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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82화 (83/232)

082화

[5장-2절] 원석이로구나!

내 계획에 없었던 즉흥적인 일정이었지만, 육상 100km 마라톤을 위해 준비할 건 딱히 없었다.

기껏해야 운동화 정도?

하지만 모든 운동의 기본인 ‘달리기’를 위해 괜찮은 운동화는 진즉에 구비해뒀다.

그 외에는,

“흠... 물통과 수건 정도인가.”

하지만 웬만한 운동으로는 땀을 전혀 안 흘리는 체질이 된 내게 필요할지는 의문.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탄 송선영이 빠르게 오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어른스러워졌네.’

몸매를 강조한 운동복과 붉게 물들인 입술, 고급스러운 선글라스...

유명한 여성 모델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끼익-

내 앞에서 자전거를 세운 송선영이 인사했다.

“어때?”

...인사가 맞나?

“주어를 빼먹고 물어보면 어쩌라는 거야. 옷이 예쁘네.”

“잘만 알아들으면서 뭐래? 그런데 옷만 예쁘다는 의미?”

“당연히 옷걸이도 포함이지.”

“그러면 오해가 없도록 주어를 빼고 말하란 말야.”

“아하! 그러게.”

내가 전부 잘못했네!

매우 억울했지만, 그녀와 나의 대화는 꿈속에서부터 늘 이런 식이었기에 익숙했다.

그래서 불만?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없어서 매우 유감이랄까.

“고마운 줄 알아. 내 시간은 정말 비싸.”

“와줘서 고마워.”

그러면서 오지 말라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너, 뭔가 달라졌네.”

“내가?”

“응. 전에는 실례되는 소리를 자주 했으니까.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착각하는 중학생 2학년, 비극적인 공주병 환자 취급했잖아.”

“......”

내가 그랬었나?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닌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문수야.”

“응.”

“남해수 씨의 꿈속에서 무슨 경험을 했어?”

“다양한 경험을 했지.”

“그 다양한 경험에 여자도 있는 건 아니겠지?”

“...없었습니다.”

땀을 안 흘릴 줄 알았는데, 수건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정말로?”

“네. 정말로 없었습니다.”

“......”

“......”

“일단은 믿어줄게.”

의심의 눈초리를 뗀 송선영이 선심 쓰듯 말했다.

‘몸만이 아니네.’

꿈속의 경험이 내 정신이나 언행에도 영향을 주는 듯했다. 그게 좋든 나쁘든 간에.

내가 ‘무당’을 그만두지 않는 한,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리라.

“갈까?”

“응.”

나는 두 발로, 송선영은 자전거로 100km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뛰는 법, 체력 분배, 호흡법...

이미 남해수의 꿈속에서 전부 배웠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안 힘들어?”

“전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송선영의 질문에 편하게 대답했다.

“이러니 내가 졌지.”

“또 시합해볼래?”

“내가 이기면 뭘 해줄 건데?”

“딱히...”

“빠르나루 레스토랑에서 2인 세트를 사줘.”

“켁!”

비싸기로 악명 높은 식당에서 혼자 2인분을 먹겠다고?

그녀의 악랄한...

“지면 내가 살게.”

“좋아!”

그녀의 선량한 기부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하겠다!

“뭐야, 그 미소. 건방져. 벌써 이겼다는 얼굴이네.”

“당연하지! 나는 현역이라고?”

적성은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장식에 지나지 않으니까. 수영복 모델에게 질 리 없다.

“종목은 자유형 100m.”

“그래.”

지구력이 약한 송선영다운 판단이었다.

내 주요종목은 10km, 4000m 같은 장거리지만, 괴물 같은 기량을 보유한 1군 선수들이랑 비교해서 느리다는 의미일 뿐.

모델에게 질 수준은 아니다.

탁탁.

“그나저나... 지금도 안 힘들어?”

“안 힘들어.”

가볍게 산책하듯 잡담을 나누고 있지만, 우리는 육상 100km 마라톤 기록을 측정하는 중이다.

입을 다물고 집중하면 조금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겠지만, 공식 경기도 아니기에 진심으로 달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기회일지도?’

