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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66화 (67/232)
  • 066화

    남해수 씨의 아내 ‘박한희’가 나를 끌어들이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판단이 중요하지.’

    도움을 요청해도 내가 거절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카페로 갈까요?”

    “네!”

    우리는 손님이 적은 골목길 카페로 이동했다.

    “박한희 양. 뭐 드시겠어요? 제가 사겠습니다.”

    “아뇨! 저 때문에 시간을 내주셨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 고르시면 제가 결제할게요.”

    “흠... 요거트 스무디 가장 큰 사이즈로요.”

    “요거트 스무디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 아이스 샷 추가해서 레귤러로 주세요.”

    짤랑!

    각자의 취향대로 음료를 주문한 후에 우리는 카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여자에게 공짜로 얻어먹지 말자고 방금 맹세했는데...’

    바로 깨져버렸네?

    공짜를 좋아하는 이 성격을 하루빨리 고쳐야겠다.

    “제 남자친구인 선배의 아버지는 옛날에 국가대표였어요. 그리고 지금은 입김이 강한 높은 자리에 앉아 계세요.”

    “과연...”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어졌어요. 함께 집에 가자, 노래방에 가자, 영화관에 가자... 그리고 이 요구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어요.”

    “그랬군요.”

    겉으로는 박한희의 사연에 동조했지만, 그 선배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선배의 후광을 노리고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지.’

    한쪽의 주장만 듣고 선동당하면 안 된다.

    그러나,

    “최근에 집에 데려다준다면서 저를 차에 태우더니 이상한 길로 간 적이 있었어요.”

    “......”

    “덜컥 겁이 난 저는 선배의 차가 신호등에 걸려서 멈췄을 때 도망쳤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선배의 모든 행동이 두려워졌어요.”

    “흠...”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내가 아닌 경찰에 도움을 청하는 게 순리에 맞지 않을까?

    그래서 질문했다.

    “경찰이나 변호사에게 상담을 해보셨나요?”

    “그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 뒤에는요? 선배는 경고 정도로 끝나겠지만, 눈 밖에 난 저는 선수 생활을 못 하게 될 거예요.”

    “아...”

    나는 선배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남해수 씨랑 결혼할 당시에 박한희 양은 모델이었지!’

    달리기를 좋아한 그녀는 어떤 계기로 육상선수를 포기했다.

    그 계기가 실력 부족이 아닌 선배의 횡포라면?

    앞뒤가 맞았다.

    “강문수 선수의 기록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서 쉬쉬하고 있지만, 올림픽을 휩쓸 운동 천재란 소문이 벌써 돌고 있어요.”

    “헤에~”

    그건 몰랐다. 너무 조용해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도와주세요.”

    “수많은 남자 중에서 저를 선택한 이유는 이해했습니다.”

    “......”

    “사귀는 척하면서 보호해달라는 거죠?”

    “네...”

    박한희는 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민인걸.’

    감정을 호소하는 그녀의 사정은 나를 흔들 수 없었다.

    그런 내 고민은 딱 하나.

    다른 인간의 탈을 쓴 남해수 씨를 자극하려면 ‘현실의 아내’가 위험한 편이 좋을까?

    그뿐이다.

    “어머! 잔이 비었네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카페모카 아이스... 앗!”

    “네! 주문하고 올게요~”

    잽싸게 일어선 박한희가 말릴 틈도 없이 카페 점원에게 달려갔다.

    “.....”

    “드세요!”

    “...잘 마실게요.”

    눈앞에 놓인 냉커피가 독이 든 성배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박한희가 꿈을 포기할 위기에 빠지면 ‘미래의 남편’이 달려와서 도와주지 않을까?

    혹은, 그녀가 육상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예정대로 모델이 된 후에 찾아올 가능성도...

    “편하게 불러도 될까?”

    “아! 네!”

    “한희도 편하게 불러.”

    “정말 고마워!”

    “고맙긴. 나야말로 멋진 여자친구가 생겨서 기쁜걸.”

    “멋진?”

    “예쁘다고.”

    다른 인간의 탈을 쓴 남해수 씨가 질투해주길 빌어보자.

    * * *

    감독과 관계자들은 올림픽이 가까워질수록 선수들의 자기관리를 무척 신경 쓴다.

    흡연, 음주, 불법, 여행, 도박...

    전염병에 걸리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기에 외출이 필연적인 연애도 좋지 않게 보고 있다.

    “팔 벌리고 가만히 계세요. 소독약을 뿌릴게요.”

    “또요?”

    “밖에 나갔다가 오셨잖아요? 방역 방침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자주 뿌리는 것 같은데...”

    “이해해주세요. 강문수 선수가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면 옷을 벗게 될 분들이 많아요.”

