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실례했습니다.”
“수고하세요.”
경찰관들이 수사 협조에 감사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을 따라온 태권도 관계자와 체육관 관리인들도 포함해서.
“휴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좋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제,
“문수야?”
“네.”
장서연 감독님과 나만 남았다.
“내가 태권도 실력을 확인하러 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건 실력을 확인하는 수준이 아니잖니!”
“흠. 제 예상보다 선수들의 실력이 떨어지더라구요.”
정말이다.
남해수의 꿈에서 내게 태권도를 가르쳐준 고무신 관장님이랑 비교하면 세계 2위도 어린애 수준!
그에게 붙은 무신(武神)이란 별명은 과대평가가 아니었다.
“하아... 앞으로는 무슨 일을 저지를 거면 자세하게 얘기해줘.”
“네.”
“약속?”
“약속할게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남해수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올라가겠다.
‘그 실력 자체가 사기적인 편법 같긴 하지만!’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흘러가는 꿈속에서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면 현실에 일부 반영되니까.
그 대신, 죽음도 ‘일부’ 반영된다는 위험부담이 있지만, 내 의지를 꺾기에는 약했다.
“그러면 바로 확인 질문. 어제 병원에 가서 서혜주 과장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니?”
“새로운 환자에 대해서요.”
“그 환자도 선영이나 남해수 씨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네. 3년 됐다고 해요.”
“저런... 3년이나...”
자신의 딸도 겪었던 불치병이었기에 장서연 감독님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현재는 환자의 신상정보를 조사하는 중이에요.”
“그 뒤에는?”
“......”
“설마, 또 꿈에?”
“아마도요.”
“하아... 또 한동안 월급 도둑이란 소리를 듣겠네.”
장서연 감독님이 푸념하며 푹신한 소파에 드러누웠다.
월급 도둑.
담당하는 선수가 나뿐이니까. 내가 꿈속에 있으면 딱히 할 일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좋잖아요?”
“안 좋아. 처음에는 좋았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더라.”
“지루해서요?”
“내 따님이 귀찮게 해.”
감독님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렇군요.”
“...어째서 귀찮게 하는지는 안 물어보니?”
“어련히 이유가 있겠죠.”
꿈에서 여자친구였던 동급생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질 만큼 나는 변태가 아니다.
그곳은 단 둘뿐인 무인도.
현실은 ‘레온’이란 왕자처럼 나보다 멋진 사내가 많다.
“하아... 갈 길이 머네.”
“월급은 신경 쓰지 마세요.”
“하아...!”
“아무튼, 제가 자는 동안은 엘몰랑스 병원에서 신변을 지켜주기에 안전하겠지만, 외부적인 문제는 부탁드릴게요.”
“언론사나 경찰 같은?”
“네.”
“그건 걱정하지 마렴. 할 수 있는 만큼 해볼게.”
“감사합니다.”
대충 이야기가 정리됐다.
아침부터 기자와 경찰들이 찾아와서 살짝 놀라긴 했지만, 남해수의 꿈속에서 내가 받은 주목도랑 비교하면 아직 애교 수준.
‘맞아. 갈 길이 멀지.’
장서연 감독님의 푸념처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감독님.”
“다른 부탁이 있는 얼굴인걸.”
“네. 현재, 제 올림픽 종목은 수영 4000m, 수영 마라톤 10km잖아요?”
“그렇지.”
“2000m, 1000m, 300m, 100m도 해보고 싶어서요. 다른 1군 선수들의 기록이랑 비교해주세요.”
“2000m는 가능. 하지만 나머지는 무리.”
“......”
부탁하자마자 돌아온 답변.
장서연 감독님이 바로 부연설명에 들어갔다.
“내가 안 알아봤을 리 없잖니?”
“다리의 힘이 좋아졌잖다고 들었는데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크롤 영법은 팔의 힘이 더 중요해.”
“그건... 그렇죠.”
