.)

    “왜요?”

    (그건... 에잉! 됐다. 죽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앞으로 나를 사부라고 부르거라.)

    “네.”

    공짜로 과외를 받게 됐다.

    * * *

    (제자야. 그 몸뚱이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냐?)

    “제 몸이 어때서요?”

    배고파서 연못에 사는 새하얀 물고기를 4마리째 잡아먹었을 때, 뼈다귀 사부가 이상한 말을 했다.

    (아직 제대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한 거냐?)

    “제대도 배우지 않은 상태로 해보라고 하셨잖아요.”

    (......)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실전에 강한 편이거든요.”

    (솔직하게 말하려무나. 과거에 무공을 배운 적이 있지?)

    “전혀요.”

    (어허!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이런 무서운 재능을...)

    “사부님. 이제 먹어도 되나요?”

    (마음대로 해라.)

    매우 허탈한 목소리로 뼈다귀 사부가 허락하자마자 ‘내공의 정수’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사르륵.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며 흡수됐다.

    “신기하네요.”

    내가 인간이 아닌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

    바람처럼 홀가분하게 느껴지는 몸이 어색했다.

    (...제자야.)

    “네.”

    (딱 3년만 몸을 사리면서 숨만 쉬어라. 그러면 천하의 모든 강자가 네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농담이시죠?”

    (뼈만 남은 내가 농담해서 무슨 영화를 보겠느냐?)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정말로 숨만 쉬면 되나요?”

    (믿어라.)

    사부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으로 가득했다.

    “강해지기 참 쉽네요. 숨만 쉬면 된다니.”

    (네가 이상한 거다...)

    “더 가르쳐주세요.”

    (처음에는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는데, 가르칠 게 없어서 그만뒀다.)

    “전혀요?”

    (...혈마를 찾아가라.)

    “갑자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천마가 아닌 혈마를?

    조금 뜬금없었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너라면 틀림없이 요술에도 재능이 있을 터. 이 중원에서 오직 혈마만이 너를 가르칠 수 있다.)

    “혈마...”

    이건 기회가 아닐까?

    지구에는 나를 가르쳐줄 ‘무당’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일이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는데...

    ‘혈마도 무당이라면?’

    나에게 부족한 전문성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내가 소지하고 있던 무공 비급을 천마에게 전달해다오.)

    “이거, 위험한 건 아니죠?”

    (가출한 딸의 유품을 가져온 자를 해칠 리 없잖느냐?)

    “헉!”

    뼈다귀 사부의 정체에 너무 놀란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천마의 딸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허허! 내가 천마의 딸이라서 많이 놀랐느냐?)

    “네.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겠지. 천마는 독신으로...)

    “사부님의 뼈가 두꺼워서 남자일 줄 알았거든요.”

    (...내가 살아 있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거라.)

    “감사합니다!”

    (당장 꺼져!)

    “네!”

    우리는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 * *

    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는데, 밖으로 향하는 지금은 선명하게 보였다.

    종유석, 벌레, 돌멩이, 통로...

    외길이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했을 거란 생각을 하던 나는,

    “살았다!”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보자마자 양팔을 벌리며 생존을 자축했다.

    여전히 거지 같은 몰골.

    하지만 알맹이는 ‘내공’이란 편리한 연료로 충만했다.

    ‘처음이 어려웠지.’

    내공(內功).

    무협 소설의 근간이 되는 자원.

    내공이 없으면 무공도 없고, 무공이 없으면 무림인도 없고, 무림인이 없으면 무협도 없다.

    그만큼 중요한 내공.

    하지만 중요성에 비해 알려진 정보는 매우 적다.

    “현실에 없으니 당연하지.”

    무협 소설 작가는 내공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인간.

    그 원리를 알았다면 작가 본인이 현실에서 무공을 익혔으리라!

    즉,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는 소설로 배울 수 없다. 무협 소설 전문가라는 송선영의 부친이 무공을 못 익히는 이유.

    하지만 소설의 원주민이 내 영혼을 흔들면서 ‘이게 내공이야!’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준다면?

    그래도 모르면 바보다.

    “자…. 그러면...”

    새하얀 물고기만 계속 먹었더니 입에 물리기 시작했다. 사막 도마뱀은 더욱 질렸고!

    문명인다운 요리를 먹고 싶다.

    도시의 노점상에서 봤던 육즙 가득한 만두와 국수 같은...

    “쓰읍!”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입가에 침이 고였다.

    ‘오래 참았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 아몰랑 백작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뒤부터 편의점의 냉동식품으로 만족할 수 없는 타락한(!) 몸이 돼버렸다.

    이젠 한계!

    아르바이트하기 싫어서 억지로 버텼지만, 몸에 쌓인 내공 덕분에 자신감이 살짝 생겼다.

    우웅-

    내공이 가슴 한가득 차오르면서 웅장해졌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자라고 하셔서 다소 충격이었지만.”

    (꺼져~!)

    “...흠흠.”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보면서 도시를 향해 달렸다.

    ‘정 없으면 이 무공 비급을 팔아도 되고.’

    사부님께는 미안하지만,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주인공보다 강한 세계관 최강자 천마를 당장 만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내가 딸을 살해했다는 오해라도 했다가는?

    꼼짝없이 죽는다. 원한을 갚는다면서 고문당할 수도 있고!

    “그건 곤란... 음?”

    두두두-

    말을 탄 남자들이 모래평원을 질주하는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흠. 좋은 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네.’

    내공으로 강화된 내 귀에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쳇! 거지였잖아?”

