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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64화 (65/232)
  • 064화

    [4장-4절] 욕심이 참 많습니다

    인류학자, 사회학자, 수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지만, P의 적성검사기를 쓰지 않고 자신의 적성을 찾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수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충 이런 수학식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1/직업의 수 x 100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직업의 수’인데, 여기서부터 학자들마다 생각이 달라진다.

    교사를 예로 들어보자.

    유치원생 교사, 초등학생 교사, 중학생 교사, 고등학생 교사, 대학생 교사...

    가르치는 학생의 나이로 직업이 구분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 전문과목으로 또 세분화된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외국어, 역사, 체육, 미술, 음악, 수학, 국어, 도덕, 가정, 기술...

    학생의 나이와 가르치는 과목만으로도 벌써 100가지 경우의 수를 훌쩍 뛰어넘는다.

    즉, 교사만 따져도 자신의 적성을 발견할 확률은 1% 미만!

    여기에 다른 직업까지 포함해서 확률을 계산하면?

    P의 적성검사기 없이는 절대 못 찾는다고 결론이 나온다.

    “어떻게 이런 기록이...!”

    “허어! 말도 안 되는...”

    “정녕 사람인가...?”

    마라톤 우승을 계기로 기회를 얻은 나는 선수촌 수영장에서 기록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압도적!

    적성이 수영선수인 괴물들만 모인 1군은 이기지 못하지만, 사람이 상대라면 질 수가 없었다.

    일류대학 꼴찌가 이류대학에 편입해서 1위를 한 심정이랄까?

    기쁘지 않았다.

    “다른 수영법을 가르쳐주실 감독님이 계실까요?”

    “몰랑?”

    수영의 황제가 되려면 접영, 평영, 배영, 개인혼영까지 올림픽 금메달을 싹쓸이해야 한다.

    “헉! 내가 가르쳐주지!”

    “무슨 소리! 나에게 배우게!”

    “감독 경력만 40년일세!”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은 구시대나 현대나 똑같았다.

    신경전을 넘어서서 진짜 싸울 기세인 수영 감독들.

    나를 깔보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난처하네~”

    “몰랑~”

    마음에 안 드는 감독 중에서 골라야 하기 때문일까?

    내가 제비뽑기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강문수 선수. 저에게 배워보시는 건 어떤가요?”

    “어... 감독님이신가요?”

    감독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젊은 여성이었다.

    “지난 올림픽에서 국가대표로 출전했었습니다.”

    “와!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런데 갑자기 왜...”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 올림픽은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은퇴할 생각이거든요. 기량도 예전 같지 않고.”

    “아, 네.”

    현재 감독들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가르쳐본 경험이 없는 선수에게 배우는 건 더욱 꺼려졌다.

    “거절하셔도 돼요. 사실은... 제 동생을 한 번 더 만나주셨으면 해서 말을 걸었던 거였어요.”

    “한 번 더?”

    “네. 마라톤 결승선에서 물통을 건넨 여자애를 기억하세요?”

    “아! 기억합니다. 아무도 축하를 안 해줘서 무안했거든요. 덕분에 정말 고마웠습니다.”

    나보다 조금 어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애였다.

    “제 동생에게 직접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분명 기뻐할 겁니다.”

    “그럴게요.”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나는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동생의 이름은 박한희입니다. 어릴 적부터 달리는 걸 좋아해서 육상선수를 준비 중이에요. 마라톤도 좋아하는데, 몸이 안 좋아서 참가하지 못했어요.”

    “......”

    “강문수 씨?”

    “...아! 네. 박한희 양이군요? 박한희. 입력했습니다.”

    박한희.

    그 이름을 듣자마자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남해수의 아내 이름이잖아!’

    이름만 같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일축했다.

    왜?

    남해수 씨가 결혼한 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체육대학 출신 동료의 여동생에게 7년 동안 구애한 끝에 결혼했다고...

    국가대표의 여동생 박한희.

    남편인 남해수 씨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도 똑같았다.

    ‘틀림없어.’

    공통점만 보더라도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일 수가 없었다.

    톡톡.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남해수의 아내’에게 스마트폰 문자를 써서 보냈다.