다음 꿈속에서 팔굽혀펴기를 열심히 해야 할까?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1000m는 1군 선수랑 성적이 엇비슷하니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서 문제지.”
“아하!”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2000m 자격심사를 너랑 상의한 후에 신청할 생각이었거든.”
“이쪽은 어때요?”
“운이 좋으면 동메달.”
“흠...”
“실망하지 마. 그 동메달도 못 따서 남편에게 구박받으며 사는 선수도 있잖니.”
“죄송합니다.”
장서연 감독님, 본인의 얘기였다.
“어머! 어른스럽지 못했네. 사과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 오해하면 안 된다?”
“네.”
“수영 4000m는 확실한 금메달. 수영 마라톤 10km는... 네가 은퇴할 때까지 금메달 확정.”
“그렇겠죠.”
마라톤은 체력이 무제한에 가까운 내가 독보적으로 유리한 종목!
감독님이 덧붙였다.
“예전에 제안했었는데, 육상 마라톤도 해보는 게 어떠니?”
“좋습니다.”
올림픽 메달은 많을수록 좋았기에 시원하게 대답했다.
육상 100km 마라톤.
구시대의 2배가 넘는 거리만 보더라도 현시대의 운동선수가 얼마나 괴물인지 알 수 있다.
P의 적성검사기로 검증된 선수.
P의 적성검사기로 검증된 감독.
그리고 P의 적성검사기로 검증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개발한 운동복과 영양제...
평균 수준이 다르다.
“육상 마라톤을 전문으로 하는 감독을 알아봐 줄까?”
“아뇨. 저의 특기인 지구력으로 찍어 누를 겁니다.”
“하긴.”
내 체력을 잘 아는 감독님은 바로 수긍했다.
“감독님.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실력을 증명하는 편이 빠르고 뒷말도 안 나오겠죠?”
“기다려. 내가 학장님께 이야기해볼게.”
“학장님이랑요?”
여기서 갑자기 체육대학교 학장님이 나오는 이유가 뭘까?
“문수는 학생이 아니잖니.”
“뭐... 그렇죠.”
“내가 전 감독의 계약서를 살펴봤는데, 갱신이 1년 주기더라고.”
“맞습니다.”
“문제는 이 계약서가 빈틈투성이라는 거야.”
“...그럴 리가요.”
내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본 바로는 전 감독이 사기를 친 부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장서연 감독님이 말했다.
“전 감독이 해고되면서 네가 계약서를 갱신할 의무가 사라졌어.”
“아!”
“그리고 애초에 이 계약서, 문수는 수영선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네. 내 말이 맞지?”
“어떻게 아셨어요?”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된 나는 직장이 생길 때까지만 공짜로 숙식을 해결할 목적이었다.
‘지금은 다르지만!’
당시에는 내가 1군 선수들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적당히 노력하는 척하다가 탈주할 계획이었지.
“계약 갱신의 선택권이 감독에게만 있으니까.”
“그게 이상한가요?”
“선수의 이적을 막는 예방책 중 하나이긴 해. 하지만 대우가 형편없어져도 네 마음대로 떠나지 못해.”
“그때는 대충하면서 공짜 숙박만 이용해야죠.”
“그래도 안 놔주면?”
“......”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잘 들으렴. 너에게 재능이 없다면 나쁘지 않은 계약이야. 입학도 하지 않은 학생에게 공짜로 여러 편의를 봐주니까.”
“흠...”
“하지만 너의 재능이 판명되면 상황이 달라져. 네가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기존의 계약을 파기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상황이지.”
“...그렇겠네요.”
태권도와 육상 마라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계약.
사회에서 한 번의 잘못된 선택과 판단이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음부터 계약서를 쓰거나 결정할 때는 나랑 무조건 상의하렴. 문수는 선수야. 감독은 선수가 훈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직업이고. 감독을 활용해.”
“네.”
“문수는 운이 좋았어.”
“제가요?”
“네가 실력을 증명하면서 국제수영연맹은 전 감독을 복귀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어.”
“헛! 그러면...”
