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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65화 (66/232)
  • 065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교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반 대표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달리기는 반에서 4위, 5위 정도.

    체육 시간에 선생님이 심판을 맡은 축구, 야구, 농구 등도 못 한다는 소리를 겨우 안 듣는 수준이었다.

    그랬던 내가,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괴물인가...?”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할 예정인 육상선수들을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전염병이 심해져서 올림픽이 연기되거나 아예 취소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취소만 아니면 내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왜냐?

    올림픽이 늦어질수록 더욱 많은 종목에 도전해서 참가권을 따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님. 약속대로 제 자리를 비워주십시오.”

    “허허허허...”

    자신이 자랑하던 선수들의 패배에 충격받은 감독은 현실을 부정하듯 웃기만 했다.

    기존의 육상선수들보다 부족한 기술과 요령 등을 몸뚱이의 능력만으로 찍어 눌렀으니!

    군인이 총을 든 어린애에게 진 기분이 아닐까.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잘 뛰는 건 너무나 당연하니까요.”

    “당연?!”

    “우리를 놀리는 거냐!”

    “이 자식이...!”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도 무작정 발끈하는 육상선수들.

    수영이나 잘하라고 얕잡아보던 그들의 얼굴은 구겨진 자존심만큼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여러분은 멈추면 온몸이 토막 나는 경험을 해보셨나요? 저는 살기 위해 빨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잡히면 죽으니까요.”

    스케이트 선수 뺨쳤던 검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얕보는 거냐!”

    “우리도 죽을 만큼 훈련해!”

    “사기 치지 마라!”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올림픽 단일 종목 중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이 걸린 육상을 양보하거나 포기할 순 없으니까.

    메달의 숫자가 수영보다 2배 가까이 많다!

    100m, 200m, 400m, 800m, 1.5km, 5km, 10km, 마라톤.

    20km, 50km 경보.

    장애물 넘기, 높이 뛰기, 멀리 뛰기, 장대높이뛰기, 세단뛰기...

    멀리 던지는 종목도 다양하다. 원반, 해머, 창, 투포환.

    육상만 싹쓸이해도 남해수 씨의 기록에 상당히 근접할 수 있다.

    “어흠! 강문수 선수. 자네의 실력을 인정하지. 내일 오전 7시부터 훈련에 참여하도록.”

    “그건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지?”

    “제가 참가하려는 올림픽 종목이 좀 많거든요. 수영은 모든 종목. 육상도 가능하면 전부 도전해볼 예정입니다.”

    “터무니없는...!”

    “그리고 내일은 오전에 펜싱, 오후에는 태권도 약속이 있습니다. 모레에도 일정이 꽉 잡혀 있고요.”

    “......”

    나의 원대한 계획을 들은 감독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어이없겠지.

    하지만 P의 적성검사기가 없는 구시대이기에 나는 자신 있었다.

    ‘못할 이유가 없지.’

    적성이 육상선수였던 남해수 씨가 수영의 황제가 됐으니까. 무당인 내가 못하란 법은 없다.

    “강문수 선수. 조금 엉뚱한 질문일 수 있지만...”

    “네.”

    “우리랑 똑같은 인간인가?”

    “당연히 인간이죠. 정말 엉뚱한 질문이시네요.”

    “그, 그렇지. 하하...”

    “하하!”

    “몰랑몰랑!”

    현대의 1군 선수들이랑 비교하면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 * *

    “자세가 제멋대로잖아! 누구에게 배운 거야...!”

    펜싱 감독이 발끈했다.

    “그래서 무효라는 건가요, 반칙이란 건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검술을 배웠다.

    날붙이로 사람의 생명을 효과적으로 빼앗는 방법을!

    ‘발렌타인...’

    그녀랑 함께했던 시간은 내 인생을 통틀어서 손에 꼽을 만큼 즐겁고 행복했다.

    우리의 대화 내용은 평범한 연애랑 거리가 매우 멀긴 했지만...

    “강문수 선수!”

    “아, 네.”