꿈속에서 사귀었다가 현실에서 차인 여자애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예전에는 우리의 관계를 조금 편하게 생각했었는데, 그녀에게 ‘레온’이란 왕자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초조해졌다.

“문수야. 기억해?”

“뭘?”

“꿈에서 깨어난 후에 병원 산책로에서 내가 한 말을...”

“선영아! 잠시만!”

“......”

남해수가 고용한 저격수들에게 시달린 뒤부터 수시로 주변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 내 감시망에 엽기적인 광경이 딱 걸렸으니!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카, 칼 치워!”

공원의 가로수길.

식칼을 역수로 쥔 20대 중반의 남성이 비슷한 또래의 여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

“대화로 해결하세요!”

“학생! 일단 진정하고...!”

막다른 벽에 몰린 여성은 도망가지 못하고, 목격자들은 남성이 쥔 식칼 때문에 말리지도 못하는 상황.

대낮에 이런 일이?

나는 사람의 목숨이 걸린 그 현장을 향해 돌진했다.

“온종일 너를 생각하는 나를 버리고 그 새끼에게... 용서 못 해!”

“미, 미쳤어?! 당장 물러서!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

“이미 늦었어! 같이 죽-”

빠각!

겁에 질린 여성을 향해 식칼을 높이 치켜든 남성의 정수리를 발꿈치로 찍었다.

반응할 틈도 안 주고 순식간에!

총기로 무장한 흉악범들이랑 비교하면 식칼은 애교다.

“문수야!”

“나는 괜찮아.”

“너 말고. 예쁜 여성분.”

“...괜찮지 않을까?”

한 박자 늦게 따라온 송선영의 걱정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남성에게 한순간 붙잡힌 손목이 빨갛게 붓긴 했지만, 뽀얀 피부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으니까.

다만,

“안 일어나는데?”

송선영의 지적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은 여성은 공원 잔디밭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흠... 성급했나.’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운동선수가 일반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공정한 재판관이 어련히 잘 해결해주겠지만,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는 후회와 반성을 살짝.

“괜찮겠지.”

가벼운 뇌진탕이나 정신적인 충격이 원인이리라.

“예뻐서 구해준 거야?”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여자 보는 눈이 높은데.”

“정말로 아니야?”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음? 너? 그때는 학교 옥상에서...”

* * *

송선영의 질문에 대답하던 내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비포장도로, 기와집, 명주옷...

역사박물관이나 민속촌에서 볼 수 있는 건축 양식과 복장의 인간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경비병.

“누구냐!”

“침입자다!”

척! 척! 척!

조잡한 창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항복할까? 도망칠까?’

고민은 짧았다.

탁.

달리기에 자신 있는 내가 위험한 도박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장소도 좋지 못했다.

“꺅!”

“도둑이야?!”

상당한 미모의 소녀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손에는 걸레와 빗자루 같은 청소도구를 들고 있었다.

‘하녀? 아니.’

궁녀(宮女).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들.

단정하긴 이르다. 하지만 건축물의 화려함과 규모, 사람들의 중후한 복장과 청결함...

여러 방면에서 이곳이 평범한 장소가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멈춰라!”

“흠. 창 좀 빌릴게요.”

“아악?!”

나에게 겨누어진 창끝을 피하면서 병사의 손을 걷어찼다.

부웅~ 덥석!

주인의 손을 떠난 창을 낚아챈 후에 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아악?!”

“컥?!”

그리고 직진 방향을 담장이나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으면?

탁.

우회하지 않고 장대높이뛰기로 뛰어넘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람.”

길은 모르지만, 장애물을 무시하면서 한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을 터.

시작 장소가 좋지 못했다.

‘예상도 못 했고!’

스토커에게 생명을 위협받는 여성을 구했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꿈에 빨려들 줄은 몰랐다.

댕댕댕!

다급히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아라!”

“문을 닫아라!”

끼익- 쿵!

장대높이뛰기로도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의 성벽.

유일한 출입구는 내 눈앞에서 닫히고 말았다.

챙! 챙! 챙!

“이젠 도망 못 친다!”