    “아, 네.”

    박한희의 예언은 단 이틀 만에 현실이 됐다.

    (대한민국 슈퍼보이 강문수!)

    (올림픽 최고의 기대주!)

    (얼굴 빼고 다 가진 선수!)

    (강문수 선수의 비공식 기록들...)

    (정부는 강문수 수호에 총력!)

    ......

    전폭적인 지지와 관심.

    약물, 강화인간, 외계인 같은 의혹도 덩달아 많아졌지만, 어울려줄 마음은 없었다.

    찍찍!

    방역 요원의 도움으로 소독약을 온몸에 뿌린 후, 선수촌 육상경기장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 오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요! 강문수 선수. 소독해둔 1번 트랙을 이용하면 됩니다.”

    “네.”

    다른 선수들은 내가 이용할 예정인 1번 트랙이랑 멀리 떨어져서 훈련하고 있었다.

    첫째도 방역! 둘째도 방역!

    올림픽에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이 확실한 나의 안전에 굉장히 신경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수야!”

    박한희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모두에게 보란 듯이.

    “열심히 해.”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 보이며 호응해줬다.

    하지만 진짜로 사귀는 건 아니기 때문일까? 꿈속에서 송선영을 볼 때만큼 설레지 않았다.

    “...강문수 선수.”

    “네.”

    새하얀 방역복이 무척 답답해 보이는 감독을 돌아봤다.

    “박한희 선수랑 혹시 사귀나?”

    “며칠 됐습니다. 한희의 친언니가 제 수영을 봐주거든요.”

    “흠... 그렇군.”

    “문제가 있을까요?”

    “아니. 둘이 친한 것 같아서 그냥 물어봤네.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네.”

    별거 아니라는 감독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그 의미는?

    ‘와! 보복 한번 빠르네!’

    박한희가 남자친구였던 선배에게 반항하자마자 선수 명단에서 빼버리려는 움직임.

    ‘슬쩍 물어볼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비공식 세계신기록을 세운 후에 말했다.

    “감독님.”

    “...어? 아! 정말 빠르군! 건강만 유의하면 되겠어!”

    “한희는 잘 뛰는 편인가요?”

    “그건... 내 담당이 아니라서 모르겠군. 왜? 같이 가고 싶어서?”

    “가능하다면요.”

    내가 올림픽을 묻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박한희 선수의 실력만 된다면 못 갈 이유가 없지.”

    “그렇군요.”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실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추측에서 확신으로!

    여자에게 차인 남자의 치졸한 복수에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때,

    “강문수가 누구야...!”

    육상경기장으로 들어온 청년이 분노에 찬 어조로 나를 찾았다.

    “너는 누군데?”

    “한희의 남자친구다! 아! 네가 강문수로군! 딱 한 번만 말한다. 내 눈에 띄지 마라.”

    “흐음~”

    이 남자의 발언도 놀랍지만, 그를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선수를 관리하는 감독마저도?

    조용했던 심장이 뛰었다.

    “서, 선배...”

    “너는 조용히 해.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박한희를 무섭게 노려보는 자칭 남자친구.

    나는 그를 불렀다.

    “야. 거북이. 내 여자친구에게 명령하지 말아 줄래?”

    “뭣?! 이 새끼가 죽고 싶나...!”

    “죽여봐. 거북아. 나를 잡을 수 있다면.”

    “넌, 죽었어!”

    탁!

    눈이 뒤집힌 거북이가 토끼에게 돌진했다.

    * * *

    “농담이지? 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인간이라고?”

    “이 새끼가...!”

    국가대표로 뽑힌 만큼 제법 빠르긴 했으나 잠깐뿐이었다.

    “거북아. 언제 잡을래?”

    “헉헉!”

    금방 지쳐버린 그는 내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심 썼다.”

    나는 팔을 쭉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에 섰다. 그리고 그 짧은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이익...!”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장난치듯 농락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굴욕감에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

    그는 나를 잡기 위해 발악하고 또 발악했다.

    철퍼덕!

    그러다가 다리를 접질리면서 고꾸라졌다.

    “야. 언제 잡을래?”

    “아아아아!”

    승자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랑 눈이 마주친 남자는 원통하다는 듯이 괴성을 질렀다.

    강자에서 약자로.

    천재서 둔재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력감을 그는 견디지 못했다.

    “우냐?”

    “......”

    나는 약자를 괴롭히는 짓을 즐기지 않는다.

    마법소년 최강민에게 벌레처럼 짓밟혀봤으니까. 같은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야. 거북이. 지금부터 상상력을 발휘해봐. 동메달도 힘든 너 때문에 내가 올림픽 금메달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철저하게 밟아줄 생각이다. 약자의 마음을 이해할 때까지.

