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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78화 (79/232)
  • 078화

    “무당... 사주를 보기 위해 몇 번 만났었지요.”

    “그분들이랑 저는 다릅니다.”

    귀신을 잡는다며 송선영을 발로 차던 무당 유일암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진짜 최악이었지!’

    유일암은 또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 1순위다.

    “그런 것 같네요. 내가 지금까지 만난 무당들은 남편의 겉모습에 속았으니까요.”

    “......”

    대화에 호응하지 않았다. 박한희 여사가 오른발을 의식하면서 진의를 파악할 수 없게 됐으니까.

    내 패(牌)를 너무 빨리 보여줬다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당신이 본 남편은 어떤 사람 같던가요?”

    “애국심이 강하셨죠.”

    “제대로 봤네요. 그러면 정치를 해보라고 제안했지만, 그건 또 싫다고 했지요.”

    “과거가 떳떳하지 못해서 힘들었을 겁니다.”

    구시대의 정치는 그랬다.

    대통령, 장관, 시장, 국회의원...

    정치인으로 눈에 띄게 활동하지만 않으면 범죄나 비리를 제대로 수사받지 않는다.

    ‘남해수는 못 하지.’

    공중파를 탄 가수와 배우가 학창시절에 친구를 괴롭힌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어 퇴출당하듯이.

    남해수도 수영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이 세상에 공개되면 파멸!

    그래서 덮어둔 죄가 많은 그는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모르는 게 없군요. 맞아요. 남편은 비밀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꼭 확인하고 싶으신 진실이 있으신 겁니까?”

    “맞아요.”

    박한희 여사는 순순히 시인했다.

    비밀이 많은 남편.

    장례식 내내 흔들림 없던 그녀의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남편의 재산보다 이쪽을 훨씬 신경 쓰고 있었다는 의미.

    죽을 때까지 감춘 비밀이란?

    심지어 가족도 아닌 생판 남에게 그 비밀을 맡겼다.

    ‘신경 쓰일 수밖에.’

    내가 그녀의 입장이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

    “남해수 씨는 저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셨죠.”

    “그래서 못 보여준다는 건가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요즘 사내들은 잘생기면 다 되는 줄 아는군요.”

    “예?”

    비난과 칭찬이 뒤섞인 발언에 당황스러웠다.

    “농담 같나요?”

    “...아뇨.”

    세월이 흐르면서 ‘박한희’의 취향이 바뀌지 않았다면 진심이리라.

    “강문수 선수. 못생긴 늙은이랑 오랫동안 대화해줘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추억을 곱씹으며 기다릴게요. 모든 비밀을 공유해주길 기대하면서.”

    쭉 동행하던 박한희 여사의 휠체어가 방향을 틀었다.

    “여사님.”

    “할 말이 남았나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더라도 육상선수로 쭉 남고 싶으셨나요?”

    “...당신에게 오른발을 안 떨며 고백한 소녀는 뭐라고 대답했나요?”

    “먼저 말씀해주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휴양지를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한 법이에요.”

    “안 변하셨네요.”

    “그녀는 뭐라고 했나요.”

    “달리고 싶기 때문에 달릴 뿐이라고 했습니다.”

    선배가 괴롭히지 않았다면 현실의 그녀도 계속 달렸으리라.

    적성에 상관없이.

    “당신의 시험에 통과했나요?”

    “그냥 궁금했습니다.”

    “연장자로서 충고하자면, 사회에서는 그걸 시험이라고 불러요.”

    “...죄송합니다.”

    “기다릴게요.”

    “네.”

    지금부터 남해수의 마지막 꿈을 찾아보자.

    * * *

    꿈속에서 납치된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에 탈출한 나는 바다 위의 별장을 선택했다.

    수영에 자신 있었고, 포위되면 바다로 탈출하면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완전히 당했지!’

    재래식 무기가 없는 판타지 세계였다면 꽤 괜찮은 은신처지만, 현대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멀리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저격수의 존재!

    날아오는 총알로부터 몸을 숨길 엄폐물이 없는 바다는 죽기에 딱 좋은 사격장이나 다름없었다.

    “우연일 리 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은신처는 내가 선택했다. 하지만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바다 위의 집’이 좌우에 수십 채나 있다.

    503호, 504호, 505호, 506호...

    이런 식으로!

    그중에 빈집을 휴양지 관리인이 무작위로 골라줬지만, 그 관리인의 고용인이 ‘남해수’라면 어떨까?

    더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찰칵.

    꿈속이랑 같은 집의 문을 따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이놈의 트라우마.”

    술잔을 든 남해수 씨가 내게 손짓하는 환상이 스치듯 보였다.

