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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70화 (71/232)
  • 070화

    [4장-6절] 너는 누구야?

    만약, 다른 남자가 내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인다면 어떤 기분일까?

    ‘매우 불편하겠지!’

    그 남자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으리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만약, 발렌타인에게 접근하는 사내가 있었다면 아몰랑 백작의 이름으로 교수형에 처했으리라!

    ‘하지만 이건 아니지.’

    현실에서는 남해수와 박한희가 부부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게다가 숨어서 내 여자라고 주장하는 방식도 추잡했다.

    수영의 황제?

    그는 황제란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옹졸한 겁쟁이다.

    “와아!”

    “......”

    “문수야! 저기를 봐! 바다가 에메랄드색이야! 너무 예뻐!”

    “...예쁘네.”

    바다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

    “단둘이 저 해변을 걸으면 정말 좋을 텐데...”

    “어쩔 수 없지.”

    경찰차가 호위처럼 따라오는 고급 승용차의 뒷좌석에 함께 앉은 박한희가 살짝 아쉬워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출발 전부터 들뜬 얼굴. 그녀는 여행의 분위기를 제대로 즐길 줄 알았다.

    ‘여행이라...’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 등장하는 전설의 검을 찾기 위해 발렌타인이랑 강가와 오두막을 수색한 추억도 여행에 해당할까?

    전설의 검을 꼭 찾겠다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히면서 마음 편히 못 즐겼던 것 같다.

    “강문수 선수.”

    “네.”

    나와 박한희가 여행하는 동안 운전해줄 경호원이 백미러로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저를 질투하는 놀이터 사장님이 또 있나요?”

    “조심하십시오.”

    “그럴게요.”

    나는 백미러에 비친 경호원의 눈짓을 보며 미소로 회답했다.

    ‘이것 봐라?’

    운전을 전혀 할 줄 돌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예정이었는데, 우리의 여행 통보를 받은 정부에서 이 승용차를 빌려주고 경호를 겸한 운전기사를 붙여줬다.

    문제는 이 승용차.

    도청장치 같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증거로, 조심하라는 상투적인 말밖에 못 하는 운전기사.

    그리고 그의 시선.

    보이지 않는 감시자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희야.”

    “왜?”

    “우리, 즐겁게 놀자.”

    “응? 당연하지!”

    내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 * *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사람이 몰린 장소는 아무리 자유여행일지라도 갈 수 없었다.

    해수욕장, 놀이동산, 수영장...

    기껏 시간을 내서 여행을 떠났는데,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의미!

    ‘그래도 조심해야지.’

    나도 부주의로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고 욕먹는 상황은 피하고 싶기에 순순히 따랐다.

    무엇보다도,

    “말도 안 돼! 호텔에 처박혀 있으라니!”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건 알지만...!”

    박한희가 입술을 깨물며 분통을 터트렸다.

    ‘노림수네.’

    전염병 때문에 호텔 안에만 있으라는 건 지나친 간섭이다.

    이러면 여행이 아니라 감금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따랐다.

    미래의 아내를 빼앗겨서 눈이 뒤집힌 남해수가 이 전개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실이 멋지네.”

    “와! 야외수영장도 있어!”

    “노천탕이야.”

    “아하! 나, 처음 봐.”

    “밖에 못 나가게 하는 대신에 신경 좀 썼군.”

    “그런 것 같아!”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객실이라고 했던 것 같다.

    소형 영화관, 노천탕, 당구대, 컴퓨터, 초대형 침대, 목욕탕...

    그만큼 가격도 무시무시했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나는 정가의 10%만 내고 이용할 수 있었다.

    “흐음~”

    나는 자연스럽게 객실의 구석구석 살펴봤다.

    ‘못 찾는 게 당연한가...’

    감시카메라나 도청장치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로선 그것들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정말로 없을 수도 있고.

    조심하라는 경호원의 경고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걸지도 모른다.

    “문수야! 빨리 이쪽으로 와봐! 경치가 정말 좋아!”

    “...멋지네.”

    화석연료로 오염된 구시대의 뿌연 하늘과 바다.

    이상적인 정치인만 존재하는 현대에서는 세계적인 협력과 노력으로 지구의 자연환경이 회복됐다.

    무공해 연료, 밀렵 금지, 우주 개발, 수질 개선, 친환경 발전소...

    그래서 어딜 가더라도 구시대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고마워. 문수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리네.”

    “신경 쓰지 마. 나도 네가 아니었다면 올 생각을 못 했을 거야. 남자 혼자서 뭘 하겠어?”

