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4장-2절] 과거에는 달랐다
외계인, 과학자, 의사, 미래인...
다양한 추측이 끊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존재 P.
그가 개발한 적성검사기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의 시대, 구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옥이던데.’
역사책에 기록된 구시대의 설명을 보면 그랬다.
국민을 팔아먹고 권력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세금을 내고 사는 세상!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가 곧 만나게 될 수영의 황제, 남해수 씨는 구시대를 대표하는 산증인이야.”
“정말 존경스럽네요.”
그 지옥 같은 시대를 버틴 모든 사람이 존경스럽다.
“의외인걸.”
섬에 단 하나뿐인 병원으로 가는 무료버스에 함께 탄 서혜주 과장님의 뜬금없는 한마디.
“뭐가요?”
“적성으로 차별받은 너라면 구시대를 더 좋아할 줄 알았거든.”
“뭐... 제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만스럽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범죄자와 사기꾼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싶진 않아요.”
“모범적인 답변이네.”
“과장님은 생각이 다르세요?”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지.”
“장단점이 있다는 뜻인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을 좋아하고 만족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세상은 적성 외의 선택지를 허락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지.”
“아...”
“구시대보다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란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건 그렇죠.”
구시대의 올림픽 최고기록들은 3군 선수들도 가볍게 넘길 수준!
스포츠 외의 다른 분야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도...’
적성을 무시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하셨다.
탁.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입구부터 분위기가 험악하네요.”
“남해수 씨의 일가(一家)야. 재산 상속 문제로 자식들의 사이가 좋지 않거든.”
“아하!”
“현재는 국제수영연맹에서 남해수 씨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어. 하지만 유언도 없이 생(生)을 마감하시면 어떻게 될까?”
“어... 자식의 숫자만큼 똑같이 나눠 갖겠죠.”
“쉽게 생각하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효자와 불효자가 차등 없이 똑같이 유산을 나눠야 할까?”
“어?”
듣고 보니 그랬다.
“여기에 연맹까지 껴있어. 남해수 씨가 사후(死後)에도 재산을 연맹에 맡긴다는 해석이야. 나라에서도 그걸 은근히 바라고 있고.”
“와...”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해수 씨가 직접 재산을 정리하는 거야.”
“정리하려면 일단 깨워야겠네요?”
“그렇지.”
“......”
내가 나설 의무나 의리는 없다.
“해볼래?”
“치료비로 얼마 준대요?”
하지만 돈이 된다면 나설 의향이 있다.
* * *
P의 적성검사기 덕분에 아인슈타인, 테슬라, 뉴턴 같은 천재 과학자가 무더기로 배출됐다.
여기에 세금을 횡령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이때부터 인류의 문명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
“와! 연세가...”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기대수명 또한 가파르게 상승했다. 역사의 산증인이 흔할 만큼.
물론, 이 혜택도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지만!
“감탄할 필요 없어. 네가 미래에서 가져온 화학식만 풀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살 수 있으니까.”
“그건 좀...”
넓고 깨끗한 병실 침대에 노인이 정자세로 누워있다.
수영의 황제 남해수.
쓰러진 뒤부터 건강이 나빠졌다고 하는데, 겉보기에는 앞으로 20년쯤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때?”
“흠... 어르신의 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어떻게 알아?”
“직감이요.”
“참 편리한 기능이네!”
남해수 씨가 단순한 의식불명이 아님을 확인한 이상, 지금부터는 의학보다 오컬트가 나설 차례.
송선영, 최강민, 김은정.
적지 않게 방황했던 3차례의 경험 덕분에 나도 요령이 어느 정도 생겼다고 자부한다.
“일단... 남해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죠.”
수영의 황제가 아닌 인간 남해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 * *
P의 적성검사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구시대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해수.
병치레가 잦은 약한 몸을 키울 목적으로 시작한 어린이 수영 교실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약한 체력이라니...’
적성이 운동계열인 사람은 떡잎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노력.
