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86화 (87/232)
  • 086화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이해하려면 기본적인 ‘무림 용어’와 상식부터 알아야 한다.

    무림(武林)이란?

    ‘물리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위험한 세계지.’

    힘 있는 자가 모든 걸 갖는 불합리한 세계다.

    재산, 권리, 세력, 미녀, 명성...

    사람을 죽이고 도시와 마을을 파괴해도 힘만 있으면 용서되는 끔찍한 무법지대.

    즉, 힘이 최고다.

    이런 힘을 키우려면?

    ‘무공(武功).’

    마법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것을 키워야 한다.

    무공이 강해지는 방법은 무협 소설마다 다른데, 대부분은 문파 혹은 세가에서 배운다.

    문파(門派)는 학연.

    세가(世家)는 혈연.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번외로는, 신공절학의 비급이란 족집게 학습지를 주워서 독학하거나 은거 기인이란 수상한 선생에게 불법 과외를 받는 것이다.

    설명 끝!

    그 외에는?

    ‘거슬리면 죽이고, 방해하면 죽이고, 건방지면 죽이고, 위험하면 죽이고, 수상하면 죽이고...’

    가로막는 강자들을 계속 죽이면서 강해지다가 더는 적수가 없을 때쯤에 소설 완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도 큰 틀은 똑같았다.

    다만,

    “천마랑 마주치면 안 되겠네.”

    소설 제목에 나오는 ‘천마’는 혼자서 세계를 파괴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공의 소유자!

    주인공은 그런 천마의 제자다.

    ‘이거... 위험한데.’

    이번에 내가 설득해야 하는 환자 마우짜이가 ‘천마’이거나 ‘천마의 제자’라면?

    핵무기보다 강했던 마법소년 최강민에 버금가는 위험도다.

    딩동!

    “음? 누구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끝까지 읽고, 침대에 누워서 작전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울린 기숙사 초인종.

    여길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후배 최강훈뿐인데, 녀석이 학교 수업을 빼먹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다면 택배?

    최근에 주문한 물건이 없기에 이것도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면 뭐지?’

    딩동!

    다시 한번 울리는 초인종.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나가요!”

    침대를 데굴데굴 굴러서 빠져나온 후, 확인해보지도 않고 속옷 차림으로 현관문을 살짝-

    쿵!

    “아악?!”

    나는 갑자기 활짝 열린 문틀에 찍힌 이마를 문지르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무장강도인가?!’

    그런 내 예상을 비웃듯 익숙한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늦잖아!”

    “설마... 선영이야?”

    “그러면 누구겠어?”

    골반에 양손을 걸친 송선영이 쌍심지를 켜고 나를 노려봤다.

    어째서 화가 난 걸까?

    아무튼,

    “아니, 아가씨. 여기는 여자가 들어올 수 없는 남자 기숙사예요.”

    “전에도 왔잖아?”

    “그때도 원래는 안 돼. 네가 멋대로 쳐들어온 거지.”

    “그래서 신고한다는 거야?”

    “나는 아직 안 미쳤어.”

    후환이 두렵다. 그리고 싫지도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여긴 여전히 냄새가 심하네.”

    “말이 심하잖아!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들어오기나 해.”

    “이미 여럿이 봤어. 네가 늦게 열어주는 바람에.”

    “내가 잘못했네!”

    송선영이 신발을 벗고 들어오자마자 현관문을 닫았다.

    촤락~

    햇빛이 들어오도록 열어둔 커튼도 잽싸게 쳤다.

    “왠지 기분 나빠. 내가 온 걸 숨기려고 애쓰지 마.”

    “나중에 잔소리를 듣는 건 나야!”

    “그렇게 커튼을 치는 쪽이 더 의심받을 것 같은데? 커튼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안 보이잖아.”

    “그건... 맞네.”

    촤락~

    송선영의 지적에 설득당한 나는 다시 커튼을 걷었다.

    “진정해. 예전에 같이 자기도 했는데, 고작 이 정도로 허둥대는 건 우습잖아.”

    “하지만 그때는...”

    “그때는?”

    “...꿈인 줄 몰랐지. 젠장! 지금이랑 다를 게 없네.”

