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5장-4절] 이 천마 실화냐?
환자의 꿈속에 처음 진입할 때,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환자의 근처에서 시작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운이 좋으면 바로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다.
“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흙먼지뿐인 평야.
시대와 위치를 특정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시작부터 죽음의 위기는 아닌 것 같네.’
그리고 내 복장은 소매가 넓은 흰색 명주옷.
이것도 시작 장소처럼 내 임의로 설정할 수 없는데, 처음 복장은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다.
“정답이었나?”
남해수도 무협 소설을 매우 좋아했지만, 그의 꿈은 P의 적성검사기가 등장하기 직전인 구세대.
그래서 이번에도 살짝 걱정했었는데, 마오짜이는 우리의 예상대로 ‘중세’를 선택한 듯했다.
그때,
‘사람 무리?’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내 뒤편으로 마차의 긴 행렬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도망쳐야 하나?
마차는 보병과 기병이 뒤섞인 호위병력을 잔뜩 이끌고 있었는데, 최근에 격렬한 전투를 치렀는지 몰골이 상당히 추레했다.
휘이잉~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시오.”
“...길을 잃은 행인입니다.”
심장이 뛰었다.
마차 행령의 선두를 걷던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어느새 내 뒤에 등장했으니까.
스르릉-
심지어 그의 칼은 내 목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대체 언제?!’
전혀 반응할 수 없었다.
“미안하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을 상대로 추태를 보였구려.”
스르릉-
천천히 칼을 거둔 남자가 오른손 주먹에 왼손바닥으로 포개며 내게 사과했다.
포권(包拳).
무협 소설의 대표적인 인사법.
아직 단정할 순 없지만, 내가 무협의 세계에 온 건 확실한 듯했다.
‘여기가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괜히 조급하게 진행했다가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시대를 정확히 맞췄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길을 막은 탓이니까요.”
“흠. 이곳은 마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니 빨리 돌아가시오. 호기심이 큰 화를 부를 수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펄럭~
남자는 소매가 헐렁한 푸른색 무복을 멋지게 휘날리면 마차 행렬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면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잖은가?
그래서 먼저 말을 걸었다.
‘이럴 때는...’
송선영의 부친(무협 전문가)이 조언한 대화법을 활용하기로 했다.
“대협.”
“흠. 대협은 내게 과분하니 소협이면 충분하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솔직했다.
흐뭇함으로 가득!
‘진짜네! 대협이라고 부르자마자 호감이 쭉 올랐잖아?’
대협(大俠).
직역하면 큰 협객.
무림에서 존경받는 무인에게만 붙는 호칭이다. 하지만 그 기준이 주관적이라서 현대의 ‘사장님’이나 ‘사모님’처럼 쓰인다.
“이것도 인연인데, 대협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대협은... 크흠! 나는 무당파의 큰 어른이신 무당신검 창월의 1대 제자 청훈이라 하오.”
“헉! 수많은 악인을 해치우고, 천마의 오른팔인 검마(劍魔)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신 무당신검 대협의 제자 분이셨다니! 대단한 분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무당신검(巫堂神劍) 창월.
이걸로 확실해졌다.
‘여기는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가 확실해!’
무당신검은 ‘무당파’란 대학의 부총장 같은 거물인데...
무당파의 학생도 아닌 주인공에게 주옥같은 가르침을 자주 전수하는 3대 호구 중 하나다.
무당신검.
화산신검.
제왕신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는 이 셋을 천하삼검(天下三劍)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핵심요약집에는 주인공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호구삼검’이라고 정의했다.
“하하! 아닐세. 무림인도 아닌 자가 이 정도로 귀가 밝다는 게 참으로 놀랍구려.”
“동경하는지라...”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무공에 관심이 많다.
“그렇군. 달리 문제가 없다면 도시까지 동행하는 게 어떻소?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상단을 노리는 마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오.”
“제가 감히 그래도 될지...”
