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아윽...!”
빡!
세계 태권도 공식서열 2위의 정수리에 내 왼발 뒤꿈치가 박혔다.
두개골이 울리는 소리.
그러나 비틀거리긴 해도 아직 쓰러지진 않았다.
“버텨?”
2위는 확실히 다르군.
하지만 남들처럼 한 방에 쓰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퍽!
허리가 접히면서 상체를 숙인 2위의 얼굴에 앞차기.
‘잘생긴 코뼈는 봐주마.’
내가 진심으로 걷어차면 일반인보다 몸이 튼튼한 선수라도 죽을 수 있기에 살살 했다. 다음 올림픽 국가대표 후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정당해도 1군 선수들을 전부 중환자실로 보내면 비난을 피할 수 없다.
“1위는 누구인가요?”
“......”
“......”
내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구경꾼이 없었다.
“없나요?”
“1위는 외국인이라...”
“아하!”
긴장감이 전혀 없었던 대련.
처음에는 이길 때마다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약자를 괴롭힌 것 같은 찜찜함밖에 없었다.
‘자, 이제...’
관장의 평가를 들어보자.
“너는 정체가 뭐냐, 그 반응속도와 순발력은 대체...?”
구시대에는 태권도 선수가 나이를 들면 사범, 개인 도장을 차릴 능력이 되면 관장이 됐다.
하지만 P의 적성검사기가 등장한 뒤부터 태권도도 전직 선수 대신에 전문적인 교육자가 생겼으니!
선수랑 차이?
내가 수영선수로 활동하면서 느낀 가장 큰 차이는 ‘관찰력’이다.
“관장님. 벌써 잊으셨나요? 무당입니다.”
“무당이 어떻게...!”
“귀신을 잡는 무당이 인간보다 약할 리 없잖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유일충의 형인 유일암 씨도 무당이지만, 너처럼 괴물은 아니었어!”
관장은 격렬하게 부정했다.
눈치 챈 것이리라.
자기가 키운 자랑스러운 제자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나에게 패배한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분이랑 비교하지 마세요. 저보다 먼저 무당이 되셨기 때문에 선배라고 예의상 칭했을 뿐입니다.”
“허...”
“다른 선수들의 훈련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올림픽 참가만 보장해주신다면.”
“...못 해주겠다면?”
“수영선수에게 졌다고 사방에 소문낼 겁니다.”
“무당이라며?”
“그러면 무당에게 졌다고 하죠. 무당은 운동선수가 아니라서 그쪽이 더 타격이 클 것 같지만, 관장님이 원하신다면-”
“하지 마!”
협상이 평화롭게 진행됐다.
올림픽 국가대표 확정!
그때, 내게 처맞은 얼굴 부위가 퉁퉁 부은 유일충이 외쳤다.
“너는 고윤경이랑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고윤경?”
“그래!”
“여자 이름 같은데.”
“맞아! 내 여자친구지! 고윤경은 여자 태권도 공식서열 1위다!”
“여자잖아.”
“성차별하는 거냐!”
“죽을래? 선동하지 마. 여자는 여자들끼리 대결한다는 의미였어.”
고윤경.
얼마 전까지 태권도에 관심 없었던 나로선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여자 태권도 공식서열 1위.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남자 2위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내게 패배했다. 그런데 여자 1위라고 결과가 다를까.
그런데,
“맞아. 고윤경 선수라면...?”
“일충의 여자친구가 있었네!”
“고윤경은 못 이기지.”
나에게 패배한 선수들이 유일충의 주장에 동조하는 게 아닌가!
허세로 보이지 않았다.
“강문수 선수.”
“네.”
더는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관장이 나를 불렀다.
“인정하지. 자네는 강해. 하지만 고윤경은 더 강하지. 여자 1위? 틀렸어. 그 아이는 세계 1위야.”
“......”
“대련해보겠는가?”
“아뇨.”
나는 고민 없이 바로 거절했다.
“도망치는 건가!”
“관장님이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죠. 저는 불필요한 폭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허! 선수들을 저 꼴로 만들어놓고 폭력을 싫어해?!”
관장이 격분했다.
“폭력이 싫다고 제가 처맞을 순 없잖아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큭!”
“하실 말이 없으면 저는 이만...”
“잠깐!”
“......”
아직 포기하지 못한 관장이 또 나를 불러세웠다.
“필요하다면 어쩔 거냐?”
“도발해도 소용없어요. 여자 태권도 1위를 이겨서 저에게 무슨 득이 있는데요? 여성을 때렸다는 비난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지.”