    그만큼 완벽히 똑같은 방의 구조 배치와 아름다운 풍경.

    소름이 돋았다.

    ‘가구만 다른가...?’

    문명이 덜 발전한 구시대보다 현시대의 가구가 좀 더 세련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텔레비전, 침대, 욕실, 화장대 등의 위치는 똑같았다.

    “밖은... 좋아.”

    해안선 위에 수상한 유람선은 보이지 않았다.

    꾹!

    위치를 추적당하기 싫어서 꺼둔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우우웅-

    「송선영: 문수야. 밥 먹자.」

    「송선영: 자고 있어?」

    「송선영: 기숙사에도 없네.」

    「송선영: 지금 누구랑 자고 있어?」

    「송선영: 문자 보면 전화해.」

    문자가 한꺼번에 전송되면서 스마트폰이 쉴 틈 없이 진동했다.

    “...어이가 없네.”

    내가 어디서 누구랑 자든 무슨 상관이야?

    이번 기회에 ‘감독님의 딸’에게 쓴소리를 해주기로 했다.

    띠리링~♪

    “안녕? 전화하라-”

    (어디야...!)

    내 스마트폰을 부술 기세로 쩌렁쩌렁 울리는 송선영의 고성.

    쓴소리는 다음에 하기로 했다.

    “해외.”

    (바로 또?! 남해수 씨의 장례식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갔다가 나왔-”

    (그러면 내게 말하고 가야지! 문자라도 남기던가! 연락이 계속 안 돼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엄마도 모른다고 하고...!)

    “그건... 내가 잘못했네.”

    이젠 아무런 사이도 아닌 여자애에게 어째서 사과하는 걸까?

    뭔가 불합리했다.

    (언제 와?)

    “빠르면 내일쯤.”

    (그런데 거기, 신혼부부와 예비부부가 많이 가는 휴양지잖아.)

    “맞아. 정말 많더라.”

    아무런 생각 없이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너는 누구랑 갔어?)

    “혼자서.”

    (커피값도 아까워하는 네가 연인들로 가득한 고급 휴양지를 혼자 갔다고? 네 돈을 주고?)

    “어...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로 혼자입니다.”

    (거짓말이면 각오해.)

    “네.”

    부조리한 세상이다.

    ‘내가 여자랑 오면 어때서?!’

    같이 해외여행을 떠날 여자친구가 없긴 하지만!

    (조심히 돌아와.)

    “그래.”

    (기숙사에 도착하면 연락하고.)

    “왜?”

    (사소한 문제가 생겼거든. 그래서 너랑 상의하고 싶어서.)

    “상의? 무슨 문제인데?”

    (비밀.)

    “......”

    비밀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

    (궁금하면 빨리 돌아와!)

    “응.”

    뚝.

    송선영이랑 통화를 마친 나는 불만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내가 녀석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도 아니고...!’

    이번만이 아니다. 말없이 이사 갔다고 만날 때마다 잔소리하니까.

    하지만 제멋대로인 그녀를 향한 불만도 잠시뿐.

    두근!

    심장이 또 고장났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어디서 누구랑 만나는지 집요하게 물어보는 사람이 여태 없었던 탓이다. 보통은 내가 알려주기 싫다는 눈치를 주면 단념하니까.

    하지만 송선영은 달랐다.

    마치 가족처럼...

    그래서 그녀의 잔소리와 참견이 싫으면서도 좋은?

    매우 복잡한 기분이다.

    ‘...찾으러 가볼까.’

    송선영이랑 통화하느라 살짝 지체됐지만, 야구공 크기의 상자가 안 보일 만큼 하늘이 어두워진 건 아니라서 상관없었다.

    아무도 못 찾는 가장 낮은 곳.

    건물 아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도 못 찾지.”

    관광객들은 수영하고 싶으면 정비가 잘 되어있는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으로 향하니까.

    이 아래도 엄연히 바다다. 하지만 아름다운 산호가 없고, 안전요원도 없어서 수영하려면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한다.

    휴양지에서 굳이?

    그뿐만이 아니다. 좌우에 다른 관광객의 집이 붙어있어서 괜히 수영했다가 사생활침해, 도둑으로 오해받을 가능성까지.

    즉, 건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모래뿐이라고 생각하겠지.’

    지금부터 정말로 모래뿐인지 확인해보자.

    늘 챙기는 선수용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다에 뛰어들었다.

    풍덩!

    “흠...”

    해수면 위의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과 모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래에 파묻힌 걸까?

    삽이라도 챙겨서 다시 올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삶은 지옥이다.」

    잠수하지 않으면 안 보이는 기둥 하단부에 칼로 긁어서 쓴 문장.

    ‘찾았네.’