    스스로 생각해봐도 우스웠던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째서 나는 그녀의 방문에 예민했던 걸까?

    여자가 오면 안 되는 남자 기숙사란 설명으로는 부족했다.

    “진정이 좀 됐어?”

    “...아니.”

    푹신.

    바로 옆에 앉은 송선영 때문에 전혀 안 됐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윽한 꽃향기.

    내가 아는 종류였다.

    “히아신스네.”

    “맞아. 어떻게 알았어?”

    “대단한 건 아니야. 아는 꽃향기가 이것밖에 없거든.”

    우연히 들어간 백화점 1층에서 향수를 파는 점원이 ‘이게 히아신스에요.’라고 우연히 가르쳐줬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야?”

    “꼭 이유가 있어야 해?”

    “어... 여기는 남자 기숙사니까. 미리 연락을 줬으면 학교 밖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바보니? 남의 시선을 신경 썼으면 모델 일은 절대 못 했어.”

    “그건 그렇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야말로 모델은 절대 못 될 것 같았다.

    ‘아! 이건 좀 다른가?’

    기숙사 규칙을 어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저격수에게 노려질 때도 침착했던 내가 고작 여자애 한 명 때문에 이토록 당황한다고?

    말이 안 됐다.

    “이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어.”

    송선영이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무언가를 전송했다.

    띠링♪

    <송선영: 핵심요약본>

    “핵심요약본? 이게 뭐야?”

    “......”

    “선영아?”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내가 읽으면서 요약한 거야. 전자책에는 없는 종이책 부록 지도도 사진 파일로 첨부해놨어.”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내 시선을 피하면서 설명했다.

    “......”

    “처음에 무협이 뭔지도 몰라서 아빠의 도움을 받았어. 아빠는 자칭 32년 경력의 무협 전문가거든. 그래서 소설에서 생략한 설정의 부수설명도 제법 넣었어.”

    “......”

    “그리고... 아! 최근에 꿈속에서 죽었다며? 태권도도 명품 가방을 밝히는 여자애에게 졌고.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강력한 무공이 숨겨진 장소도 따로 기록해놨어.”

    “......”

    “야. 무슨 말이라도 해봐. 나만 계속 말하니 무안하잖아.”

    목에서부터 귀까지 새빨개진 송선영이 신경질을 냈다.

    “...고마워.”

    “그게 끝?”

    “미안. 내 상상을 벗어난 이 상황이 당혹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무슨 상상?”

    “그야... 우리는 전에 헤어졌으니까.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 할 이유가 없으- 아악?!”

    “이 바보가...!”

    진심으로 분노한 송선영의 기습적인 발등 찍기!

    말도 안 되게 아팠다.

    “엄살 부리지 마. 내 발꿈치도 아프거든?”

    “으으... 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저격도 피해낸 나의 위기감지능력은 송선영을 상대로는 한없이 무력했다.

    이유가 대체 뭐야?

    환장하겠다.

    “내가 어째서 모델이 됐다고 생각해? 벌써 잊었어?”

    “당연히 기억하지.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간 네가 또 자살하려고 해서 내가 설득했잖아.”

    “쓸데없는 부분은 잊어! 그때 네가 뭐라고 설득했었더라?”

    “아마... 모든 사람이 마네킹으로 보이면 부끄럽지 않고... 너는 예쁘니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했지.”

    “또 맞을래?”

    “......”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다음에 또 물어볼 테니 똑바로 기억해.”

    “네.”

    “지금도 예쁘긴 하지만, 내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을 때는 진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했어.”

    “내가?”

    “어.”

    내가 그렇게 용감했다고?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몸을 상품처럼 훑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지.”

    “아! 그건 기억해.”

    그 뒤에 나는 침대를 송선영에게 양보하고 바닥에서 잤다. 그녀의 통화에 깨기 전까지.

    “옥상에서 네가 말했잖아.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마네킹처럼 보인다면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과거의 송선영이었다면 모델은 무리지만, 지금은 P의 적성검사기로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고.”

    “그것도 기억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설마... 너, 아직도 모르겠어? 이렇게 설명해줬는데도?”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또 맞을 각오를 하며 사과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

    “네.”