    “제 설명을 듣고 있습니까? 플뢰레와 에페는 찌르기만 가능합니다.”

    “찔렀는데요?”

    “...에페는 전신이 유효타지만, 플뢰레는 상체 찌르기만 득점으로 인정됩니다.”

    시작하자마자 얼굴이 찔린 펜싱선수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 하죠.”

    “......”

    삑!

    이번에는 플뢰레의 칼끝이 상대방의 상체를 제대로 찔렀다.

    반응할 틈도 안 주고 순식간에!

    “아...?”

    선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뒤늦게 깨닫고 망연자실했다.

    “15점이었죠?”

    “......”

    삑! 삑! 삑!

    하지만 몇 번을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15 대 0으로 압승.

    전쟁터에서는 100번 싸워서 99번 이겨봐야 소용없다. 전부 이기고 살아남아야만 진정한 승자.

    그 각오로 진지하게 임한 나는 단 한 번의 실점과 무효한 타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펜싱선수들의 노력과 실력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운동이니까.’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없는 선수들은 나를 이길 수 없다.

    왜냐?

    꿈이었다고는 해도 수많은 인간을 죽인 연쇄살인마였던 나의 살기(殺氣)를 견디기 힘드니까.

    너를 꼭 죽이겠다는 의지!

    아무리 단련됐더라도 처음 겪어보는 ‘악의(惡意)’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살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나저나...

    ‘펜싱선수들은 하나 같이 미남밖에 없네!’

    육상 때처럼 선수들을 위로하거나 칭찬해서 오해받긴 싫었기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긴 팔다리, 날렵한 체형...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 등장하는 미남들이 절로 떠올랐다.

    옆에 선 내가 초라해진달까!

    경기에서 이기고도 진 기분이다.

    “어흠! 강문수 선수.”

    “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우리랑 똑같은 사람인가?”

    “당연하죠.”

    남들이 못해본 다채로운 경험을 했을 뿐이다. 죽을 뻔한 적은 있어도 정말로 죽어본 사람은 없잖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송선영도 아스팔트에 충돌하기 직전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다고 보긴 힘들다.

    “훈련은 안 나와도 되네.”

    감독은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펜싱선수들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함께 훈련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고 판단한 걸까.

    아무튼,

    “이만 가볼게요. 오후에도 약속이 잡혀 있어서.”

    “편할 대로 하시게.”

    “......”

    감독이 나를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것 같아서 시원섭섭했다.

    “몰랑...”

    “고마워.”

    위로해주는 친구를 머리 위에 올리고 다음 체육관으로 향했다.

    * * *

    쿵!

    체육관 천장이 보였다. 내 몸은 체육관 바닥에 깔린 푹신한 매트에 누워있고.

    “...어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대련을 시작하자마자 호기롭게 돌격한 내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당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하! 괴물 같은 선수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더니! 소문만큼 움직임이 좋군!”

    허리에 검은색 띠를 맨 새하얀 무복의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태권도 감독 겸 사범.

    태권도 종주국인 대한민국의 전직 국가대표로, 그는 내게 자유롭게 덤벼보라고 제안했다.

    그 결과가 이것!

    내 손에 검이나 창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겠지만, 맨손인 건 태권도 감독도 마찬가지.

    나의 패배다.

    “한 번만 더 부탁합니다.”

    “놀라운 체력이군. 보통은 숨쉬기도 힘들 텐데. 휴식을 좀 가진 후에 다시...”

    “저는 괜찮습니다.”

    “흠. 그렇다면 얼마든지 오게.”

    “...네.”

    이번에는 거리를 조절하면서 신중하게 공격했다.

    쿵!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만!

    “......”

    “반응속도가 뛰어나군. 기술만 제대로 배우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겠어.”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가려고?”

    “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패배한 나를 비웃지 않은 선수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한 후,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탁.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몰랑?”

    “그러게. 너무 자만했어.”

    펜싱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발렌타인에게 배운 ‘귀족 검술’이랑 매우 흡사했다.

