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매니저 계약의 효과는 바로 다음 날부터 알 수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태권도 도장.
관계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싲작 전부터 시끄러웠다.
“당신들은 뭐야!”
“촬영하실 수 없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강문수 씨가 촬영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무시하고 촬영을 시도하시면 법적인 불이익이...”
“그걸 왜 당신들이 따져!”
자칭 천재 무당 유일암과 카메라를 든 그의 제자.
그들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제지되어 태권도 도장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수야!”
“......”
“어른이 부르는데 못 들은 척하면 안 되지!”
“......”
나는 전지은의 조언대로 유일암을 깔끔히 무시했다.
아는 척하는 순간, 그 장면을 교묘하게 편집해서 ‘제자’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까.
그만큼 현대의 영상 편집 기술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삐삐-
“호주머니 안의 몰래카메라도 놔두고 들어가십시오.”
“이 자식들은 대체 뭐야!”
카메라를 끄고, 촬영하지 않는 조건으로 입장을 허락받은 유일암이 분통을 터트렸다.
비장의 한 수마저 가문의 사람들이 가져온 ‘전자제품 탐지기’에 걸린 탓이리라.
‘놀랍네.’
가장 놀라운 점은, 학교에서 제멋대로 굴었던 유일암이 아무것도 못 하고 당했다는 점이다.
나를 얕잡아 보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원군의 등장에 허둥대는 그의 꼴사나운 모습.
저걸 본 것만으로도 계약한 보람을 느꼈다.
“어때?”
“정말 마음에 들어.”
전지은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금 과한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 들긴 했지만.
“......”
“......”
나와 전지은의 뒤편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강렬한 위압감.
내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랑 계약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부작용이라면,
“문수야?”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장서연 감독님.
계약이 끝난 후에 연락했다. 연락하긴 했는데...
“죄송합니다, 감독님!”
나는 그녀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사고 친 후에 보고하지 말라고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네 본업이랑 관련된 일이라서 나무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큰 사안은 상의해줘.”
“물론입니다!”
“이러다가 한밤중에 결혼식 청첩장을 받을 것 같아서 두렵네.”
장서연 감독님은 전지은을 힐끔 훔쳐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믿어도 돼?”
“네.”
그때, 전지은이 불쑥 끼어들었다.
“장서연 감독님.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매니저로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결혼은 선수의 사생활입니다. 감독님께 보고하거나 허락받을 의무가 없어요.”
“어머! 매니저 양은 순진하네요. 혈기왕성한 선수가 사고 쳐서 임신한 사례가 얼마나 많은데요.”
“강문수 선수는 남성입니다.”
“미혼의 여성을 임신시키면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건 똑같아요.”
“...감독님이랑 겹치는 업무가 다소 있는 것 같네요.”
“그러게. 우리끼리 나중에 따로 조율이 필요할 것 같지?”
“네. 감독님께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으시면 제가 맞추겠습니다.”
“어머! 배려해주는 거?”
“물론입니다. 저는 굴러온 돌이니까요.”
찌릿찌릿-
두 여성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괜찮은 걸까? 공짜를 걱정하지 못한 내 잘못이겠지?’
나중에 장서연 감독님께 사죄의 뜻으로 밥이라도 사야...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저 건방진 녀석을 꼭 이겨줘!”
“윤경아! 너만 믿는다!”
“힘내세요! 고윤경 선배~!”
우리는 반대편.
경호원들의 검은색 양복이랑 대조되는 흰색 태권도 도복을 입은 남녀가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일충 오빠. 시합 끝난 후에 명품 가방 사준다는 약속, 잊지 마.”
“물론이지!”
“이기면 2개.”
“뭐?! 그런 약속은...”
“2개. 싫으면 지금이라도 관두고.”
“아, 아니야! 당연히 사줘야지!”
여자친구의 어깨를 주무르던 유일충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기하네. 안 강해 보이는데.”
여성 태권도 세계 1위는 남자친구를 무시하고 나를 관찰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고무신 관장님이 여자로 환생한 것 같네.’
육체적으로 남성보다 불리한 여성이란 점과 오만한 태도 때문에 위압감은 훨씬 적었지만, 무시해도 될 수준은 아니었다.
그녀의 체형은?
송선영 못지 않게 긴 다리. 하지만 다리의 힘이 중요한 태권도 선수답게 근육으로 단련된 종아리와 허벅지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건 적성이 ‘태권도 선수’인 모든 여성의 공통점이긴 한데...
‘무언가가 달라.’
내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한눈팔면 질 수도?
직접 대련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현재의 판단으로는 그 정도였다.
“양 선수, 앞으로.”
“......”
“......”
진지한 관장의 부름을 받은 우리는 도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인사.”
“강문수입니다.”
“고윤경이에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친 우리는 거리를 벌리고 섰다.
삑-
호루라기 소리가 대련의 시작을 알렸고,
‘빨라!’
팟!
고윤경은 탐색전 없이 바로 과감하게 내 공격권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내 선택은 고무신 관장님이 즐겨 사용했던 뒤돌려차기!
일방적으로 처맞으며 배운 기술답게 그 신뢰도가 매우 높다.
탕!
“1점!”
헛발질과 동시에 내 옆구리를 때리는 가벼운 충격. 그리고 관장의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렸다.
“뭐-?”
“놀랐나요? 하지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표정인데요.”
내가 살짝 균형을 잃고 휘청하는 사이에 잽싸게 거리를 벌린 고윤정이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의 그 뒤돌려차기. 그건 저와 아빠만 가능한 기술이니까요. 비디오 녹화를 본다고 흉내 낼 수 있는 기교가 아니에요.”
“...대단한 우연이네요.”
우연이 아니다.