    “미쳤냐?!”

    “내가 못할 것 같아? 어째서 못한다고 생각해?”

    “메달을 포기할 리가...!”

    “포기한다고 한 적 없어. 아무도 그걸 바라지 않을 테고. 너만 사라질 뿐이지.”

    “......”

    뒤늦게 내 의도를 눈치챈 남자는 눈을 부릅떴다.

    “이해했으면 앞으로...”

    “미친놈. 그럴 일은 절대 없다.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너야말로 조심하는 게-”

    “제발 해줘. 이민 가서 다른 국적으로 메달 따게.”

    “아...?”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나는 이 세계의 어디를 가더라도 이방인.

    두려울 게 없다.

    “그러면 네 아버지는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옷을 벗겠지. 상상만으로도 두근두근하지 않냐?”

    “허세는...!”

    “날 환영해줄 나라는 많아. 금메달을 50개쯤 딸 예정이거든.”

    “흑...”

    자신했던 협박마저 내게 안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그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거북아. 토끼를 이기고 싶으면 조용히 기어가야지.”

    “......”

    “내 눈에 띄지 마. 올림픽에 나가고 싶다면.”

    나는 착한 토끼가 아니다.

    * * *

    전염병의 확산과 우려에도 올림픽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소식!

    그것은 내가 꿈의 세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조금 불안했다.

    이 지옥 같은 세계에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문수야. 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거야?”

    “재미있어서.”

    “정치가 재미있어?”

    선배가 조용해진 뒤에도 내 여자친구처럼 행동하는 박한희.

    틈날 때마다 관심을 표현하는 그녀는 뉴스를 보며 껄껄 웃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신기하잖아.”

    “뭐가?”

    “이걸 봐. 정치인이 고급 펜션에서 성접대 받은 사실을 부인하다가 들통났어. 안 신기해?”

    “어... 전혀. 흔한 일인걸.”

    “그렇구나.”

    박한희와 나는 사는 세계가 너무 달랐다.

    ‘어쩌면 나도...’

    P의 적성검사기가 없는 이 세계에서 오래 생활하면 익숙해질까?

    구시대를 옹호하던 서혜주 과장님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문수야.”

    “왜?”

    “뉴스... 계속 봐야 해?”

    “그건 아닌데,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잔소리해서.”

    정든 호텔을 떠나서 선수촌으로 숙소를 옮긴 뒤부터 24시간 감시받는 기분.

    다른 선수들은 가족이 결혼한다거나 아프다는 등의 이유로 심심찮게 외출하지만, 나는 핑계 댈 가족도 없었다.

    ‘언제쯤 오려나~?’

    남해수 씨가 나를 찾아와주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처지다.

    “같이 뛰고 싶어.”

    “이 시간에?”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가로등이 있잖아.”

    “흠. 너무 늦어서 보는 사람도 적을 텐데...”

    “남들 앞에서 사귄다고 광고할 목적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너랑 같이 뛰고 싶어.”

    “같이 훈련하자고?”

    “아니.”

    “그러면 왜?”

    그녀의 의도를 모르겠다.

    “좋아하니까.”

    “하아?”

    이건 무슨 소리야?

    “문수야. 우리, 진지하게 사귀지 않을래?”

    “미안.”

    “...이유를 말해줘.”

    “헤어진 여자친구를 아직 잊지 못해서. 누군지는 비밀.”

    “진짜야?”

    “믿지 않아도 돼. 나는 거북이처럼 강요하지 않아.”

    “...믿을게.”

    “이런!”

    매몰찬 내 답변에 박한희의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괘, 괜찮아. 훌쩍!”

    “......”

    여자애를 울리고 말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잘못인가?

    모르겠다.

    “문수야.”

    “미안.”

    “그만 사과해도 돼. 네가 사과할 일도 아니고. 같이 바람 쐬러 나가주지 않을래?”

    “그건 좀...”

    이 어색한 분위기로?

    하지만 토끼처럼 눈이 새빨개진 박한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뉴스보다 재미없어?”

    “얼른 나가자!”

    또 울리기 싫었던 나는 백기를 열심히 흔들었다.

    “몰랑~”

    “...아차! 모자를 깜빡할 뻔했네!”

    “몰랑?!”

    “어딜 빠지려고.”

    몰랑거리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모자를 잽싸게 머리 위에 올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툭.

    문틈 사이에 끼어 있던 종이가 내 발밑에 떨어졌다.

    “이건...”

    “왜?”

    “편지네.”

    “설마, 고백편지?!”

    내 탓에 신경이 매우 예민해진 박한희가 흥분했다.

    “궁금하면 봐도 돼.”

    “정말?”

    “모르는 남자가 보낸 거야.”

    드디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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