    「강문수: 안녕하세요. 강문수입니다. 언니분께 연락처를 받고 문자를 남깁니다.」

    「강문수: 시간이 되실 때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남해수 씨가 다른 인간의 탈을 썼다고 해서 마음도 남해수가 아닌 건 아니다.

    ‘그도 남자라면...’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걸 허용할 리 없다.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잘 부탁합니다.”

    “어머! 저에게 정말로 배워보실 생각이세요?”

    “네. 박한희 양의 행동에 감동했거든요.”

    나는 누가 감독을 맡아도 올림픽 금메달 확정이다.

    그렇기에 감독 경력이나 성과가 전혀 없는 그녀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을 터.

    그 증거로, 내 승낙을 듣자마자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동생에게 고마워할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잘 부탁합- 음?”

    우우웅!

    그때, 호주머니 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벌써?’

    답장이었다.

    「박한희: 강문수 씨. 내일 시간 되세요?」

    「박한희: 저는 수업이 끝나는 3시 이후에 언제든지 돼요.」

    「강문수: 5시에 선수촌 광장에서 어떠신가요?」

    선수촌 광장.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약속장소.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거절하거나 장소를 바꾸길 원하리라.

    「박한희: 좋아요. 내일 5시에 광장에서 뵐게요.」

    “...정말로 기뻐하는 것 같네요.”

    이유를 모르겠다.

    박한희의 언니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고민하듯 보이더니,

    “사실...”

    “네.”

    뒷말을 흐리면서 운을 뗐다.

    “동생에게는 제가 말한 사실을 비밀로 해주세요.”

    “네. 비밀로 할게요.”

    “제 동생에게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억지로 사귀기 시작한 육상부 선배가 있어요.”

    “억지로요? 왜...”

    “그 애는 예전부터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귀찮을 정도로.”

    “아, 네.”

    수영의 황제 남해수의 아내가 모델 출신이란 사실을 깜빡했다.

    “그 물통도 사실은 선배가 준비하라고 강요한 거예요. 결승선을 통과하는 자신에게 달라면서.”

    “헛! 그건 좀...”

    내가 받으면 위험한 거 아니야?

    “괜찮아요. 마라톤 도중에 탈진으로 쓰러져서 근처 병원에 실려 갔거든요.”

    “......”

    귀찮은 일에 휘말린 기분이다.

    * * *

    내 목적은 꿈에 사로잡힌 남해수 씨를 찾아서 설득하는 것이다.

    그의 아내 박한희는?

    이름, 나이, 직업, 얼굴 정도만 알 뿐이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도 포함해서.

    그 이상의 정보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방 먹었네!’

    남해수란 인물에 관해서만 상세하게 조사했는데, 꿈의 세계에 남해수가 없는 황당한 상황!

    그가 즐겨 읽었다는 무협지 지식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선수촌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던 소녀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앳된 외모랑 달리 대학교 신입생.

    나랑 동갑인 셈이다.

    “이런! 제가 기다리게 했네요.”

    “아니에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멋대로 일찍 출발했어요. 약속한 5시도 아직 안 됐고요.”

    깊게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얼굴은 눈과 눈썹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여성스러움이라고 할까?

    여기에 그녀의 수줍은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었다.

    “물통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목이 정말 말랐었거든요.”

    거짓말이다. 땀을 한 방울도 안 흘린 탓인지 갈증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박한희는 별 의심 없이 맞장구쳤다.

    “감사하긴요. 그때는 저도 깜짝 놀랐어요. 마라톤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는데도 축하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모두가 당황했을 테니까요.”

    송선영에게 차인 뒤부터 또래의 여자는 내게 어려운 생물이었지만,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발렌타인은?

    호위기사였던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게 맞춰줬기 때문에 논외로 쳐야 한다.

    “몰랑몰랑~”

    “......”

    얌전히 있어.

    “아까부터 궁금했었는데, 머리에 그건 뭐예요?”

    “이건... 탈모를 예방해주는 모자입니다. 몰랑한 감촉이 두피와 모공을 편안하게 해주죠.”

    “몰랑~”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생각해봐도 설득력이-

    “저... 탈모가 있으세요?”

    믿는다고?!

