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77화 (78/232)
  • 077화

    나는 꿈속에서 죽으면 현실의 육체 능력이 눈에 띄게 감소한다.

    그래서 아내와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은 남해수도 큰 문제는 없이 깨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정말로 죽어버리다니...!’

    충격이 제법 컸다.

    남해수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꿈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꿈은 꿈일 뿐.

    만약, 내가 꿈속에서 살해당했더라도 그 원한을 현실까지 가져와서 그의 목숨을 노릴 생각은 없었다.

    그 예로, 나는 마법소년 최강민을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서 지운 상태.

    결국은 꿈이기 때문이다.

    남해수 씨도 마찬가지다.

    「강문수 선수. 예상대로 젊군.」

    “......”

    「자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뭐가 고맙나요.”

    그가 나에게 남긴 영상편지는 일방적인 대화로 진행됐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짓을 참 많이 저질렀어. 그건 자네가 가장 잘 알 거야.」

    “아, 네.”

    대충 예상은 됩니다.

    「그래서 염치없긴 하지만, 내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게.」

    “싫은데요?”

    꿈을 연구 중인 서혜주 과장님에게는 설명할 예정이다.

    ‘연구 목적 외에는 뭐...’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고인을 모독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괜히 끄집어냈다가 명예훼손죄로 유가족들에게 고소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부탁이 있네.」

    “역시...”

    「우리가 마지막에 만난 장소. 그곳에 내 비밀이 숨겨져 있네.」

    “아하!”

    남해수가 소유한 휴양지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가 상세한 위치를 설명했다.

    「아무도 못 찾도록 가장 낮은 곳에 숨겨뒀지.」

    “그게 어디인데요?”

    「야구공 크기의 검은색 정육면체 상자야.」

    “......”

    갑자기 귀찮아졌다.

    「그것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자네가 보고 판단해주게.」

    “...그러죠.”

    찾을 수 있다면요.

    「남은 시간이 별로 없군.」

    “......”

    「젊은이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 이건 어른스럽지 못했던 내 잘못이니까. 정말 미안하다. 열심히 준비한 올림픽 출전을 방해해서.」

    “저도 죄송했어요.”

    질질 끌지 않고 올림픽 출전 전에 얘기했다면...

    조금 후회됐다.

    「자네가 현실에서 올림픽에 출전하기를, 저 하늘에서 빌어주지.」

    “...감사합니다.”

    「아아, 정말 좋은 꿈이었어. 무궁화 삼천리... 대한민국... 만세...」

    뚝.

    수영의 황제는 먼 하늘을 응시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영 메달을 보유한 수영의 황제 남해수.

    오랜 투병(鬪病) 끝에 유언을 남기고 떠난 그의 장례식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흑흑!”

    “명복을 빕니다.”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는 유언이 알려지면서 접점 없는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등도 참석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

    오랜 투병으로 몸이 약해진 것이 원인이란 분석이었다.

    겉으로는.

    “오랜 투병이라...”

    행복한 꿈에 사로잡혀서 깨어나지 못하는 오컬트를 ‘병(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행복해지는 병.

    모르겠다.

    “꿈에 들어간 걸 후회해?”

    “...아뇨.”

    엘몰랑스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남해수의 국장(國葬).

    세계에서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엘몰랑스 병원의 장례식장이 오랜만에 개방됐다.

    “이 병원의 장례식장이 까다로운 이유를 알아?”

    “관심 없는데요.”

    “모든 환자를 살리기 때문에 장례식장이 필요 없다는 의미야.”

    “정말로 안 죽어요?”

    “그럴 리가. 대수술을 무사히 마친 환자가 병문안을 온 대학 선배를 보자마자 죽은 적도 있어.”

    “왜요?”

    “고혈압으로 인한 돌연사. 흥분이 원인이었지.”

    “......”

    “왜? 믿기지 않아? 실화야.”

    “즉, 엘몰랑스 병원에서 거짓말한 셈이네요.”

    “상술이라고 해줘.”

    장례식장을 찾은 추모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주차장도 꽉 차서 도로변에 차를 세워둘 정도.

    ‘비교되네.’