    지옥(地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남해수의 영상편지에는 상세한 위치가 설명되어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에 만난 장소. 그곳에 내 비밀이 숨겨져 있네.」

    「아무도 못 찾도록 가장 낮은 곳에 숨겨뒀지.」

    마지막에 만난 장소.

    넓게 보면 이 섬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마지막에 만나고 작별한 장소는 이 별장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

    별장에 지하실이 없으니 건물 아래의 바다를 의미하리라.

    「삶은 지옥이다.」

    ‘친절하게 이정표까지!’

    주변의 모래를 전부 헤집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슥슥-

    기둥 아래의 부드러운 새하얀 모래를 손으로 파냈다.

    ‘...오!’

    탁.

    손끝에 바위처럼 단단한 물체가 만져졌다.

    바로 끄집어내서 봤더니,

    ‘검은색 상자.’

    남해수의 말대로 야구공 크기의 검은색 정육면체였다.

    촤아-!

    바다와 별장을 이어주는 사다리를 이용해서 돌아온 나는 상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돌려서 여는 것 같은데...”

    드르륵-

    밀폐가 잘 되어있어서 매우 팍팍하긴 했지만, 내 힘이 부족해서 못 여는 수준은 아니었다.

    빙글빙글.

    수십 바퀴쯤 돌렸을까?

    마침내 정육면체 상자가 절반으로 쪼개졌다.

    ‘이건... 구시대 메모리칩?’

    남해수의 꿈속에서 자주 봤었던 이동식 기억장치.

    기기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비닐과 휴지로 둘둘 감싸여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당연히 내용물을 열어볼 것이다.

    “나의 준비성이란!”

    야구공 크기라고 했을 때부터 대충 예상했었다. 그리고 구시대 전자제품일 가능성까지도.

    110V, 220V, USB, MP3...

    구시대 전용 변압기와 연결선은 저렴하고 휴대하기 편해서 부담 없이 챙겨왔다.

    톡, 톡.

    곧바로 내 스마트폰과 메모리칩을 연결한 후, 구시대 파일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이건...?’

    파일 이름부터 심상치 않았다.

    「딱따구리」

    「뻐꾸기」

    「직박구리」

    “...취미가 고상하시네.”

    생전에 들켰으면 이혼감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다음 파일은...

    「박한희」

    「박한설」

    ‘아내와 처형의 이름이 왜...?’

    궁금해서 파일을 눌러본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동영상.

    내가 꿈속에서 ‘거북이’라고 놀렸던 육상부 선배도 보였다.

    “진짜 위험한 비밀이네.”

    판단은 뒤로 미루고 계속 살펴보기로 했다.

    「지옥」

    ‘...삶은 지옥이라고 했지.’

    기둥에 쓴 문구와 파일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간 지옥.

    분명히 연관이 있으리라.

    톡.

    놀랄 준비한 후에 ‘지옥’ 파일을 눌렀다.

    “어? 그 여자잖아?”

    꿈속에서 검귀로 변한 남편 남해수에게 살해된 배신자.

    현실의 그녀는 성접대를 강요받아서 꽃다운 나이에 자살했다고...

    남해수가 오래된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었다.

    ‘당사자이셨군요?’

    그녀만이 아니었다.

    이 ‘지옥’ 파일 안에는 남해수가 성공하기 위해, 혹은 그 후에 저지른 악행의 증거가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 끝에,

    「천벌」

    마지막 파일이 있었다.

    “천벌이라...”

    톡.

    영상편지처럼 남해수의 얼굴만 나오는 동영상이었다.

    (이것이 세상에 나왔다면 내가 죽었다는 의미일 겁니다.)

    “맞아요.”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당신은 짐작했겠지만, 나는 훌륭한 인간이 아닙니다. 약자를 억압하고, 여자를 협박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동료를 모함하고... 악마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대충 훑어본 자료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내는 모릅니다. 내가 육상부 친구를 동원해서 괴롭히고, 가족의 약점을 잡아서 결혼을 유도했음을.)

    “와...”

    인간이 아닌데?

    (나는 두려웠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과거의 잘못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습니다.)

    “......”

    남해수의 세계(꿈)는 애국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죄책감.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속인 악마는 회개하고 싶었다.

    (당신은 내가 죽기 직전에 가장 신뢰한 사람일 겁니다.)

    “뭐...”

    아마도?

    (그래서 이 파일을 맡깁니다.)

    “이 새끼가...!”

    지뢰를 제대로 밟았다!

    (무거운 짐을 떠넘겨서 정말 미안합니다.)

    “이걸 나보고 어쩌라고?!”

    남해수의 꿈은 폭탄을 선물하며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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