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4장-5절] 드디어 찾았다
「강문수 선수. 당신은 박한희에게 속고 있습니다. 내 경고를 무시하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오! 착하네.’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남의 연애를 걱정하다니?
물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겁한 방식은 오해와 불신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허! 속아? 누가 이런 짓을...!”
짧은 편지글을 읽은 박한희는 격하게 분노했다.
“한희야.”
“제발 들어줘! 나는 널 속인 적이 한 번도 없어!”
“진정해.”
“이건 너랑 사귀는 나를 질투한 자의 범행이 틀림없어! 나를 얼마나 안다고 후회한다는 거야? 진짜 치졸하고 비겁해...!”
“쉿. 다 듣겠어.”
“......”
선수촌 아파트에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자각하고 입술을 꾹 다문 박한희.
나는 편지가 꽂혀 있던 현관문 주변을 둘러봤다.
‘훔쳐보고 있으려나?’
박한희가 내 숙소를 찾아온 직후에 편지를 꽂고 달아났다면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
찾아보기로 했다.
“경비실부터 가보자. 감시카메라에 누군지 찍혔을 거야.”
“저기, 문수야. 이 편지를 믿는 건 아니지?”
“안 믿어. 믿었으면 너에게 안 보여주고 숨겼지.”
“아! 맞아! 숨겼겠지!”
내 설득에 표정이 조금 풀린 박한희가 앞장섰다.
“...참 황당하네.”
질투가 아닌 연민(憐愍)으로 내게 접근하다니?
진짜 이상한 일이다. 자식들이 출판한 남해수 씨의 전기에는 화목한 부부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나랑 사귀면 후회? 잡히기만 해봐라! 내가 후회하게 해주겠어!”
“그래. 혼내주자.”
화목한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 * *
“진짜 어이없네! 나랑 사귀고 싶으면 내게 편지를 쓰던가! 남자가 치졸하게...!”
“그러게.”
“절대로 용서 못 해!”
범인이 여성이라고 예상했던 박한희는 감시카메라에 찍힌 남성을 보고는 짜증을 냈다.
모자와 마스크로 가린 얼굴.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쓰기에 의심 안 받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잡기 어렵겠는데...’
경찰에 신고하면 잡을 수 있을까?
범행의 증거는 충분했지만,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기에는 죄질이 너무 약했다.
“꼭 잡고 말겠어!”
“맛난 것 먹고 기분 풀어. 내가 사줄게.”
다음 날에도 ‘미래의 남편’을 욕하기 바쁜 박한희.
나는 그녀에게 괜히 보여줬다고 후회하면서 외식을 제안했다.
“어?! 진짜?!”
“당연하지. 왜?”
“하지만 문수는... 아, 아니야! 얼른 밖으로 나가자!”
“......”
내가 밥을 산다는 것이 이토록 기뻐할 일인가?
선수촌에서 제공해주는 공짜 영양식이 아깝긴 하지만, 오늘은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현실로 가져갈 것도 아니고.’
내가 거북이에게 이민을 언급한 사실을 들은 누가 상부에 얘기한 걸까? 곧바로 정부에서 계약서와 계약금을 내게 내밀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해달라고.
내가 수락한 후부터였을까?
언론사에서 일제히 나를 치켜세우며 홍보하기 시작했다.
“뛰어서 가자.”
“그래!”
버스를 놔두고 건강한 두 다리로 뛰어서 시내까지 나온 우리.
산책하듯 매우 천천히 달렸음에도 박한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다 왔으니 걷자.”
사람이 붐비는 시내에서 뛰다가 충돌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내게 물었다.
“안 힘들어?”
“전혀.”
호흡을 방해하는 마스크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문수의 체력은 몇 번을 봐도 사기 같아. 진짜 대단해.”
“대단할 것 없어. 그냥 타고난 거니까.”
적성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부모님도 너처럼 체력이 좋고 빠르셨어?”
“아니. 평범하셨지.”
돌이켜보면 나도 매우 평범했던 것 같다.
‘이상하긴 해.’
적성을 알게 된 뒤부터 몸이 극단적으로 변화했다고?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됐다.
모친이 수영선수였던 송선영은 어릴 적부터 수영을 잘했으니까. P의 적성검사기는 그녀가 모친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즉, P의 적성검사기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가르쳐주는 수단일 뿐이다.
아무튼,
“한희야. 뭐 먹고 싶어?”
“얼마까지 돼?”