    “송선영의 현재 직업은?”

    “수영복 모델.”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마네킹으로 보이는... 아!”

    “바보야. 드디어 깨달았어?”

    “물론입니다. 이 바보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말해봐.”

    “송선영의 눈에는 강문수만 남자로 보이기 때문에 무리 없이 모델 활동을 할 수 있었- 아악?!”

    또 발등을 밟혔다.

    틀린 건가?!

    “바보야!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부끄럽잖아! 너는 여자에 대한 배려심이 너무 없어!”

    “으으...”

    이래도 혼나고 저래도 혼나고...

    하지만 싫지 않았다.

    “웃지 마.”

    “나랑 있으면 부끄러워?”

    “헛소리하지 않는 편이 네 신상에 좋을 거야. 나는 지금 수면 부족으로 굉장히 신경이 날카롭거든?”

    “얼마나 못 잤는데?”

    “몰라. 시험 기간에도 안 썼던 가상현실도서관까지 사용한 탓에 당장 기절할 것 같아.”

    “그러면 얼른...”

    “안 돼! 빨리 컴퓨터나 켜. 215권을 요약하기가 쉬운 줄 알아? 내가 옆에서 설명해주지 않으면 봐도 이해가 안 될 거야.”

    “......”

    “안 키고 뭐해?”

    나는 이제야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 밑에 쌓인 피로를 눈치챘다.

    외모가 생명인 모델이?

    육상 100km 마라톤을 도와준다고 할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진짜 바보구나.’

    발등이 아니라 온몸을 몽둥이로 맞아도 할 말 없었다.

    “선영아.”

    “빨리 컴퓨터를-”

    “좋아해. 정말 좋아해. 그리고 내가 바보라서 정말 미안해.”

    “...바보야. 커튼부터 쳐.”

    “응.”

    촤락~

    우리는 다음 날 새벽까지 핵심요약본을 살펴봤다.

    * * *

    “그래서 경찰서에 다녀왔다고?”

    “네. 정말로 신고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처음에는 기숙사 경비원인 온 줄 알았는데, 경찰관이 현관문 초인종을 눌러서 깜짝 놀랐다.

    “선영이는?”

    “제 침대에서 자고 있었죠.”

    “딱 걸렸구나?”

    “심마에 빠진 이웃이 신고한 것 같아요.”

    “심마(心魔)?”

    “마음의 마귀. 이것도 송선영이 가르쳐준 무협 용어에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미치면 심마에 빠졌다고 해요.”

    “...너는 어때?”

    서혜주 과장님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뭘요?”

    “내 눈에는 너도 살짝 심마에 빠진 것 같은데...”

    “지금의 저는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탈마(脫魔)의 경지입니다.”

    “...괜찮은 거 맞지?”

    “물론이죠!”

    내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오늘은 5번째 라누벨 환자 마오짜이의 꿈에 들어가는 날.

    높은 확률로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단정할 순 없었다.

    ‘그게 어때서?’

    다시 태어난 기분인 내게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이번에 인간이 얼마나 뻔뻔한지 깨달았어요.”

    “갑자기?”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오는 길에 이웃이랑 마주쳤는데,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하더라고요.”

    “정말로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럴 리 없어요. 제 방에서 여자애의 신음이 들렸다는 신고를 받았데요.”

    “정말이야?”

    “네. 선영이가 졸린다고 앓는 소리를 하긴 했어요.”

    “......”

    서혜주 과장님이 수상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고 치지 마.”

    “당연하죠.”

    “준비는 다 끝났어. 언제든지 들어가면 돼.”

    “다녀올게요.”

    이때까지 입술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던 전지은이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

    “우선, 환자 옆에 딱 붙인 침대에 누워.”

    스윽-

    나는 깊은 잠에 빠진 남자, 마오짜이 옆에 반듯이 누웠다.

    “...신령에게 기도나 제사 같은 건 하지 않아?”

    “안 해. 내 적성은 유감스럽게도 무선 통신이 안 되거든.”

    “뭐?”

    “유선 통신이야. 이렇게.”

    덥석.

    그 순간, 우리는 하나의 꿈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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