“하하! 괜찮소. 양민을 지키는 일은 무당파의 제자로서 당연하니. 무량수불(無量壽佛).”
“감사합니다.”
“부담 갖지 마시오. 나도 말동무가 필요하던 참이니.”
주인공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무당신검의 제자다웠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공짜를 매우 좋아하는 나로선 이 남자에 대한 호감이 가파르게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즐거운 대화였소.”
“청월 대협! 호의에 감사합니다!”
“하하! 앞으로는 조심하시게.”
“물론입니다!”
탁!
가까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헤어지게 됐는데, 나는 반나절 동안 익숙해진 포권으로 자연스럽게 작별인사를 했다.
‘...좋아.’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 득실거리는 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나는 철저한 약자!
이들처럼 무공을 익히기 전에는 무조건 몸을 사려야 했다.
꼬르륵.
“......”
굶어 죽거나 노숙하지 않으려면 돈도 필요하고!
새로운 꿈에 침투할 때마다 빈털터리로 시작하는 불편함은 언제쯤 해결할 수 있을까?
갈 길이 멀었다.
‘선영이가 준비한 핵심요약집이 없었다면 진짜 고생할 뻔했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랑 접근법을 달리 했어야 했다.
안질리나 치맥 영애가 된 김은정은 미남 수집 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소설 전개가 틀어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결국에는 주인공이랑 똑같이 행동하지 못해서 실패했지만!
반면,
“귀찮게 됐네.”
이번 환자 마오짜이는 소설 전개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돌발행동으로 미래가 바뀌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
그 탓에 지금이 소설의 몇 권째 전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뒤죽박죽이랄까!
그래서 주인공 ‘천마의 제자’의 행보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설은 도움이 안 될 듯했다.
쓸 수 있는 정보는 불변의 설정뿐.
예를 들자면?
강력한 무공 비급이 숨겨져 있는 장소 같은.
“동쪽이 여기면...”
태양은 동쪽에서 뜨기 때문에 나무의 잎사귀와 줄기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햇빛을 받기 위해 동쪽으로 자라는 경향이 있다.
이 세계의 대략적인 지도.
보물이 숨겨져 있는 위치.
둘을 대입한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보물’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꼬르륵.
“...서둘러야겠는걸.”
마음 같아서는 노점상에서 파는 만두라도 훔쳐서 달아나고 싶지만, 곧바로 ‘지나가던 협객’의 명성으로 치환될 것 같았기에 그만뒀다.
그러면 아르바이트는?
차라리 사막에 사는 도마뱀을 잡아먹으면서 노숙하겠다!
‘결정됐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바위산으로 향하자.
* * *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에서 중요하게 다룬 ‘엄청난 보물’은 마오짜이가 전부 선점했으리라.
하지만 이 소설 세계에 자신이 들어올 줄 몰랐던 그가 215권에 등장하는 모든 보물의 위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빙고.”
바위산의 균열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벌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동굴의 출입구.
그곳에 쳐진 거미줄과 마른 덩굴 등이 여태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음을 알려줬다.
휙휙~
오는 길에 만든 지팡이로 장애물을 치우며 안으로 향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옷은 진즉에 너덜너덜.
현대의 운동화처럼 튼튼하지 않은 신발은 진즉 닳아서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다.
‘이건 생각 못 했네.’
어둡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 내부는 완벽한 암흑(暗黑).
탁탁.
나는 시각장애인처럼 지팡이로 조심스럽게 정면의 바닥을 두드리면서 천천히 전진했다.
이런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서 절벽 같은 곳에 떨어진다면?
운 좋게 살더라도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굶어 죽으리라!
‘너무 깊은데...?’
소설에서는 ‘부상이 심한 주인공이 동굴 안으로 피신했다.’라고 짧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대강자인 무당신검의 추적을 따돌리려면 이 정도 깊이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
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호흡이 점점 힘들어졌다.