    허무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은 쓸쓸하고 초라했었다.

    친척, 친구, 동기, 선생...

    방명록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남해수 씨가 이 광경을 보지 못해서 아쉽네요.”

    “네 덕분이지.”

    “저요?”

    “유언을 남길 수 있었잖아. 못 깨어났다면 평범한 부자의 죽음으로 흐지부지 끝났을걸.”

    “그게 꼭 좋은 일은 아니죠.”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 때문에 빈손인 가족들의 표정은 매우 좋지 못했다.

    단 한 명을 빼고.

    남해수 씨의 아내인 박한희 여사의 주름진 얼굴은 평온했다.

    ‘...닮았네.’

    젊은 시절의 모습이 곱게 늙은 주름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문수야.”

    “네.”

    “연맹에서 고맙다는 비공식적인 연락이 왔어.”

    “그쪽도 허탕인데요?”

    “네 말대로 지원금은 끊기지만, 국제수영연맹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남해수 씨의 명예를 수호할 수 있었으니까.”

    “명예... 저는 모르겠네요.”

    돈이 최고잖아?

    서혜주 과장님이 내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도 많아.”

    “과장님처럼요?”

    “맞아. 나도 명예에 눈이 멀어서 고생했지.”

    현대의학과 상식이 일절 통하지 않았던 최강민.

    그의 주치의로 7년 동안 붙잡혀 있었던 과거를 떠올린 서혜주 과장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먼저 가볼게요.”

    멀리서 장례식을 지켜보던 나는 몸을 돌렸다.

    “벌써?”

    “계속 보고 있기 힘들달까...”

    “음?”

    “저도 꿈속에서 낯뜨거운 짓을 좀 했거든요.”

    “뭔데?”

    “그런 게 있어요.”

    증손자의 손자까지 본 할머니랑 연애했다는 사실은 내 무덤까지 가져가리라!

    * * *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했지만, 남해수는 독신이 아니다.

    박한희 여사.

    긴 시간을 함께한 배우자에게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남해수가 결혼한 후에 쌓은 재산의 절반은 ‘배우자’의 몫이다. 그리고 이건 전직 모델이었던 박한희 여사에게도 해당하는 얘기.

    그래서 결론은?

    부부의 부동산, 주식, 채권 등을 합친 총 재산 중 절반만 사회에 기부하게 된다.

    “강문수 선수.”

    “네.”

    “이 섬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여사님!”

    나는 거동이 불편해서 휠체어로 이동하는 박한희 여사의 질문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원인은 명확했다.

    영상편지!

    남해수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지만, 동영상 촬영을 도운 보조 인력이 있었으니까.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로 신혼여행을 왔었지요.”

    “그러셨군요.”

    “이 늙은이가 불편한가요?”

    “아닙니다. 그저... 부군의 장례식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는지 조금 걱정됐을 뿐입니다.”

    “아이들을 믿어요. 어미한테까지 버림받을 짓을 할 리 없다고.”

    “아, 네.”

    더 물어보면 복잡한 가정사를 듣게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찰랑찰랑~

    아름다운 휴양지의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가장 낮은 곳이라...’

    대중교통 중에서 가장 비싼 비행기를 타고 이 섬에 온 이유는 남해수의 비밀을 찾기 위해서다.

    박한희 여사는?

    남편이 숨겨둔 재산까지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는 확실한 명분으로 동행하게 됐다.

    “신혼여행지에 무엇을 숨겨뒀을지 궁금하군요.”

    “...그러게요.”

    아내가 아닌 나에게 얘기했다는 점이 매우 꺼림칙했다.

    “저 바다를 보니 기억나는군요. 당시에 모델이었던 저는 신혼여행보다 화보 촬영에 집중했어요.”

    “...후회하세요?”

    “전혀.”

    박한희 여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부정했다.

    “......”

    “제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나요?”

    “아뇨.”

    남해수가 이런 아내에게 집착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화보 촬영은 제가 아닌 남편의 요구였어요.”

    “예...?”

    이건 무슨 소리야?

    “아름다운 모델이랑 결혼했다고 자랑하기 위해.”