    “아뇨! 없습니다! 감촉이 좋아서 머리에 쓸 뿐이죠. 못 믿으시겠으면 한 번 써보실래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네.”

    “몰랑.”

    꾹 눌러 쓴 모자를 벗은 박한희가 슬라임을 머리 위에 얹었다.

    ‘미인이네.’

    마스크까지 벗어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남해수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

    “와! 정말로 몰랑하네요~!”

    “몰랑~!”

    신기할 정도로 간단히 넘어간 슬라임 덕분에 우리의 어색한 분위기가 단숨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박한희의 모든 언행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다른 인간의 탈을 쓴 남해수 씨를 유인하려면 그의 아내랑 가까워질 필요가 있으니까.

    분노한 남편이 달려오게... 어라?

    내가 굳이 그 악역을 자처할 필요가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박한희 양.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뭔데요?”

    “남자친구가 있나요?”

    “...있어요. 왜요?”

    의외로 그녀는 남자친구의 존재를 순순히 인정했다.

    ‘언니의 오해인가?’

    친자매가 사생활을 전부 공유하란 법은 없으니까. 동생이 육상부 선배랑 억지로 사귄다는 친언니의 주장은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다.

    그 근거로,

    “최근에 여자친구랑 2연속으로 헤어졌거든요.”

    “어머! 어쩌다가요?”

    “첫 번째 여자친구는 제가 싫은 소리를 많이 해서 차였고, 두 번째는 직장 동료였는데... 제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헤어졌어요.”

    또 우울해졌다.

    “강문수 씨는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벌써 회사에 취직하셨어요? 무슨 회사요?”

    “보안상의 문제로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투자회사의 자문위원으로 일했습니다.”

    거대한 제국을 집어삼킨 공작 가문의 참모였다.

    “와! 그러면 사무직이면서 운동도 잘하시는 거예요?”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안 받아줘서 어쩔 수 없이 투자회사에 들어갔죠.”

    “그러셨구나~”

    “몰랑~”

    박한희의 현재 남자친구는 남해수 씨가 아니다.

    수영의 황제 남해수의 적성은 육상선수니까. 꿈의 세계에서 육상선수가 될 생각이었다면 ‘남해수’의 몸을 버릴 이유가 없다.

    ‘이상하네.’

    미래의 아내가 다른 남자랑 연애하고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저... 강문수 씨.”

    “저도 박한희 양을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

    “아, 아뇨! 그런 얘기가...!”

    “......”

    함께 선수촌의 산책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했다. 시간도 제법 지나서 노을이 보이고...

    할 말이 더 있나?

    우리가 연인 사이라면 여기서 좀 더 이어가겠지만,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강문수 씨. 강문수 씨는 달리는 걸 좋아하세요?”

    “잘 달리긴 하지만, 목적 없이 달리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양어깨가 축 처질 정도로 실망하는 박한희.

    그녀에게 점수를 따려면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거짓말해야 맞지만,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친해질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인간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남해수가 ‘전(前) 아내’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녀를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슬슬 쌀쌀해지네요.”

    그러니 이만 집에 가시죠?

    내 의도를 눈치챈 그녀가 다급히 용건을 꺼냈다.

    “혹시... 이상한 질문이란 건 저도 잘 알지만, 육상선수가 되실 생각은 없으세요?”

    “있습니다.”

    “수영 훈련만으로도 정신없다는 건 알지... 예?”

    내가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박한희가 당황했다.

    “이미 신청해뒀습니다. 제가 올림픽 메달 욕심이 많거든요. 육상, 펜싱, 수영, 자전거, 카누, 태권도, 레슬링, 유도, 복싱...”

    “자, 잠깐만요! 농담이시죠? 그 많은 종목을 다 하신다고요?!”

    “네. 기록만 잘 나오면 못할 이유가 없죠.”

    남해수 씨의 메달 숫자를 단시간에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

    “세상에나...”

    “박한희 선수도 올림픽에 출전했으면 좋겠네요.”

    “......”

    “그때 또 봐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덕담을 남긴 후에 몸을 돌렸다.

    “어디 가세요?”

    “육상경기장이요. 잔인한 짓을 하러 갑니다.”

    수영의 황제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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