    “그, 그렇지...!”

    휙~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진 박한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희야. 나부터 씻어도 될까?”

    “씻는다고?! 왜?!”

    “차로 편하게 오긴 했지만, 그래도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잖아.”

    “...아! 그랬지! 응! 맞아! 먼저 씻어! 나는 다음에 씻을게!”

    “고마워.”

    곧바로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잘 엿듣고 있으려나?’

    권력자의 탈을 쓴 남해수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겠다.

    * * *

    띠리링~♪

    대충 씻고 샤워실에서 나올 때쯤에 스마트폰이 울었다.

    내가 모르는 전화번호.

    선수촌을 들쑤시면서 내 휴대전화번호를 사방에 뿌렸기 때문에 대단한 비밀은 아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선수촌 관계자, 선수가 없다.

    관련 없는 일반인들도 내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기자를 통해서 알 수 있을 정도.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는 모르지만.

    “안 받아?”

    수건을 어깨에 두른 속옷 차림의 나를 보며 박한희가 묻는다.

    “휴가 중이잖아.”

    “중요한 전화일 수도 있는데...”

    “정말 중요한 용건이면 호텔까지 찾아오겠지.”

    “그런 거야?”

    “그런 거지.”

    “문수의 그런 점이 부러워. 나는 감독님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긴장으로 온몸이 굳는데.”

    “왜? 혼내서?”

    “그건 아니지만... 항상 아쉬운 소리를 하시거든.”

    “흠...”

    박한희의 성적이 올림픽 정상급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적성도 ‘육상선수’가 아니고.

    그렇다고 절망적인 건 아니다.

    달리기보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훨씬 긴 고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한 상태니까. 육상선수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학업으로 소홀히 했던 근력과 유연성을 키우면서 부지런히 몸을 만들면 4년 뒤에는 훌륭한 선수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생각이 자꾸 들어. 내가 강문수의 여자친구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건 강문수란 녀석의 취향에 달렸다고 생각하는데.”

    “뭔데?”

    “...올림픽 국가대표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또 다른 건?”

    “내 여자친구는 금전적인 빚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건 취향이 아니야.”

    박한희가 무척 어이없다는 어조로 내게 핀잔을 줬다.

    그건 나도 알지만, 방금까지 침울했던 그녀의 표정이 풀린 것만으로도 성공이 아닐까?

    내게 불리한 주제이기도 하고!

    “안 씻어?”

    “네 취향을 듣고 씻을래.”

    “......”

    “얼른 말해봐.”

    “흠... 그러면 박한희 양의 남자 취향부터 듣고 얘기하겠습니다.”

    “나, 나?!”

    “먼저 말해.”

    나는 남해수가 입시학원에서 박한희에게 바로 차였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수영의 황제 남해수가 아내 박한희의 취향을 모를 수 있나?

    박한희가 남해수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결정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외모, 능력, 성격...

    하지만 남해수는 자신 있게 도전했다가 시원하게 차였다.

    “한 방 먹었네.”

    “비밀이면 말고.”

    “아니. 말할 거야. 문수의 취향을 꼭 듣고 싶으니까.”

    “그, 그래.”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다.

    “나는... 음... 갑자기 말하려고 하니 부끄럽네!”

    “안 해도 돼.”

    “할거야.”

    “......”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남자에게 끌리는 것 같아.”

    “그게 뭔 말이야?”

    “음... 보통은 말투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 이 남자가 나를 왜 좋아하는지를.”

    “흠.”

    예쁜 외모로 어릴 적부터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일까?

    남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대전제를 깔고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모르겠어.”

    “나를?”

    “내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질 않아. 이 경우에 보통은 내 외모만 보고 접근한 늑대인데...”

    “나도 늑대야.”

    잠깐이긴 해도 사귀었던 송선영과 발렌타인이 그 증거다.

    “그런 것치고는 내 몸에 시선을 안 주던데. 가슴이라던가, 엉덩이라던가, 다리라던가...”

    “신사답게 몰래 봐.”

    “엉큼한 짓도 전혀 안 하고.”

    “손을 잡았잖아?”

    “이보세요. 강문수 씨. 손 좀 잡았다고 얼레리 꼴레리 할 나이는 한참 지났거든요?”

    “크흠!”

    남해수를 찾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고 있기에 당연했다.

    ‘잘 알지.’

    나는 대단히 나쁜 남자다.

    “...그래도 괜찮아. 이해하기로 했으니까. 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해서 그런 거잖아?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하지만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는 건 용납 못 해.”

    “명심하겠습니다.”

