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83화 (84/232)
  • 083화

    ‘강해져야 해.’

    갑작스럽게 꿈에 빨려 들어간 이번 사태를 겪고 난 후, 나는 진지하게 힘의 필요성을 느꼈다.

    내 오지랖 탓일까?

    이건 하나의 원인일 뿐, 앞으로 어려운 사람을 무시하더라도 꿈에 빨려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너,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표정이 어두워.”

    “괜찮아. 아마도.”

    “내 눈을 보고 말해.”

    송선영의 진지한 눈동자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어흠! 괜찮아.”

    이번 죽음으로 얼마나 약해졌을지는 모르지만, 내 원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틀림없으리라.

    수영, 육상, 태권도.

    세 종목의 올림픽 출전권은 문제없겠지만, 메달을 딸 가능성이 떨어지고 말았다.

    “기껏 시간 내서 도와주러 왔다가 이게 뭔 일이야.”

    “그러게. 괜히 미안하네.”

    “빼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내기나 하자.”

    “설마... 수영? 지금?”

    “왜? 질 것 같으면 미뤄도 돼.”

    “허! 가자!”

    송선영의 도발에 나는 호기롭게 응해줬다.

    * * *

    “그 후에 호기롭게 져서 제가 밥을 샀어요.”

    나는 엘몰랑스 병원에서 정기검사를 받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충격적인 패배.

    적성이 ‘수영선수’이긴 하지만, 연습도 안 한 일반인에게 현역인 내가 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서혜주 과장님은,

    “잘했어.”

    이런 나를 칭찬해줬다.

    “뭘요?”

    “결과적으로 예쁜 여자친구랑 같이 수영하고 밥을 먹은 거잖아?”

    “그건... 하여간 선영이에게 질 정도로 약해졌어요.”

    허무하게 한 번 더 사망하면 올림픽 출전도 위태롭지 않을까?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꿈. 시작 장소도 매우 안 좋았고. 맞지?”

    “네.”

    “그러면 라누벨의 발생 조건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각오할 수밖에 없겠는걸.”

    “라누벨?”

    “아! 말해주는 걸 깜빡했네. 우리는 꿈에 빠지는 이 불치병에 라누벨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어째서 라누벨이죠?”

    라누벨.

    고유명사 같은데,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그 어원을 알 수 없었다.

    “지구의 사회부적응자들을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고 전해지는 여신(女神)의 이름이거든.”

    “아하!”

    지구의 사회 부적응자들을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여신, 라누벨.

    괜찮은 이름 같았다.

    “완전히 파악된 건 아니지만, 라누벨 환자는 전 세계에 약 130명쯤 된다고 추산 중이야.”

    “130명이면 많은 건가요?”

    “적은 편이지. 라누벨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너뿐이고, 치료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편이지만.”

    “흠...”

    130명.

    연금을 노리고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나의 안일한 인생 계획에 의문이 드는 숫자였다.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너는 구세주가 아니야. 의사들처럼 합리적인 치료비를 낸 환자만 상대하면 돼.”

    “.......”

    합리적인 치료비.

    돈을 많이 낸 사람부터 먼저 치료하란 얘기였다.

    “아직은 치료가 불확실해서 구체적인 사업 설명은 하지 않았어.”

    “사업인가요?”

    “사업이지.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사업.”

    서혜주 과장님의 냉소적인 어조는 의사 같지 않았다.

    “불확실하다는 건?”

    “남해수 씨.”

    “아...”

    “사망 당시에 이미 상당한 고령이셨고 유언도 남겼기에 아무도 문제시하지 않았지만, 유일한 치료법이라도 사망률이 높으면 상업성이 없어.”

    “그렇군요.”

    부자를 치료하면 돈을 쓸어 담을 것 같았는데, 서혜주 과장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환자는?

    “네가 실패하면 깔끔히 포기하고 안락사할 예정인 환자야. 부담이 전혀 없지.”

    “아하!”

    “치료 도중에 네가 죽으면 본전도 못 건지긴 하지만.”

    “그건... 제가 잘 해봐야죠. 조사 결과가 나왔나요?”

    “말 나온 김에 의뢰한 탐정사무소에 같이 가볼래?”

    “네.”