    “가진 건 없지만, 우리를 헛걸음하게 한 대가를 치러야지.”

    “막내야. 저 거지를 잽싸게 처리하고 돌아와라.”

    “네! 형님!”

    무리에서 이탈한 ‘막내’가 말을 타고 내게 돌진했다.

    챙-

    왼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말의 안장에 채워져 있던 반월도를 뽑아서 쥐었다.

    “...이런 부분은 소설처럼 현실성이 없네.”

    이곳은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는 무림인이 돌아다니는 무림 세계.

    호위나 동료 없이 혼자서 여행하는 자가 무림인일 가능성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조심성이 너무 없다.

    “잘 쓸게.”

    “...아?”

    내 목을 노리는 남자의 오른손을 부수면서 무기를 빼앗고, 말이 내 옆을 지나가기 전에 반월도로 그의 목을 잘라줬다.

    댕강!

    머리를 잃은 남자가 말의 안장에서 추락하고, 고삐가 풀린 말은 통제를 잃고 무작정 달렸다.

    “헉! 막내야!”

    “어떻게 된 거야?!”

    “무림인인가!”

    희생자가 발생한 뒤에야 눈치채는 저들의 지능은 원숭이랑 비슷하거나 살짝 떨어지지 않을까?

    저렇게 조심성이 없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안 그래도 돈이 필요했으니.’

    저들이 소지한 말과 반월도만 팔아도 의식주에 필요한 활동비를 충당할 수 있으리라.

    결정됐다.

    “헉! 놈이 달려오고 있어!”

    “말보다 빠르다고?!”

    “이대로는 따라잡힐 거야!”

    “젠장! 흩어져...!”

    내가 가장 경계했던 귀찮은 짓을 해줬다. 이대로 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 절반 이상 놓칠 터.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안 되지.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

    똑같이 목숨을 걸어야지.

    불끈!

    무협 소설에는 무림인들이 물 위를 달리고, 하늘을 걷고, 바람보다 빠르게 해주는 ‘보법’이 있다.

    보법(步法).

    직역하면, 걷는 방법.

    뼈다귀 사부님에게 배우지 못했지만, 나는 현대의 육상선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간을 목표로 하는 괴물 중 하나.

    팡야-

    오직 달리기만으로 공기를 찢었다.

    “아악?!”

    “히이잉~?!”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이었던 사람과 말들이 비명을 질렀다.

    휘이이잉~

    공기가 찢어지며 발생한 충격파와 모래바람에 휩쓸린 그들은 균형을 잃고 훨훨 날아갔다.

    그리고 철푸덕!

    손을 쓰거나 피를 흘리지 않고 간단히 제압했다.

    “...깜빡했네.”

    과학과 무공을 접목한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히이잉~?!”

    “히잉~?!”

    우득!

    아무런 잘못도 없는 말들의 목과 다리가 맥없이 부러졌다.

    ‘말들아! 미안해!’

    운 좋게 살아남은 말들은 주인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

    “괴물...”

    퍽!

    무례한 소리를 지껄인 남자의 머리를 터트려줬다.

    “헉!”

    “히익?!”

    거리가 멀면 못 듣고, 못 죽일 거란 착각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내공.

    그 응용법이 매우 많으니까. 내공을 담은 돌멩이를 던져서 인간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에 안 드네.”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익숙하지 않기에 꾸준한 연습과 보안이 필요해 보였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무공의 살상력을 시험해볼 인간들이 주위에 많았다.

    그런 내 생각을 느낀 걸까?

    “잠시만요! 대협!”

    “말할 기회를 주십시오!”

    “돈이 필요하십니까?”

    뚝-

    내게 협상을 시도했다.

    “말해봐.”

    “저희는 이 근방에서 유명한 마적단입니다! 생포해오면 관청에서 포상금을 줍니다!”

    포상금이란 말에 눈이 번뜩 떠졌다.

    ‘아아, 분명히...’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는 악행을 저지른 무림인과 단체에 공개적인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215권이란 터무니없는 분량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

    그래서 나도 잘 아는 편인데...

    “생포? 굳이?”

    “많은 백성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해야 황실의 위엄을 널리 알리고 경고도 되니까요! 그래서 머리만 가져가면 포상금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흠...”

    이 마적들이 며칠 더 살겠다고 이런 제안을 할 리 없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내 표정에서 희망을 얻은 마적들이 추가타를 날렸다.

    “저희가 도망쳐봐야 대협의 손바닥 안이지 않습니까?”

    “더러운 마적의 피로 대협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지요.”

    “맞습니다! 귀찮은 전리품도 저희가 들고 가겠습니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도 비슷한 전개가 있었다.

    그때, 주인공의 선택은...

    “좋아.”

    목숨을 구걸하는 마적들의 수작에 어울려줬다.

    “감사합니다! 대협!”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역시 대협이십니다!”

    서걱-

    당분간 살려두겠다는 내 말에 안심한 마적들의 머리가 동시에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털썩, 털썩, 털썩...

    머리를 잃은 몸통이 피를 쏟아내며 줄줄이 쓰러졌다.

    “내 돈...”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범인이 등장했다.

    “남자 주제에 제법이구나. 본녀의 검을 피하다니.”

    내가 잡은 마적들을 한순간에 몰살시킨 무림인.

    나보다 살짝 연상인 20대 중반 외모의 여성이었다.

    “혼자인가요?”

    “그렇다면 어쩔 테냐?”

    “그야 당연히...”

    스르릉-

    이 반월도로 마적들의 복수를 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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