“...가격 상관없이 무조건 맛만 있으면 돼.”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귀족으로 생활한 탓이다.
혀가 고급스러운 음식에 익숙해져서 편의점의 저렴한 즉석식품, 냉동식품으로 못 돌아가는 중!
후유증이 매우 심하다.
“해물 좋아해?”
“좋아하긴 하는데, 바다에서 막 잡은 싱싱한 활어가 아니면 식감이 떨어져서 안 먹어.”
항해는 지루하고 고됐으나, 선원들이 직접 손질한 생선요리들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소화되기도 전에 멀미로 전부 토해내고 말았지만!
“문수는 미식가였구나. 전혀 몰랐어. 평소에는 뭐든 잘 먹는 것 같았으니까...”
“공짜는 안 가려.”
“그, 그렇구나!”
가만히 몇 초 동안 고민하던 박한희는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정했어?”
“응. 커플들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이야. 선배랑 갔던 곳이라서 별로 내키진 않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면서 굳이...?”
“저렴하고 맛있거든.”
“그러면 가야지!”
“몰랑!”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끼익-
중세의 선술집처럼 꾸민 어두컴컴한 내부공간을 꼬마전구로 밝힌 레스토랑이었다.
방역수칙에 따라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오! 커플이 정말 많네.’
젊은 남녀로 구성된 2인 테이블이 심심찮게 보였다.
“손님. 총 몇 명이세요?”
“2명입니다.”
“그러시면 이 자리 괜찮으실까요?”
“네.”
나는 점원에게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후,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 남자들을 눈여겨봤다. 다른 인간의 탈을 쓴 남해수 씨가 우리를 감시하고자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문수야. 커플 A세트, 어때?”
“A세트... 오! 탄산음료와 감자튀김을 공짜로 주네! 좋아.”
또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박한희에게 괜찮은 식당을 소개받은 것 같다.
탁, 탁.
테이블 중간에 놓고 같이 나눠 먹을 주요리 2가지는 평범했다.
그러나 공짜 탄산음료 한 잔에는 나눠마시라며 파란색, 빨간색 빨대가 하나씩.
허브를 뿌린 공짜 감자튀김과 케첩이 담긴 접시도 하트 모양이네?
‘이래서 커플 세트구나~’
피식 웃으면서 마스크를 벗고 식사에 들어갔다.
“잘 먹을게!”
“마음껏 먹어.”
송선영이랑 최고급 레스토랑 ‘빠르나루’에 갔을 때, 다른 손님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봤었다. 미래에 모델이 되는 그녀의 외모는 어딜 가든 눈에 띄었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설마...”
“저 커플...”
이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은 기본이고, 일하는 점원들마저 짙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엿들을 순 없었지만, 박한희의 외모에 대한 품평이 아닐까?
본인도 그걸 느낀 모양이다.
“문수야.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아.”
“우리가 아니라 너지.”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줬다.
“어... 나도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처럼 주목받을 정도는 아니란 것쯤은 알아.”
“최근에 더 예뻐진 모양이지.”
“...너는 여자가 두근거릴 대사를 너무 건성으로 말해. 그러면 역효과가 날걸?”
“그건 몰랐네.”
“정말 중요한 거야. 그러니 머릿속에 새겨들어.”
“네! 여자친구님!”
그녀의 충고를 흘려듣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런 능글맞은 태도는 어디서 배운 거야?”
“전혀 모르겠는걸~”
“몰랑몰랑~”
송선영이랑 연애하며 배운 삶의 지혜다.
탁.
그때, 점원이 우리의 테이블에 생과일주스를 내려놓았다.
“저희는 생과일주스를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서비스입니다.”
“아하!”
공짜는 늘 옳다.
“혹시, 강문수 선수이신가요? 뉴스의 사진이랑 너무 닮아서...”
“맞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오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 레스토랑 홍보용으로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상관은 없지만...”
아직 올림픽 메달도 없는 선수가 홍보에 도움이 될까?
그런 내 의문을 비웃듯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뭐?! 슈퍼보이가 있다고?!”
“강문수 선수가 맞대!”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할까?”
“와! 진짜다! 진짜야!”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손님과 점원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찰칵!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으로 잽싸게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이거 참...’
대중의 주목은 ‘아몰랑 백작’으로 제법 받아봐서 익숙한 편.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귀족 사회를 경험한 나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여러분! 방역수칙을 꼭 지켜주세요! 제가 혼납니다!”
“몰랑!”
“마스크는 벗을 수 없지만,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 게 어떨까요?”