    서두를 필요 없다. 의도치 않은 꿈속에 빠져서 죽긴 했지만, 나는 버젓이 살아 있으니까.

    만회할 기회가 아직 있다.

    ‘복수도!’

    갑자기 나타나서 내 허리를 양단한 남자의 잘생긴 얼굴.

    내가 반드시 강해져서 질근질근 밟아줄 것이다.

    * * *

    “과장님. 여기가 어딜 봐서 탐정사무소에요?”

    서혜주 과장님이 의뢰한 탐정사무소는 산속에 있었다.

    소나무, 매화, 대나무, 향나무...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한복판에 작은 호수가 있고, 그 한복판에 커다란 궁궐이...

    탐정사무소보다는 관광지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듯했다.

    “유명한 사당(祠堂)이야.”

    “그건 딱 봐도 알겠네요.”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 관광객,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잘 봐둬. 너의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니까.”

    “무당이요?”

    “적성이 예언가가 아닌데도 미래를 잘 맞추기로 유명해.”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니 유명한 무당이겠지.”

    “아하!”

    예언가는 알아도 바꿀 수 없는 미래만 예언할 수 있다.

    하지만 ‘자칭 무당’은 그런 제약이 없는 대신, 적중률도 형편없어서 반쯤 재미로 점을 본다는데...

    사당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끝도 없었다.

    “엄청나지?”

    “그러게요.”

    “여기서 점을 보려면 예약만 15시간쯤 걸려.”

    “켁!”

    “하지만 나는 인연이 조금 있어서 기다리지 않아도 돼. 그리고 절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영업 비밀도 알고 있지.”

    “......”

    괜히 따라온 기분이 들었다.

    “들어가자.”

    “네.”

    대기열을 감독하는 문지기가 그녀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옆에 분은 일행이십니까?”

    “네. 가주님께 따로 허락을 받진 않았지만.”

    “문제없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우리는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지?”

    “차별하네.”

    긴 줄을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이 우리를 아니꼽게 쳐다봤다. 내가 저들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괜찮나요?”

    “괜찮아. 나는 가주님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니까. 합당한 치료비를 받고 한 일이긴 하지만.”

    “가주님이요?”

    “여기는 대대로 무당의 피를 이어온 가문이야. 그래서 일가족이 모두 무당이지.”

    “무당의 피...”

    국가대표 수영선수 출신이었던 모친 장서연을 따라서 적성이 ‘수영선수’였던 송선영처럼,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적성이 제법 있다.

    부모 중 하나가 농구선수면 자식도 농구선수.

    부모 중 하나가 물리학자면 자식도 물리학자.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 적성을 따질 만큼 무시 못 할 수준이다.

    ‘무당은... 글쎄.’

    내 부모님은 무당이 아니었다. 비슷한 업종도 아니었고.

    친가와 외가는?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참고로, 최강훈이 너를 위해 구매한 부적은 가주님이 직접 만드신 수제품이야.”

    “아아, 그 부적이요.”

    비싸다고 해서 기념품으로 챙겨오긴 했다.

    “맞아. 생각해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 부적은 도움이 됐어?”

    “전혀요.”

    최강훈의 설명에 따르면, 부적에서 튀어나온 수호신이 나를 지켜준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꿈속에서 검귀와 몰랑한 외계생명체만 보았다.

    “그러려니 해. 부적보다 점이 유명한 가문이니까.”

    “네.”

    사당 내부에서는 손님들의 상담과 예약이 진행되고 있었다.

    귀를 열고 슬쩍 들어보니...

    “남편이 언제쯤 주식을 끊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은 하나이신가요?”

    “아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질문은 둘이군요. 비용은 가주님께서 직접 점을 보시는 1등급부터 미숙한 제자들이 훈련을 겸해서 보는 9등급까지 있어요.”

    “...4등급이요.”

    “4등급. 확인했습니다. 이곳에 법적인 이름, 생년월일, 연락처를 정확히 기재해주세요.”

    “네.”

    대충 엿들었을 뿐이지만, 전문성과 사업성이 느껴졌다.

    ‘결과는 어떨까?’

    상담하는 장소의 반대편에서는 연락을 받고 점괘의 결과를 들으러 온 손님들이 있었다.