이겨도 손해.
지면 더욱 손해!
나아게 아무런 이득이 없다.
“강문수 선수. 태권도 몇 단이지?”
“아직 없습니다.”
“이런! 이걸 어쩌나? 올림픽은 태권도 2단부터 참가할 수 있는데!”
“......”
남해수의 꿈에서는 이런 규칙이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새로 생긴 걸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국기원에서 1단 시험을 보려면 입문한 날부터 1년. 그리고 2단 시험 자격을 얻으려면 다시 또 1년을 기다려야 해.”
“...그래서요?”
“자네가 고윤경 선수를 이기면 다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손을 써주지.”
“불법으로요?”
“합법으로.”
“흠...”
나에게 어떻게든 1패를 안겨주고 싶어 하는 관장과 선수들.
내 실력을 봤음에도 ‘고윤경’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들의 태도 때문에 없던 흥미가 생겼다.
‘얼마나 강하기에?’
과대평가나 허풍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좋습니다.”
“잘 생각했어!”
“그런데 고윤경 선수의 의견은 안 물어봐도 됩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남자친구를 저 꼴로 만든 자네를 가만히 놔두겠는가?”
“아하!”
유일충이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선약이 있어서 대련하기 힘든 날을 말해주게.”
“지금은 안 됩니까?”
“고윤경 선수는 친척이 운영하는 태권도 학원에서 주로 훈련하기 때문에 약속을 잡아야 해.”
“바쁘군요.”
“그래도 남자친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달려올 거야.”
“하루 전에만 알려주세요, 문자나 전화로.”
“오! 금방 연락하지!”
“...잠시만요.”
“왜?”
내 스마트폰에 서혜주 과장님의 문자가 쌓여있었다.
「부재중 통화: 3건」
「서혜주: 내가 예전에 말했던 환자를 혹시 기억해?」
「서혜주: 부원장이 나에게 또 떠넘기려고 해.」
「서혜주: 살려줘!」
“...저도 바빠질 것 같아서요. 시간이 비는 날짜를 적어서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방침이 바뀌었으니까.
‘새로운 환자는 무조건 환영이지!’
* * *
태평양 한복판으로 합숙 훈련을 떠나기 며칠 전, 서혜주 과장님에게 부탁을 받았었다.
환자가 잠든 기간은 약 3년.
그동안 세계의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다가 똑같은 증상의 환자(최강민)가 치료됐다는 소식을 듣고 엘몰랑스 병원을 찾아왔다고...
“해볼래?”
“네.”
“...변했네. 아직 구체적인 치료비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서혜주 과장님이 나를 수상하게 쳐다봤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돈으로 환자를 가릴 순 없죠.”
“솔직하게 말해도 돼.”
“꿈에서 쌓은 경험이 현실에 일부 반영되는 것 같아요.”
당장은 감출 수 있더라도, 동업 관계인 그녀에게 언젠가는 들킬 것 같았기에 바로 가르쳐줬다.
“...정말로?”
“네. 어제 올림픽 국가대표 태권도 도장을 찾아가서 모든 선수를 때려눕히고 왔어요. 모두 한 방- 아! 세계 2위는 두 방이었네요.”
“꿈속에서 전설적인 태권도 선수에게 배웠다고 했었지?”
“배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처맞았습니다.”
고무신.
구시대의 조금 실력 있는 태권도 선수라고 생각했었는데, 남해수의 꿈에서 나온 뒤에 재미로 조사해보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올림픽 금메달은 딱 하나.
하지만 그에게 날마다 지면서 배운 제자들이 역대 올림픽 금메달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참 달라.’
남해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밀어낸 후에 올림픽 메달을 독식했다.
하지만 고무신 관장님은 실력이 있음에도 명예와 연금을 내려놓고, 후학 양성에 평생을 매진했으니...
그는 발 냄새 빼고는 흠잡을 게 없는 위인이었다.
“너를 사위처럼 아끼는 감독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꿈에 들어가기 전보다 눈에 띄게 성적이 올랐죠.”
“그 대신에 꿈에서 죽으면 눈에 띄게 하락하고. 맞지?”
“맞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서혜주 과장님은 이해가 매우 빨랐다. 아니면 내가 말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었던가.
뭐든 간에 나로선 편했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그렇죠. 꿈속에서 죽으면 본전도 못 건지니까요. 시간 버리고, 능력 버리고...”
도박성이 조금 짙었다.
“난감한걸. 환자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만 알 수 있어도 위험도가 대폭 낮아질 텐데.”
