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5장-3절] 나는 바보다
강문수와 서혜주, 그리고 증손녀가 대전 밖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가주.
끼익- 쿵.
마침내, 문이 닫히고 한참이 지난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갔나?”
그 질문에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갔습니다. 조금 전에 사당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들켰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좋아! 잘 풀렸군!”
살짝 어두우면서도 진지했던 표정이 급격히 사라진 가주가 넓은 의자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여보...”
“체신 같은 소리 하지 마.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어!”
눈을 흘기며 나무라는 노파에게 가주는 앓는 소리로 응수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다들, 수고했어요.”
“고모는 결혼 안 해요?”
“삼촌! 삼촌! 놀아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던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화기애애한 대가족처럼 시끌시끌해졌다.
휙~
오랜만에 입은 ‘무당 복장’이 답답하다면서 벗는 사람도 있고...
“이제야 살겠네!”
익숙하지 않은 좌식(坐食)에 피가 안 통해서 절였던 두 다리를 쭉 펴고 드러눕거나...
“사업은 잘되고 있어?”
“그럭저럭. 오빠는?”
무당이랑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기도...
뭐가 됐든 ‘강문수’가 보았던 가문의 모습이랑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버지.”
“왜?”
“바쁜 아이들까지 불러서 연기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나중에 들키면 어떻게 수습하시려고...”
걱정 섞인 장남의 물음에 가주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의 적성이 대단합니까?”
“그러면 세계에 단 한 명뿐인 적성이 안 대단하냐?”
“아무리 그래도...”
“한심한 녀석. 그래서 네 적성이 기둥서방인 거야.”
“아, 아버지...!”
자비 없는 부친의 일침에 장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의 적성은 여성 상담사.
사회에서 힘들어하는 여성들의 고민을 공감하고 상담해주는 훌륭한 직업이지만, 그 상담사가 미남에다가 목소리마저 좋다면?
가주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다.”
“아버지...”
“너는 과분한 며느리를 데려온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어.”
“...그래서 증손녀에게 같은 일을 시키시는 겁니까?”
장남은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에게 과분한 아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처럼 계획적인 접근은 아니었으니까.
사랑이 있었다.
“같은 일?”
“네.”
“증손녀에게 훌륭한 남편감을 소개해줬을 뿐이다. 갑갑한 가문에서 구해주고 싶다는 동정심을 살짝 유도하긴 했지만.”
“책략가다우시네요.”
가주의 적성은 책략가.
상대를 속이거나 유도하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놀리는 거냐?”
“그렇게 들리셨다면 그런 거겠죠.”
“며늘아기가 참 불쌍해. 어쩌다가 이런 새끼랑 만나서...”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다 안다는 듯이 불편한 표정을 지은 가주가 말을 돌렸다.
“전폭적으로 지원해줘라. 너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녀가 너 같은 양아치에게 시집가는 건 원치 않을 것 아니냐?”
“알겠습니다...”
적성이 ‘무당’이 아닌데도 높은 적중률을 자랑하는 점괘.
당연히 우연이 아니다.
의뢰인이 숨겼거나 모르는 정보까지 수집해서 가장 가능성 있는 미래를 예측하는...
확률통계, 수학이다.
“아직도 불만이냐?”
“......”
“양심도 없는 새끼로고.”
“예?”
“가짜 점괘를 진짜처럼 속여서 장사하는 가문에서 혼자만 양심 있는 척하는 네 모습에 구역질이 치미는구나.”
“그, 그건...!”
“네가 아무리 침대 위에서 날아다녀도 가문이 시원찮았으면 절대로 결혼하지 못했어. 그런 고마운 가문을 부정하겠다고?”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기둥서방이니까요.”
“이해했으면 똑바로 해라.”
“네.”
자괴감에 빠진 아들에게서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가주.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위대한 영령들께서 그 아이를 몰랑하게 감싸주시길.”