“정체를 밝혀라!”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온 병사들에게 미안하지만,

“...뚫으면 그만.”

거친 전투로 창끝이 무뎌질 때마다 빠르게 바꿔가면서 병사들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다른 길을...’

피옹!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숙인 머리 위로 화살이 지나갔다.

“히이잉~!”

“히잉~!”

말을 탄 자들이 보인다. 그들의 손에는 활이 들려 있었고...

‘궁기병?!’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병종.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말 위에서 내게 활을 쏘는 기예마저 선보였다.

피용-!

그런 와중에 명중률도 매우 높아서 화살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미치겠네!”

따라잡을 수 없는 말을 탄 채로 멀리서 활을 쏘는 궁기병.

역사책을 통해 그 무시무시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비켜!”

평지로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성벽을 오르는 계단으로 뛰어갔다.

“히이잉~!”

“히잉~!”

내 예상대로, 계단을 오를 수 없는 궁기병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성벽을 오르는 내게 활을 쐈다.

“실례.”

“켁?!”

왼손으로 목을 움켜쥐며 들어올린 병사를 방패로 삼았다.

푹! 푹! 푹!

여기에 덤으로, 인간의 영역을 살짝 벗어난 나의 반사신경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전부 피했다.

“내가 상대-”

푹!

호기롭게 나섰다가 내 창에 목이 꿰뚫린 장수가 쓰러졌다.

그리고 떨어트린 칼.

“좋아.”

군대에서 잠깐 배운 창술보다는 발렌타인에게 오랫동안 배운 검술에 더 자신 있으니까. 공간이 좁을수록 짧은 무기가 유리하기도 하고.

댕강! 서걱!

가로막는 모든 적을 베어내면서 성벽 위를 질주했다.

‘슬슬 포기해주면 좋을...’

챙!

처음으로 칼날이 막혔다.

“누구?”

“너, 제법인데?”

내 질문에 엉뚱하게 대답한 남자는 지금까지 상대해온 정규군 소속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 혹은 도적으로 보이는 개성적인 복장.

젊고 잘생긴 얼굴!

느긋하게 상대해줄 마음이 없었던 나는 재차 칼을,

서걱-

“어...?”

“하지만 그뿐이야.”

정체불명의 남자가 휘두른 칼질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털썩.

‘이 무슨...’

허리가 절단되며 어이없게 죽었다.

* * *

“문수야? 문수야?”

“...응.”

피로 얼룩진 성벽의 바닥 대신 푸른 하늘이 보였다.

“휴! 다행이야! 또 잠든 줄 알고 과장님께 연락했거든.”

“과장님이면... 서혜주 과장님?”

“응. 맞아.”

잔디밭 위에 드러누운 내 옆에 다소곳이 앉은 송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통을 건냈다.

“마실래?”

“별로...”

“마셔. 더위 먹은 게 틀림없어.”

“응.”

나는 군말 없이 그녀가 건네는 물을 마셨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진 기분.

이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리라.

‘어이없게 죽었네.’

오래 잠들지 않았기에 재활은 필요 없지만, 사망으로 육체 능력은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기절했어?”

“5분쯤?”

“그렇구나.”

내가 구한 여성은 아직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녀를 식칼로 위협한 남성은 경찰관들에게 포박되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삐옹! 삐옹!

공원의 길가에 서혜주 과장님이 보낸 응급차가 멈췄다. 그리고 우르르 내리는 간호사와 의사...

덤으로 본인까지.

“어라? 잠든 게 아니었어?”

멀쩡한 나와 송선영을 발견한 서혜주 과장님이 물었다.

“바로 깨어났어요.”

“...그랬구나. 뇌세포가 얼마나 죽었는지 확인해봐야겠는걸.”

내가 꿈속에서 죽었음을 눈치챈 그녀는 후유증을 걱정했다.

“저보다 저쪽을 봐주세요.”

나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20대 여성을 가리켰다.

“운이 안 좋았네.”

“그러게요.”

지나가는 길에 구해준 민간인이 꿈에 빠질 줄이야!

어이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도된 우연이 아니라면 말이지.’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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