    나도 대단히 나쁜 쓰레기가 될 생각은 없다.

    “이젠 네 차례야.”

    “이건 아니지! 아직 취향을 똑바로 말하지 않았잖아. 너에게 관심 없는 남자면 다 좋다는 거야?”

    “자신감.”

    “자신감?”

    “응. 외모와 능력을 안 본다면 거짓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야.”

    “왜?”

    “소심한 남자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겠더라고. 아! 허세는 안 돼. 딱 질색이거든.”

    “아하!”

    남해수가 차인 이유를 모르겠다.

    “됐지? 이젠 네 차례!”

    “이런...”

    “취향이 뭐야?”

    반드시 듣고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눈빛의 박한희.

    나는 객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나를 가르쳐주는 여자.”

    “그게 뭐야?”

    “내가 못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전문적인 여자에게 끌리더라.”

    “...선생님?”

    “직장인 빼고.”

    모친이 과거에 국가대표였고 본인은 적성이 수영선수인 송선영에게 수영을, 신체적인 불리함을 이겨내고 뛰어난 기사가 된 발렌타인에게는 검술을 배웠다.

    “외모는?”

    “늑대입니다.”

    “자세히.”

    “묵비권을 행사할게. 나는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싶지 않아.”

    “비밀로 해줄게.”

    “그래도 안 돼.”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는 이곳에서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이것만 말해줘.”

    “말해봐.”

    “전 여자친구랑 나를 비교하면 누가 더 예뻐?”

    “...비슷해.”

    “비슷? 전 여자친구가 더 예쁘다는 뜻이네.”

    “......”

    “난 이제 씻을게! 그리고 훔쳐보지 마. 나는 안 예쁘니까!”

    자존심 상한 박한희가 수건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찰칵!

    안에서 샤워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삐졌네.”

    따르릉~♬

    그때, 스마트폰이 또 울었다.

    같은 전화번호.

    “몰랑?”

    “어째서 안 받냐고?”

    “몰랑~”

    박한희가 의심하지 않도록 모자처럼 가만히 있었던 친구가 침대 위에서 몰랑거렸다.

    “얼굴을 보고 싶거든.”

    “몰랑몰랑.”

    “아니야? 틀렸다는 뜻인가?”

    “몰랑~”

    내가 통화를 끝까지 안 받고 무시하자 스마트폰도 조용해졌다.

    ‘의도한 상황까지 왔는데... 남해수가 어떻게 나오려나?’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속옷 위에 호텔 목욕가운만 걸친 채 경치를 구경했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

    방사능에 오염된 바다.

    뜬금없는 헬리콥터.

    “...헬리콥터?”

    처음에는 산악구조헬기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동하지 않고 허공에 대기하고 있었다.

    방송촬영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려 할 때였다.

    “몰랑!”

    흠칫!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제발...!’

    바닥을 구르면서 헬리콥터가 안 보이는 벽 뒤에 숨었다.

    팍!

    방금까지 멀쩡했던 창문에 손톱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

    “몰랑?”

    “...나는 괜찮아.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몰랑~”

    시야에서 완전히 나를 놓친 헬리콥터가 도망치듯 떠났다.

    ‘저격수라니!’

    주르륵.

    허무하게 죽을 뻔한 내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문수야! 무슨 소리야?”

    샤워실에서 박한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천천히 씻고 나와도 돼.”

    “그게 무슨 말이야? 기다려! 빨리 씻고 나갈게!”

    “흠...”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남해수.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 됐기에 이런 과감한 짓을 할 수 있는 걸까?

    조폭, 헬리콥터, 저격수...

    어두컴컴한 한밤중에도 여성이 집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만큼 치안이 좋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자기가 신(神)이라도 된 줄 착각하는 건가?’

    그는 달콤한 꿈에 사로잡힌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곧 깨닫게 해주지.”

    “문수야. 뭘 깨닫게 해준다는 거... 창문이 왜 저래?!”

    “벌레가 들어왔어.”

    “버, 벌레?! 세상에 유리창을 깨는 벌레가 어디 있어!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기다려. 신고하지 않아도-”

    딩동!

    객실 초인종이 울렸다.

    “경찰입니다! 강문수 선수, 문을 여십시오!”

    사고가 난 줄 어떻게 알았을까?

    음모의 악취가 났다.

    “어?”

    “한희야. 지금부터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경찰을 벌써 불렀어?”

    “그럴 리가.”

    “......”

    이상함을 눈치챈 박한희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준비 됐어?”

    “응.”

    “연다.”

    지금부터는 목숨을 건 여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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