그건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거잖아?
모두에게 공평한 24시간 안에 똑같이 노력하면 재능과 투자의 양으로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
즉,
“남해수 씨의 적성은 수영선수가 아니었군요?”
그의 자식과 손자들이 출판한 전기(傳記)를 읽고 내린 결론.
옆에서 함께 조사하는 서혜주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상선수야.”
“아...”
돌고래와 치타가 어떻게 같냐고 따질 수 있겠지만, 역도선수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지 않은가?
남해수 씨의 적성은 육상선수.
여기서 그럴싸한 가능성을 추리할 수 있었다.
“꿈에서 육상선수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어쩌면 수영도 포기하지 않아서 두 종목의 올림픽 메달을 쓸어 담고 있지 않을까!
“너무 낙관적인데? 그분이 노년에 즐겨 읽었던 무협지의 세계로 갈 수도 있어.”
“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갑자기 공부(독서)해야 할 양이 대폭 늘어났다!
‘맛만 보고 나올까?’
지구인지 외계행성인지만 확인하고 바로 자살하는 것이다.
“꿈에서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뇌세포 때문에요?”
“그것도 있지만, 최근에 한 번 죽어서 심장마비가 왔었잖아.”
“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두 가문의 자존심 싸움에 휘말려서 개죽음을 당했었다.
“그 사건을 겪은 후의 수영기록이 눈에 띄게 떨어졌어.”
“......”
“이번만이 아니야. 꿈속에서 최강민 환자에게 살해돼서 심장마비가 왔던 적이 있었지? 그때도 수영기록이 쭉 하락했어.”
“그건... 전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네 과거 기록을 훑어본 감독이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기 전까지는.”
“장서연 감독님이...”
감독이 선수의 몸 상태를 살피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나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정보였다.
계속 몰랐다면?
‘목숨을 하찮게 여겼겠지!’
언젠가는 눈치챘겠지만, 그때는 국가대표로 활동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이 떨어진 후가 되리라.
아무튼,
“심장마비를 겪으면 네 건강이랑 상관없이 육체 능력이 떨어지는 건 확실해.”
“흠. 갑자기 꿈에 들어가기 싫어지네요.”
“선택은 네 자유야.”
“의외네요. 저를 설득하실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의사잖아요.”
“멀쩡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를 의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족끼리 수혈하는 것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됐어. 내가 이 위험성과 후유증을 몰랐을 때, 너를 설득하려고 애썼던 건 사실이니까.”
“뭐...”
나도 그때는 가볍게 생각하고 수락했다.
‘진짜 겁이 없었구나!’
마법소년 최강민 앞에서 꿈이라고 배짱을 부렸으니까.
그 당시의 내 당돌한 태도가 최강민의 마음을 꺾는 데 한몫한 건 사실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할래?”
“흠...”
“꿈에 안 들어가도 돼. 나도 남해수 씨의 주치의가 아니라서 손해 볼 게 전혀 없고.”
거절해도 불이익이나 부담이 전혀 없다는 의미.
“...해볼게요.”
“신중하게 결정한 거 맞아? 네 인생이 걸렸어.”
“남해수 씨가 돌고래나 마법소년만 아니면 됩니다.”
돌고래면 찾기 어렵고, 마법소년이면 설득하기 어렵다.
“너무 낙관적인데...”
“괜찮아요.”
“정말로?”
“네. 돈과 명예를 다 가진 수영의 황제가 무슨 꿈에 사로잡혔는지 궁금하거든요.”
절대로 치료비 때문만이 아니다.
* * *
“...성공.”
병원에서 완벽하게 준비한 후에 남해수 씨의 꿈에 잠입했다.
방심은 금물!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산적이 쏜 화살에 머리가 꿰뚫려 죽을 뻔한 경험이 있으니까.
곧바로 주변부터 살펴봤다.
‘중세는 아닌 것 같고...’