괴물로 통하는 수영선수들조차 질려버릴 만큼 폐활량이 좋은 나였기에 그나마 견디는 것이리라.
‘아니지.’
무공이란 비상식적인 힘을 보유한 무림인들에게는 이런 극한의 환경도 우습지 않을까.
무당신검의 제자가 말했듯이 내가 무공을 못 익힌 힘없는 ‘양민’이기 때문에 힘들 뿐이다.
‘이렇다가 또 죽는 거 아니야?’
걱정됐다.
되돌아가기는 너무 먼 거리를 와버렸고, 여기서 길을 잃은 채 죽어버리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호흡도 힘든 이 동굴에서 시작할 테니까!
최악이다.
‘죽으면 몸은 또 약화될 테고, 선영이가 기껏 준비한 요약본도 쓸모없게 되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기!
이번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죽으면 육체 능력이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져서 선수 생활도 힘들어지리라.
주르륵...
정말로 목숨을 잃는 게 아님에도 긴장으로 땀이 흘렀다.
그 상태로 얼마나 갔을까?
반짝!
“헛!”
새까만 세상에 미미한 푸른색 빛이 스며들었다.
반짝반짝!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빛은 점점 밝고 강렬해졌다.
‘야광주(夜光珠)!’
무협 소설에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야광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으로, 전기가 필요 없는 형광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야광주는 매우 유용하고 귀해서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데...
‘여기에 있다는 건?’
이곳이 내가 찾던 보물이 숨겨진 장소란 의미이기도 했다.
반짝반짝!
“오...”
야광주의 은은한 녹색 빛으로 물든 넓은 실내 공간.
호흡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동굴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로 형성된 작은 연못이 있어서 갈증은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이거, 먹을 수 있으려나?’
그 연못에는 내 팔뚝 크기의 새하얀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소설에는 이 물고기의 존재 자체가 묘사되지 않았기에 식용할 수 있는지는 파악 불가.
낮에 먹은 도마뱀이 아직 완전히 소화되지 않았기에 최악의 수단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가 진짜다.
이 동굴은 무당신검에게 당한 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한 은신처.
운 좋게 추적자를 따돌린 주인공은 이곳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무림인의 유품을 챙기는데...
“안녕하세요. 주인공이 아니라서 섭섭하시죠?”
“......”
평평한 바위 위에 누운 사람의 뼈는 대답이 없었다.
“주인공은 당신의 무공이 수준 떨어진다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줬어요. 정말 너무했죠?”
“......”
“하지만 저는 감사히 사용하겠습니다. 당신이 일평생 쌓아온 내공의 정수도.”
뼈만 남은 주검의 골반 부분에 완두콩 크기의 구슬이 놓여 있었다.
내공의 정수(精髓).
힘의 결정체라고 할까?
대다수 무림인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만, 이처럼 사전에 준비된 자연사는 조금 다르다.
‘주인공은 이걸 회복약으로 이용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다.
“그냥 먹으면 되나?”
하지만 그랬다가 단순한 똥으로 소화되면 회복약으로 써버린 주인공보다 못하다.
“......”
당연한 얘기지만, 뼈만 남은 원주인은 말이 없었다.
‘아아, 맞아. 설명서가 있었지!’
이름하여 무공 비급!
주인공이 여자친구에게 줘버리면서 완전히 잊힌 비운의 무공.
소설 215권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무공을 습득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적인 책을 조심스럽게 주워서 펼쳤다.
“흠...”
이게 무공 구결이란 걸까?
「선인(善人)은 부족한 자(自)의 스승이오,
불선인(不善人)은 가득한 자의 재원(財源)이랴,
이름 없는 도(道)의 후왕(後王)을 귀하게 모시라,
백성들에게 박(博)하여 고르게 이슬이 맺히는구나.」
“봐도 모르겠는걸.”
송선영의 핀잔이 문뜩 떠올랐다.
줘도 못 먹는 너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바보라고.
‘큰일이네.’
진짜로 바보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