고무신.
고윤경.
같은 ‘고 씨’ 성을 쓸 같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직계 후손인 듯하다.
“하지만 그 파훼법은 모르는 모양이네요.”
“......”
모르는 게 당연하다. 배우기 전에 남해수의 꿈이 끝나버렸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약해.’
내가 고무신 과장님께 뒤돌려차기를 시도하면, 반격 한 방에 균형을 잃고 자빠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녀는 어떤가?
고작 유효타를 넣는 게 전부다.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충격이 좀 크긴 했지만.’
주위의 분위기만 봐도 그랬다.
“역시 고윤경!”
“은경아! 사랑한다!”
“믿고 있었다고!”
고윤경이 내게서 선점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태권도 선수와 사부들이 기뻐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내가 악당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계속하죠.”
“얼굴, 조심하세요.”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저는 상대가 여자라고 안 봐줍니다.”
“바라던 바예요.”
여유를 잃지 않는 고윤경.
...마음에 안 든다.
팟!
나는 고무신 관장님께 얍삽하다는 핀잔을 들었던 ‘살기’를 담아서 재차 대련에 임했다.
* * *
“그 도적 새끼에서 살해당하지만 않았어도...!”
졌다.
무언가가 걸린 내기는 아니었기에 손해는 없지만, 내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최근에 송선영에게 수영으로 패배했을 때는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마자 기분이 풀렸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까웠어.”
“비겁하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점수만 노리다니!”
“아니, 문수야? 웬만하면 편을 들어주고 싶은데, 너의 발차기에 진심으로 맞으면 여자는 죽어...”
“큭!”
장서연 감독님의 지적에 나는 서혜주 과장님을 돌아봤다.
“감독님의 말이 맞아.”
하지만 그녀도 내 편이 아니었다.
“약해졌는데요?”
“기존에 미사일이었다면 약해진 지금은 대포라고 할까. 사람이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아.”
“......”
미사일에서 대포로.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비유였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태권도에서 겪은 굴욕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영, 육상.
기록을 다시 측정하면 예전보다 눈에 띄게 떨어질 터. 그리고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분명히 뒷말이 나오리라.
그건 곤란하다.
“감독님. 당분간 모든 훈련을 포함한 외부 활동을 쉴게요.”
“그래.”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한 장서연 감독님은 별말 없이 승낙해주셨다.
딩동!
그때, 서혜주 과장님의 개인실 초인종일 울었다.
“벌써 온 모양이네.”
찰칵.
과장님이 문을 열자마자 회색의 단정한 회사원 정장을 입은 전지은이 들어왔다.
대학생보다는 대기업 비서?
나이를 살짝 웃도는 전문성과 여성의 성숙미가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감독님. 그리고 문수도. 고생했어.”
“그런데 책은...?”
“여기.”
전지은이 새끼손가락 크기의 메모리칩을 내게 내밀었다.
“전자책?”
“종이책으로 215권은 기숙사 공간을 너무 차지하고, 휴대하면서 읽기 힘드니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맞춤법이 현대랑 살짝 달라서 가독성이 떨어져.”
“아하!”
“전자책은 개정판이라서 읽기 편할 거야. 스마트폰이랑 연결하면 자동으로 독서 프로그램도 설치되도록 해놨어.”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 그래도 조금 기쁘네.”
우리의 대화를 살짝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장서연 감독님이 말했다.
“문수야. 그 215권짜리 소설의 제목이 뭐니?”
“이거요? <이 천마 실화냐?>라는 무협 소설이에요.”
“그래? 무협 소설은 남편이 좋아해서 조금 알아. 이번 기회에 나도 읽어봐야겠네.”
“네? 네. 하지만 굳이...”
“나중에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으니까. 그건 매니저 양도 똑같은 생각일걸.”
“......”
전지은은 부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215권이면... 나중에는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겠는데?”
“그러게요. 하지만 그건 환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꿈속에 갇힐 줄 몰랐기에 더욱.”
로맨스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의 되었다.>의 세계에 들어간 김은정도 전혀 준비되지 않았었다. 완결편은 아예 읽지도 못했고.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이러고 전혀 다른 꿈의 세계인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됐다.
“언제쯤 시작할 거야?”
서혜주 과장님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네요. 215권이라서... 얼마나 걸릴지...”
예전에 읽은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도 총 5권으로 된 장편소설이었지만, 이거랑 비교하면 단편시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적어도 완독하기 하루 전에는 알려줘. 나도 미리 시간을 비우고 준비해야 하니까.”
“네. 그럴게요.”
내가 대답하자마자 장서연 감독님도 한마디했다.
“문수야. 이번에는 내게도 알려줘야 한다? 아니, 나에게는 이틀 전에 알려줘.”
“그럴게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약속했다.
그리고 끝으로,
“뇌에 부담을 주긴 하지만, 시간을 단축하고 눈의 피로가 없는 가상현실독서실을 추천해.”
“아...”
전지은의 추천에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고 싶어졌다.
가상현실독서실.
현실보다 하루가 긴 가상현실에서 책을 읽으면 독서에 걸리는 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후유증이 문제지.’
단기적으로 효과가 좋지만, 피로도 극단적으로 누적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손해인 구조.
그래서 정말 시간이 없을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어때?”
“그 방법은 보류. 며칠 늦는다고 환자가 죽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내 거절에 전지은은 살짝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왜?”
“별거 아니야. 체력이 좋은 문수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어. 미안.”
“아아, 그럴지도.”
하지만 내 선택과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왜냐?
‘가상현실독서실을 이용하려면 가상현실기계를 사야 하잖아?’
돈이 아깝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지금부터 무협 소설 215권을 전부 읽을 때까지 내게 자유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