    “...그 새끼- 어흠! 남해수 씨가 정말로 그랬다고요?”

    “그랬어요.”

    “......”

    “수많은 인간과 카메라가 온종일 따라다니는 바람에 편하게 신혼여행을 즐길 수 없었어요.”

    “전혀 몰랐어요.”

    내가 꿈에 들어가기 전에 조사한 남해수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수영의 황제, 건전한 남편, 화목한 가정, 후학 양성 지원...

    자식들이 재산 상속 문제로 다투긴 했지만, 막대한 돈이 걸렸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전부 가식이었다니...!’

    남해수가 과거로 돌아가는 꿈을 고른 계기를 알 것 같다.

    후회.

    그가 ‘남해수’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이유도 과거의 자신을 혐오했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의 평범한 외모가 싫은 김은정이 아름다운 백작 영애가 되었듯이.

    꿈의 세계관은 ‘마녀’가 아닌 ‘주인공’이 결정하는 게 틀림없다.

    “강문수 선수.”

    “네.”

    “보면 볼수록 잘생겼네요. 이 늙은이의 취향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노인들이 자주 하는 상투적인 농담임을 알지만, 그녀만큼은 가볍게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가장 낮은 장소. 이상하군요. 이 섬은 평지뿐인데...”

    “추상적인 표현이 아닐까요?”

    “예를 들자면?”

    “남해수 씨가 이곳에 무언가를 숨겼다면 혼자 왔을 겁니다.”

    “예전부터 출장이 잦긴 했어요.”

    “여사님. 가장 낮다는 단어로 짐작되는 장소가 없으신가요?”

    이왕 동행한 김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남해수의 배우자이기 때문에 물어보는 건가요?”

    “네.”

    “반대로 생각해봐요. 남편이 강문수 선수에게 보낸 영상편지는 당사자만 아는 암호로 되어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마지막에 만난 장소가 신혼여행지인 줄도 몰랐어요.”

    “아...”

    듣고 보니 그랬다.

    “비밀을 숨겨둔 구체적인 위치도 당신은 알고 있을 거예요. 아직 깨닫지 못했거나... 저에게 감추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있거나.”

    박한희 여사가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겠네요.”

    “인정하나요?”

    “네. 남해수 씨가 어디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제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못 찾도록 가장 낮은 곳.

    그런데 이곳은 휴양지다.

    ‘관광객들이 안 가는 장소가 거의 없지.’

    하지만 이런 관광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

    “어디인가요?”

    “남해수 씨는 영상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 비밀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저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금전적인 가치가 없으면 깔끔히 포기할게요.”

    “거짓말이시네요.”

    “무례한...”

    “한희가 저에게 고백하면서 가르쳐줬어요. 자기는 거짓말하면 긴장으로 오른발을 떤다고. 못 믿겠으면 언니에게 물어보라면서.”

    “......”

    휠체어에 앉은 박한희 여사의 오른발이 떨리고 있었다.

    “그 습관을 못 고치셨네요.”

    “이건 남편과 언니만 알고 있었는데... 모두 죽었으니 이젠 당신만 아는 비밀이 됐군요.”

    “휠체어를 끄시는 분을 빼시면 안 되죠.”

    박한희 여사의 수발을 드는 비서의 절제된 움직임은 평범한 보조 인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경호도 겸하고 있겠지.’

    하늘하늘한 치마 속에 내가 가장 경계하는 재래식 무기를 휴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남해수의 꿈에서 자주 당하며 생긴 트라우마!

    모든 사람을 의심하게 됐다.

    “남편이 당신만 이해할 수 있는 영상편지를 보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셨을 것 같아요.”

    우리는 휴양지의 아름다운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언제까지?

    곧 결론이 날 것 같다.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먼저 고백한 적이 없는데...”

    “압니다.”

    남자에게 먼저 고백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었지.

    “강문수 선수,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남해수 씨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죠.”

    “...그랬나요?”

    “네.”

    남해수만이 아니다. 꿈의 세계에서 나를 만난 모든 주인공이 똑같이 물어봤었다.

    그리고 내 대답도,

    “무당입니다.”

    남해수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