* * *
서혜주 과장님의 승용차를 이용해서 엘몰랑스 병원으로 이동, 우리는 그녀의 개인실 겸 연수실에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전지은.
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무당 가문의 여식(女息)이며, 나보다 1살 많은 누나였다.
탁월한 미모와 접견 능력을 인정받아서 가문의 대표적인 얼굴마담으로 17살부터 활동 중.
자기소개는 대충 그랬다.
“강문수 씨, 서혜주 선생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도요.”
“잘 부탁할게.”
전지은의 역할은 환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
남해수처럼 배우자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점괘는 무슨...’
자칭 천재 무당 유일암의 한심한 작태를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진짜 무당은 없었다.
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지은의 무당 가문도,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추론하는 확률에 지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과정이야 어떻든 높은 적중률의 ‘점괘’처럼 보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강문수 씨. 원하시는 정보가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가주님께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하셨으니까요.”
“편히 말씀해주세요. 제가 더 어리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나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불편한 관계로는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좋아. 대신에 문수도 편하게 말해줘.”
“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오랫동안 한 탓에 이게 편한...”
“......”
“어흠! 그럴게.”
우리는 그밖에도 다양한 것들을 조율했다.
“원활한 의사소통과 협력을 위해 엘몰랑스 병원에서 보도로 3분 거리에 숙소를 잡았어.”
“헉! 이 근방은 집값이 미치도록 비싸지 않나요?”
“......”
“...비싸지 않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게 가문의 뜻이니까. 아니면 대학교 기숙사 근처로?”
“아니! 여기가 좋을 것 같아!”
내가 주로 머무는 대학교 기숙사로 그녀가 이사 오는 쪽이 훨씬 부담될 것 같다.
결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목적을 갖고 내게 접근해온 가문의 여성이 매일 근처에?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앞으로 대학교 밖으로 외출할 때는 나에게 연락해줘.”
“어째서?”
“유일암. 이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그 이상한 무당이 왜?”
“그는 법적인 문제가 없는 선에서 너의 스승을 자칭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방송에서 쭉 해왔어.”
“아?”
이게 뭔 소리야?
“하지만 거짓말의 한계가 슬슬 드러나면서 네가 필요해졌어. 그래서 조만간 친한 척하기 위해 네가 접근할 거야.”
“만나서 싫다고 하는 편이...”
“편집하면 돼.”
“흠.”
전지은의 말이 진실이란 보장이 없어서 망설여졌다.
“최근에 유일암의 동생 유일충을 때려눕혔지?”
“아...”
정보력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유일암은 그 일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동생과 제자의 대결이란 식으로 방송했어.”
“이 새끼가 미쳤- 어흠! 미안.”
듣고 너무 황당해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안 믿어지면 유일암의 방송 채널에 들어가서 확인해봐.”
“......”
저렇게까지 말하면 정말이리라.
“그리고 유일충의 여자친구이자 여자 태권도 세계 1위, 고윤경 선수랑 내일 대련하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유일암의 방송 채널에서 이미 대대적으로 홍보했던데.”
“......”
기가 막혔다.
“문수에게 필요한 것은 잡다한 문제를 대신 처리해줄 매니저야. 아니면 지금처럼 눈 뜨고 이용당해.”
“나에게 매니저라니...”
일정 관리나 계약 같은 보조적인 업무를 대신 처리하는 매니저.
본업 문제로 자주 선수 활동을 못 한 내게 매니저는 아직 먼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장서연 감독님도 계시고.’
대다수 선수는 감독이 매니저 역할도 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에게 비정상적인 관심을 보이는 유일암이 문제!
기절한 여학생을, 송선영을 발로 걷어찼던 그 남자에게만큼은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그 매니저, 당연히 공짜는 아니겠죠?”
“일단은 맛보기라서 공짜야.”
“아하!”
가만히 듣고 있던 서혜주 과장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수야.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공짜는 없어.”