“오! 좋아요!”
“찬성이요!”
“저도 찬성!”
나의 주도로 단체 사진 촬영이 빠르게 진행됐다.
나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박한희가 연인처럼 서고, 흐뭇한 미소의 레스토랑 점주가 왼편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이후에 방역수칙을 핑계로 사진 촬영을 빠르게 종료했다.
“감사합니다!”
“아뇨. 저도 즐거웠습니다. 공짜 주스가... 어흠! 수고하세요!”
“또 오십시오!”
식사를 위해 벗어둔 마스크를 다시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인기라니?
솔직히 조금 놀랐다.
“멋졌어.”
레스토랑의 어두운 조명과 마스크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박한희의 얼굴은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다.
“뭐가?”
“네가.”
“언론의 힘이지.”
내가 대단한 게 아니다.
“그것 말고.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나는 당황해서 아무런 생각도 안 났어. 하지만 너는 떨지 않고, 편하게 웃고, 말도 잘하고... 마치, 연예인 같았어.”
“뭐...”
이래봬도 대제국의 백작님이었던 몸이시다.
“그게 너무 멋졌어.”
“별거 아니야. 너도 오늘 경험해봤잖아?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나처럼 능숙해질걸.”
남해수 씨로 의심되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슬슬 뛸까?”
“지금은 너랑 대화하면서 천천히 걷고 싶어.”
슬그머니 내 손에 깍지를 끼며 꽉 붙잡는 박한희.
우리의 관계가 한걸음 전진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나는 그녀의 깍지 낀 오른손을 신경 쓰는 않는 척하며 마음대로 하게 놔뒀다.
흔들흔들~
맞잡은 두 손이 그네처럼 앞뒤로 왕복했다.
“저기... 문수야. 하나만 물어봐도 돼?”
“해봐.”
“여자친구랑 왜 헤어졌어? 전에 듣긴 했지만, 자세히는 몰라서...”
“아픈 질문이네.”
“미, 미안! 내가 괜한 질문을! 대답하지 않아도 돼!”
“차였어.”
“뭐?! 네가? 거짓말!”
나는 못 믿겠다는 가짜 여자친구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무인도에 단둘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사귀었어. 하지만 섬을 탈출하자마자 바로 차였지.”
“바로?”
“어.”
“진짜 너무하네! 그런데도 여전히 좋아하는 거야?”
“그녀 주변에 멋진 남자가 많아졌으니 당연한 결과지.”
꿈에서 깨어난 송선영을 원망하지 않는다.
“너도 똑같잖아.”
“뭐가?”
“그 무인도를 탈출하면서 문수의 주변에도 멋진 여자가 많아졌을 거 아니야.”
“예리한 지적인데... 그 멋진 여자랑 최근에 헤어졌어.”
“또?!”
“국경의 벽에 막혔거든.”
소설과 현실의 벽은 사랑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아... 그러면 헤어졌어도 연락은 종종 주고받겠네.”
“아니. 연락처를 잃어버렸어.”
김은정이 꿈에서 깨어나면서 발렌타인도 사라졌다.
“그, 그렇구나.”
“지금은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셈이지.”
“내가 치유해줄 수 있는데...”
“공짜만 받습니다.”
치유의 대가로 진지하게 사귈 마음은 없었다.
“할부도 돼.”
“정중히 사양할게.”
“칫!”
나의 비극적인 연애사만 일방적으로 듣기 미안했던 걸까?
박한희가 운을 뗐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인기가 진짜 많았어.”
“감독님께 들어서 알아.”
“아니. 언니는 조금밖에 몰라. 부러워할 게 뻔해서 학교 밖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거든.”
“아하.”
착한 여동생이네.
“길거리에서 별의별 남자를 다 만났었는데... 아! 그중에 진짜 어이없는 남자도 있었어.”
“......”
그녀의 연애사에 관심 없었던 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입시학원에서 만났었는데, 자기랑 사귀지 않으면 1년 뒤에 불행해진다는 거야.”
“...음?”
“정말로 1년 뒤에 이상한 선배의 눈에 띄어서 고생하긴 했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
“그렇지.”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내가 예민한 걸까?
“그래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이유가 뭔지 알아? 나에게 운동은 그만두고 노래나 부르래.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말 이상한 남자네.”
“그렇지?”
“그걸 알 리 없는데.”
“그거?”
“재능 말이야.”
남해수의 아내 박한희는 모델이었으나 적성은 ‘오페라 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