“그러게요.”
“막말로, 마법소년 최강민처럼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괴물이랑 마주치면 꼼짝없이 죽잖아.”
“어?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의사는 자신의 의료도구를 소중히 다루는 법이야.”
“아하!”
의료도구.
틀린 표현은 아니다. 환자가 안 깨어나는 원인을 알아도, 내가 빠지면 치료할 수 없으니까.
“흠... 너의 안전을 위해 탐정을 고용해야겠는걸.”
“탐정이요?”
“남해수 씨처럼 겉과 속이 다른 환자를 또 만날 수도 있으니까. 뒷조사를 제대로 해둬야지.”
“좋은 생각이네요.”
환자에게 어떤 후회나 불만이 있는지 파악하면, 꿈의 세계관과 환자의 목적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내 능력의 정보가 쌓이면서 조금씩 체계가 잡히는 기분.
마음에 든다.
“말 나온 김에 이번 환자부터 제대로 뒷조사해볼까?”
“네.”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 *
수영선수로 시작한 내가 국내 태권도를 사실상 제패(制霸)!
내 실력을 시험하기 위한 비공식 대련이었다고 해도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강문수 선수! 잠시만요!”
“태권도는 언제 배우셨습니까?”
“소문이 사실인가요?”
“잠시만 시간을...!”
체육대학 기숙사 출입구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기자들이 질문하면서 가르쳐줬다.
‘이건... 익숙한 풍경이네.’
남해수의 꿈속에서 펜싱과 수영 국가대표선수들을 이겼을 때도 주목을 받았으니까.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들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5분 뒤에 훈련이 있어서 빨리 가보겠습니다.”
“강문수 선수~!”
“헛! 강문수 선수?!”
휙~
마음먹고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나를 둘러싼 기자들이랑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목적지는 체육대학 수영장.
평소에는 아침 운동으로 체육대학 주위를 크게 1바퀴 돌고 들어가지만, 오늘은 생략했다.
그랬는데,
“강문수 선수다!”
“헛! 강문수 선수~!”
“잠시만 대화를...!”
수영장이 있는 체육관 앞에도 나를 기다리는 기자들이 있었다.
‘아주 난리가 났네!’
언젠가는 소문이 날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의 추적을 피해서 거의 이용되지 않는 체육관 뒷문으로...
“문수야!”
“오! 감독님. 바빠 보이시네요.”
“알면 좀 도와줘!”
담당하는 선수와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감독의 개인실.
적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하는 장서연 감독님의 개인실에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다.
경찰관, 체육관 관리인, 태권도 사부, 수영 감독, 태권도 선수...
직종도 다양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문수 선수입니까?”
“네.”
경찰관은 혼성 2인조였는데, 장서연 감독님이랑 대화 중인 여성 뒤편에 있었던 남성이 내가 다가와서는 사무적으로 질문했다.
“어제 이 대학의 태권도 선수 4명을 때려눕히셨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나는 태권도 도장에서 봤던 감독과 선수를 힐끔 쳐다보며 답했다.
“합의된 대련이기에 강문수 선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불안하게 왜 오셨나요?
“번거로우시더라도 양해 부탁합니다. 대련을 악용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아, 네.”
바로 이해했다.
P의 적성검사기는 운동선수의 육체적인 능력만 보니까. 도덕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살인, 성매매, 폭행, 마약, 음주운전, 욕설, 도박...
그래서 선수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감독들이 항상 감시하고 있다. 감독이 선수의 부모처럼 인성 교육도 하는 셈.
반면에,
“가장 많이 접수되는 민원이 선수들의 폭행입니다. 선수들은 살짝 건드렸다고 항의하지만, 그 살짝도 일반인은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네. 주의하-”
“그리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 있습니다. 강문수 선수가 먼저 태권도 도장을 찾아가서 도발했다는데, 맞습니까?”
“그... 네.”
“이 경우에는 합의됐더라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태권도 실력 검증이란 명분이 있어서 조용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주의하십시오.”
“......”
경찰관은 책임과 청렴 같은 정신적인 지표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건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입니다만...”
“네.”
“편의점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던 청년이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봐서 매우 뿌듯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
“네?”
“강문수 선수는 올해로 20살이 될 텐데요. 그런데 제가 그 편의점에서 당신을 본 것은 상당히 오래전의 일입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몇 살부터 시작했습니까?”
“......”
‘감독님! 저 좀 살려줘요!’
내 인생의 위기가 정말 뜬금없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