“백화점에서는 공짜 시식 코너가 있잖아요?”
“그것도 상술이야.”
“차차 고칠게요.”
나도 내 성격이 글러 먹었다는 건 알지만, 공짜를 포기하면 온종일 떠오르면서 후회하고 아쉬워하기에 어쩔 수 없다.
대충 정리됐다고 판단한 전지은이 살포시 웃으며,
슥-
빳빳한 계약서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놨다.
“간단한 계약서야. 문수의 대리인으로서 법적인 문제를 대신 처리하려면 꼭 필요해.”
“...이렇게 전개될 줄 처음부터 예상하고 준비했네.”
“점괘로 봤지.”
그녀의 가문이 어떻게 ‘무당’으로서 높은 신뢰도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알 것 같다.
“그 계약서, 내가 봐도 될까?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쪽에서 문수를 독점하면 곤란하거든.”
서혜주 과장님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네. 천천히 살펴보세요.”
전지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음...”
“어때요?”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다른 협력업체랑 계약할 수 없다는 조항은 너무나 당연하고...”
“저도 볼게요.”
“그래.”
전 수영 감독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나로선 신중하게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내게 불리한 조건도 없고, 따로 돈도 들지 않네? 좋아.’
스슥-
계약서에 서명했다.
“앞으로 나를 소개할 일이 있을 때는 매니저라고 해줘.”
“지은 양. 수완이 좋은걸?”
서혜주 과장님의 말에 그녀는 영업용 미소로 대답했다.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라누벨 환자의 신상정보만 받을 예정이었는데, 어느새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다.
다단계 사기에 당한 기분?
손해가 없어서 딱히 상관없긴 하지만,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본론으로 넘어갈까?”
“...응.”
“가문에 의뢰한 남성의 이름은 마오짜이. 적성은 피아니스트야. 하지만 집안의 재산이 워낙 많아서 적성은 무시한 그는 전통 무술을 배우면서 젊음을 낭비했어.”
“전통 무술?”
“고대 중국의 무술. 그 역사는 상당히 긴 편이지.”
“강해?”
“세계적인 격투 경기에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어.”
“...그렇군.”
젊음을 낭비했다고 표현할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오짜이는 괴짜이긴 해도 평판은 상당히 좋은 편이야. 취미는 고대의 중국 무술 소설 수집.”
“무협지?”
“그쪽을 잘 아는 것 같네. 맞아. 그렇게도 불려.”
무협(武俠) 소설.
고대 중국 ‘무림(武林)’에서 펼쳐지는 무술인들의 사랑과 복수 등을 다루는 대서사시.
이건 환자의 가족들에게 받지 못한 정보였다.
“속였네.”
“뭘요?”
서혜주 과장님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마오짜이의 가족들은 그가 취미로 피아노를 친다고 했었어. 가상현실게임을 가끔 하고.”
“아하!”
전지은이 덧붙였다.
“가상현실게임을 한다는 건 사실이에요. 적성이 피아니스트인 마오짜이는 전통 무술 같은 거친 운동이랑 맞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가상현실게임으로 대리만족을 했는데... 타고난 몸치라서 돈으로 장비를 사서 부족한 실력을 채웠어요.”
“뭔가... 안타깝네.”
하지만 전지은이 수집한 정보 덕분에 이번 환자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걸까?
그녀는 더욱 자세한 정보를 내게 제공했다.
“마오짜이가 가장 아끼는 무협 소설이 있어. 그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가상현실게임의 아바타 이름으로 쓸 정도로.”
“아...”
“그 무협 소설의 제목은 [이 천마 실화냐?]로, 무려 215권이나 되는 장편소설이야.”
“215권...?”
이거야말로 실화냐?
“어떻게 할래?”
“...어쩔 수 없지.”
조금이라도 내 생존율을 높이려면 불평할 수 없다.
게다가,
‘정말로 무협 세계라면...’
그곳에 내가 강해질 수단도 분명히 존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