    “가망이 있습니까?”

    “그분께는 이미 마음에 둔 남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담배를 끊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전에는 그분이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저는 담배 없이는 하루도 못 버팁니다.”

    “점괘는 끝났습니다.”

    “그런...!”

    “8등급의 한계입니다. 다른 질문이 있으시면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점괘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또 소요됩니다.”

    “큭!”

    점괘보다는 인생 상담을 해주는 것 같은 분위기.

    연애, 투자, 건강, 궁합, 수명...

    무려 15시간이나 기다린 손님들의 의뢰는 매우 다양했다.

    ‘이렇게 돈을 벌기도 하는구나.’

    신기했다.

    드르륵-

    사당 안쪽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가장 높은 자리에 왕처럼 앉은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로 우리를 환대해줬다.

    “건강하신 듯하여 저 또한 매우 기쁩니다, 가주님.”

    “안녕하세요.”

    나는 서혜주 과장님을 따라서 눈치껏 인사했다.

    ‘저 노인이 가주인가?’

    그의 좌우에는 비슷한 연배의 노파(老婆)가 둘씩 앉아있었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외모가 젊어졌다.

    가주랑 가장 먼 입구 자리에 유치원생쯤 되는 아이가 방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저 나이에 마음껏 놀지 못하는 모습이 조금 딱했다.

    ‘숨이 막히네.’

    편하게 오래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선생님. 옆의 청년이 혹시?”

    “네. 예전에 의뢰하며 살짝 말씀드렸던 무당입니다.”

    “과연!”

    노인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

    나는 어디까지나 따라온 입장이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아무런 연고(緣故)도 없이 자연에서 태어난 원석이로구나!”

    “......”

    “강문수 후배.”

    “네.”

    “이 늙은이의 제자가- 아니, 후계자가 되어볼 생각이 없는가?”

    “......”

    뜻밖의 제안에 어리벙벙했다.

    “가주님?!”

    “아버님?!”

    당사자보다 놀란 식솔들이 가주를 바라보았다.

    이에 가주는 무척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간단한 부적도 못 만드는 녀석들에게 말할 기회를 준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군.”

    “......”

    “......”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후배여.”

    “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네. 700년 동안 이어져 온 가문의 비전이 나의 대에서 끊기는 것이 두려워서 제안하는 걸세.”

    “......”

    나는 슬쩍 시선만 돌려서 서혜주 과장님을 바라봤다.

    절레절레.

    가주랑 미리 짜고 의도한 전개는 절대 아니라는 의미.

    “물론, 공짜는 아니야.”

    “얼마입니까?”

    700년 묵은 가문의 비전!

    내 허리를 절단한 미남에게 복수할 힘에 굶주린 나로선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후배의 피.”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허허! 많을수록 좋지. 여자는 원하는 만큼 제공해주겠네.”

    “......”

    노인이 말하는 ‘피’가 내 유전자임을 눈치챘다.

    “어떤가?”

    “죄송합니다.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서요.”

    다시 한번 느끼지만, 잘못 따라온 것 같다.

    “...허허! 이 늙은이가 성급했던 것 같군.”

    제안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불쾌감 대신 재미있다는 말투.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사과할 것 없네. 후배의 의견을 존중하지. 자네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어.”

    “......”

    무사히 넘어간 걸까?

    “지은아. 앞으로 나오거라.”

    “네. 가주님.”

    가주의 부름을 받은 여인이 일어나서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마음에 드는가?”

    “......”

    “후배에게 묻는 걸세.”

    “예?”

    “내 증손녀를 어떻게 보는가?”

    “......”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여자를 빌려주겠네. 아니면 후배가 직접 골라보겠는가?”

    “이건 좀...”

    나의 상식과 개념을 초월한 대화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걸 눈치챈 걸까?

    서혜주 과장님이 끼어들었다.

    “가주님. 여유를 잃으시면 병이 재발할 수 있습니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조급했던 것 같군. 의뢰한 신상정보는 증손녀에게 맡길 테니 함께 데려가게.”

    몸을 돌린 증손녀가 잘 부탁한다는 듯이 우리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서혜주 과장님이 내 의견도 안 묻고 가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짜잖아.”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공짜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 성격이 정말 밉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