“맞아. 내가 말한 계약서의 허점이 사라지지.”
감독이 원하면 나는 1년마다 무조건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지금은 전 감독의 잘못이 커서 부르지 못하지만, 여론이 잠잠해져서 잊힐 때쯤. 그러니까...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1년을 넘기 직전에 조용히 복귀할 예정이었지.”
“전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그런데 감독님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셨어요?”
“너를 자식처럼- 아니, 자식 이상으로 이뻐하는 박한희 여사님께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려.”
“아...”
이런 식으로 보답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사님이 연맹의 계획을 사전에 차단하셨어.”
“다행이네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위험했네!’
꿈에서는 한없이 대범한 나도 현실에서는 평범한 인간.
하나뿐인 인생은 실패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남해수처럼 평생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 전 감독이 해고에서 근신으로 바뀌었어. 연맹에서 여사님의 뜻을 무시하고 복귀시킬 수도 있으니까.”
“......”
“그래서 내가 학장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도 해.”
“마라톤이 아니었어요?”
“그것도 포함해서. 네가 선수 생활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압박할 거야.”
“그래도 돼요?”
“돼. 네 적성은 무당이니까.”
“아하!”
“계약서에 묶여서 선수 생활은 못 하겠지만, 애초에 선수는 부업이잖아? 본업인 무당에 좀 더 집중한다고 하면 꼼짝 못 해.”
“설명해도 밀어붙이면요?”
“그때는 여론전이지. 올림픽에 출전하면 금메달이 확실한 선수를 연맹과 학교에서 죽였다고.”
“아하!”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을 다시 보게 됐어요.”
송선영의 모친, 몸매에 자신 있는 아주머니 정도로 생각했다.
수영 실력은 덤이고.
“고마우면 육상 100km 마라톤 기록을 빨리 측정해줘.”
“네. 가장 빠른 마라톤 대회를 알아보고 참가할게요.”
“늦어. 학장이랑 오늘 저녁에 만날 예정이야.”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마라톤 대회가 없는데?
“기다려봐.”
“네? 네.”
스마트폰을 꺼낸 장서연 감독님이 어딘가로 빠르게 전화했다.
띠리링~♪
「엄마. 왜?」
스마트폰에서 송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딸. 바쁘니?”
「바쁘긴 한데... 엄마랑 잠시 통화할 시간은 있어.」
“부탁할 게 있었는데, 바쁘면 안 되겠네.”
「엄마야말로 일할 시간에 통화해도 괜찮아? 또 월급 도둑이란 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
“답답한 따님이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끊는다.」
“끊으면 후회할걸.”
「뭔데?」
“문수가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감독님?”
저는 그런 무서운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어쩔 수 없네.」
“바쁘다며?”
「언제까지 어디로 가면 돼?」
“기다려. 문자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게.”
뚝.
통화가 종료됐다.
“감독님?”
“나는 약속이 있어서 지금부터 태권도 도장에 가봐야 하거든. 그래서 육상 100km 마라톤은 선영이가 도와줄 거야.”
“선영이가요?”
“응. 무슨 문제라도?”
“저 때문에 일하는 중인 바쁜 딸을 부르시는 건 좀...”
“괜찮아. 엄살이야. 옆에서 들었잖니? 바로 온다고.”
“그렇긴 한데...”
정말로 괜찮은 걸까?
감독님이 장난스럽게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얼른 탈의실에서 활동복으로 갈아입으렴. 운동화도 꼭 챙기고.”
“그... 네.”
“선영이가 와서 싫어?”
“아뇨.”
“그러면 뭐가 문제니?”
“......”
나도 모르겠다.
“세세한 준비는 내게 맡기고 문수는 씻고 향수라도... 아! 없겠구나. 별로 중요한 건 아닌데, 내 딸은 히아신스 향을 좋아해.”
“히아신스?”
“꽃의 이름이야.”
“그렇군요.”
송선영이 좋아하는 향수.
히아신스.
이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정보라고 머릿속에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