하지만 송선영의 꿈처럼 현재도 아니고, 근미래였던 최강민의 꿈이랑은 더욱 달랐다.
매연으로 뿌연 하늘.
마스크를 착용한 시민들.
화석 연료를 쓰는 자동차.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
지구의 환경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현재와 미래에선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풍경과 골동품!
‘와! 내연기관이라니!’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배기관이 존재하는 자동차’가 도로에 한가득했다.
즉, 남해수 씨의 꿈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구시대.
호주머니를 확인했다.
“음? 이건... 마스크?”
마법소년 최강민에게 썼던 수법을 재활용하기 위해 준비한 스마트폰은 꿈에 반영되지 않고, 그 대신처럼 흰색 마스크 2장이 호주머니에 들어있었다.
꼼수는 실패.
정공법을 써야 했다.
‘일단...’
나를 죄인처럼 쳐다보면서 눈치 주는 시민들.
전쟁? 전염병? 매연? 유행?
이유가 뭐든 간에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마스크부터 착용했다.
그 후,
“실례합니다.”
백화점 앞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듯 안절부절못하는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촌스러운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주위에 스쳐 지나가는 비슷한 또래의 남성들도 패션이 똑같아서 포기했다.
“누구세요? 설마! 남자친...?”
“여기는 어디인가요.”
이상한 오해를 사기 전에 잽싸게 질문했다.
“서울 동대문입니다.”
“그렇군요. 아! 또 한 가지. 연도가 어떻게 되죠? 서기... 맞죠?”
“저기요.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도 그렇고, 정말로 몰라서 저에게 묻는 건가요?”
“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겁니다.”
“몰래카메라나...”
“아닙니다.”
꿈의 장소와 시대를 확인한 나는 본격적인 수색을 시작했다.
‘젊은 남해수 씨가 이 근방에 있을 텐데...!’
지금까지 그랬다.
자살을 반복한 송선영이랑 같은 학교였고, 내가 시작한 엘몰랑스 병원으로 마법소년 최강민이 날아서 들어왔고, 김은정이 탄 치맥 백작가의 마차랑 마주치고...
우연이 3연속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면 남해수 씨도 내 시작지점 근처에 있으리라.
후다닥!
남아도는 체력으로 부지런히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하필이면!’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 한복판에서 시작할 게 뭐람!
태평양 한복판에서 시작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남해수 씨가 물고기로 변했다면 꿈에 들어오자마자 익사했으리라.
아마도 인간.
남해수 씨가 돌고래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실례합니다!”
“또 당신인가요?”
여자친구가 여태 안 와서 무척 심란한 얼굴을 한 남학생.
그에게 또 질문했다.
“남해수 선수를 아세요?”
“남해수? 처음 듣는데요. 뭘 하는 선수인데요?”
“수영이요.”
계속 귀찮게 하는 내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까지 써서 조사해줬다.
“남, 해, 수... 없는데요?”
“예?”
“제가 지금 검색해봤는데요. 수영선수는 없고, 이름이 같은 사업가와 변리사가 한 명씩 뜹니다.”
“볼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나는 남학생의 구시대 스마트폰 액정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로 없잖아?’
남해수란 이름을 쓰는 사업가와 변리사는 ‘수영의 황제’랑 외모와 출생연도가 달랐다.
남해수가 없는 남해수의 꿈이라니?
내가 혼란에 빠진 그때-
삑!
「내 사랑: 오빠. 미안해.」
「내 사랑: 엄마가 아파서 못 나갈 것 같아.」
「내 사랑: 당분간 못 만나.」
문자가 왔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나는 울먹이는 남학생을 조심스럽게 위로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젠 어떻게 할까?
고민은 짧았다.
“실례합니다. 경찰서죠?”
“네. 경찰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민등록증을 신청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언제, 어디서...”
“아뇨.”
“...혹시, 불법체류자입니까?”
“어... 큭! 또 머리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납니다.”
“......”
기억상실증이란 편리한 방법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