    유효한 타격 범위, 점수, 규격화된 무기와 복장...

    규칙만 이해하면 됐다.

    ‘무당은 귀신을 제압하는 전투적인 재능도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배우지 않은 무술을 본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 ‘적성’이 내게는 없었다.

    “몰랑?”

    “그러게. 내가 구시대 선수들을 너무 만만하게 본 모양이야.”

    태권도, 유도, 레슬링, 권투 같은 무술 계통만이 아니다. 공이나 라켓 같은 도구를 쓰거나 기교가 필요한 종목은 전부 어려웠다.

    농구를 예를 들어보자.

    농구는 커다란 공을 튕기면서 빼앗기지 않고 상대방의 농구 골대에 넣어야 한다.

    이게 쉬울까?

    “몰랑~”

    “놀리지 마.”

    농구도 도전해보고 싶어서 밤새 혼자 연습해봤는데, 공만 줍다가 끝날 만큼 처참했다.

    즉, 개헤엄 수준이던 내가 송선영에게 수영을 전문적으로 배웠을 때처럼 시간과 노력이 필수!

    무당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어렵구먼~”

    “몰랑~”

    펜싱도 방심할 수 없었다.

    자주 대결하면 선수들이 내 살기(殺氣)에 익숙해질 테니까. 올림픽에 무사히 참가하려면 최대한 펜싱 대결을 피해야 하리라.

    우우웅-

    “이번에는 어떤 감독이... 음?”

    호주머니에서 진동하는 구시대 스마트폰을 꺼낸 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박한희: 바쁘세요?」

    더는 만날 이유가 없는 ‘남해수의 아내’에게서 문자가 온 탓이다.

    ‘뭐지?’

    나는 당신이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의도를 모르겠다.

    「박한희: 입원한 남자친구가 신경질을 냈어요.」

    「박한희: 그래서 싸웠어요.」

    「박한희: 이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다.”

    여자가 남자친구랑 싸웠다는 얘기를 다른 남자에게 하는 이유를.

    어느 방향으로 보더라도 좋은 그림이 안 나왔다.

    탁탁.

    바로 답장을 보냈다.

    「강문수: 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강문수: 도움을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내 목적이랑 상관없는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니까.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이젠 됐겠지?

    기다려도 답장이 없어서 방심했을 때, 스마트폰이 또 진동했다.

    우우웅-

    「박한희: 도와주세요.」

    “......”

    간절함이 묻어난 그녀의 문자를 보자마자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짧으나 강렬한 한마디!

    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탁탁.

    「강문수: 어째서 저입니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면 단칼에 거절하리라.

    「박한희: 강문수 선수가 국가대표인 남자친구보다 빠르니까요.」

    “흠...”

    그녀의 친언니가 비밀이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생 박한희가 선배랑 억지로 사귄다고...

    「강문수: 남자친구랑 어쩌다가 싸웠나요?」

    「박한희: 곧바로 병원에 안 오고 다른 남자에게 물통을 줬다고 화를 냈어요.」

    “아니...”

    내가 남자라서 그런 걸까? 잘못은 화를 낸 남자친구가 아닌 그녀에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좋아하지도 않는 선배의 여자친구 역할을 강요받은 거라면?’

    모든 잘못은 남자친구를 자칭하는 선배에게 있다.

    즉,

    「강문수: 또 광장에서 만나도 괜찮을까요?」

    그녀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저번에는 호텔 아이스크림, 이번에는 물통인가...”

    앞으로는 모르는 여자가 주는 공짜 호의를 절대 받지 않으리라!

    「박한희: 네!」

    「강문수: 그러면 광장에 도착하기 20분 전에 문자 남겨주세요.」

    「박한희: 뒤에 있어요.」

    “음?”

    선수촌에서 호텔까지 느긋하게 걸어가는 중이던 나는 멈칫했다.

    ‘내 뒤에 있다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서 뒤편을 봤더니,

    “안녕하세요!”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박한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매우 성가신 문제에 휘말렸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몰랑~”

    친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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