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57화 (58/232)

057화

[4장-1절] 합리적인 의심이야

서혜주 과장님이 경이롭다고 할 만큼 회복이 매우 빨랐던 나는 단 하루 만에 선수로 복귀했다.

“보고받긴 했지만, 문수는 지구력이 정말 좋네. 폐활량은 돌고래랑 경쟁해도 될 것 같고.”

“감사합니다.”

“선영이가 문수의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 애는 빠르면 다 되는 줄 안다니깐.”

“하, 하...”

딸의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고 투덜대는 장서연 감독님.

송선영과 감독,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 없는 나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아무리 해도 양어깨에 뭉친 근육이 안 풀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상하네.”

“뭐가요?”

“네 기록. 4000m가 주요종목인 건 맞지만, 이 추세면 2000m도 해볼 만할 것 같아.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빨라질 수 있나?”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예쁘게 말해줘서 고맙지만, 단 며칠 만에 극적으로 바뀔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거든?”

“뭐...”

지나치게 짧긴 했다.

“게다가 내 적성은 수영 감독이 아닌 선수인걸. 이건 문수가 그냥 타고났다고 봐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적성이 수영선수가 아닌데요?”

“그러면 무당은 수영도 잘해야 하나 보지.”

“어... 네.”

감독님의 간단명료한 논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문수가 쓰러져서 연기됐던 10km 마라톤을 측정할 거야.”

“드디어...”

“구명보트가 근처에 대기할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바로 할게요.”

걱정하기에는 최근에 위험한 경험을 너무 많이 겪었다.

‘진짜 무모했지!’

태풍이 몰아치고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어두컴컴한 바다를 가로질러서 호흡도 마음대로 못 하는 적진 한복판을 헤엄쳤다.

그때랑 비교하면...

찰랑찰랑~

맑은 하늘과 잔잔한 파도, 상대적으로 가까운 목적지, 사고에 대비하는 구명보트까지!

걱정이 될 수가 없었다.

“문수야. 방심하면 안 돼. 바다는 수영장 10km랑 달라.”

“네.”

“...신기하네. 아무리 강단 있는 선수도 처음에는 두려워하고 망설이기 마련인데.”

“겁이 없어서요.”

마취도 없이 벌레처럼 짓밟히며 팔다리를 뜯기는 경험을 겪고 나면 누구나 나처럼 되리라.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출발!”

풍덩!

나는 감독님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저 멀리 보이는 유람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했다.

‘쉽네.’

수영 10km 마라톤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내게는 100m마다 방향을 틀어줘야 했던 비좁은 수영장보다 바다가 훨씬 편했다.

뻥 뚫린 바다의 자유로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해신’으로 불렸던 추억을 되새기며 마음껏 헤엄쳤다.

탁.

‘벌써?’

얼마 헤엄치지 않은 것 같은데, 바다 한복판에 멈춰선 유람선에 벌써 도달했다.

위이잉~

감독님과 안전요원이 탄 구명보트가 뒤따라 도착했다.

“감독님.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이건... 말이 안 돼.”

“감독님?”

“10km를 2시간도 안 걸려서 주파하다니! 2시간 동안 거의 지치지 않았다는 소리잖아!”

“별로 안 힘들긴 합니다.”

기록에 방해되는 시계를 착용하지 않았던 나는 10km를 헤엄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2시간 미만이라고?’

세계평균기록이 ‘3시간 미만’이란 점을 고려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온 셈.

촤아-!

구명보트에 올라탄 나는 ‘신(神)의 기적을 목격한 어린 양’ 같은 표정인 감독님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몸 안에 원자력발전소라도 들어있는 거야? 어떻게 2시간 동안 안 지칠 수가 있어?”

“그거야 저도 모르죠.”

나를 만든 부모님도 안 계셔서 물어볼 수가 없다.

“건강만 조심하면 자유형 10km 마라톤은 세계 1위... 아니, 우주 1위가 확실하네. 미리 축하해. 나는 만져보지 못한 금메달 연금!”

“하, 하...”

너무 앞서가는 장서연 감독님의 호들갑에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는 나도 내심은,

‘오예! 올림픽 연금...!’

모든 운동선수가 꿈꾸는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세계신기록이랑 1시간 차이!

이 정도면 약물의 힘이나 외계생명체로 의심받을 걱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장서연 감독님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문수야! 이 기세로 육상 100km 마라톤도 도전하자!”

“갑자기?!”

전혀 아니었다.

“연금은 많을수록 좋잖니? 내 말을 한 번 믿어봐.”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올림픽 메달을 많이 딸수록 연금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선수가 올림픽 메달에 집착하는 이유는 연금 때문이 아니야.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니까.”

“그런가요?”

편의점 아르바이트 월급이랑 비슷한데?

“많이 부족하지. 그 돈으로는 신혼집은커녕 기저귀와 분윳값도 감당하기 힘들어.”

“아...”

결혼! 그리고 2세!

늘 생활고에 찌들어 살던 나로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건 아닌가.’

돈 걱정이 없었던 ‘아몰랑 백작’은 호위기사랑 꿈 같은 시간을 보내며 미래를 상상했었다.

발렌타인.

울면서 헤어진 그녀를 떠올리자마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수들이 기를 쓰고 메달을 따려는 이유는 출연료와 광고료가 껑충 뛰어오르기 때문이야.”

“많이 오르나요?”

“최소 100배.”

“와우!”

“애초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메달리스트가 아니면 스포츠용품의 광고모델로 발탁되지도 못해.”

“선영이는요?”

송선영은 수영복 모델이다.

“조금만 빨리 헤엄쳐도 홀라당 벗겨지는 비키니 수영복은 스포츠용품이 아니야.”

“그, 그렇군요.”

순수한 감독이 아닌 선수 출신이기 때문일까?

장서연 감독님은 선수에게 유익한 정보를 많이 알고 계셨다.

“내가 메달리스트가 됐다면 돈을 쓸어 담았을 텐데! 미모의 메달리스트는 흔치 않거든~”

“확실히...”

P의 적성검사기는 얼굴로 운동선수를 뽑지 않는다.

“정말인 모양이구나.”

“뭐가요?”

“남자의 허세인지 시험하려고 계속 말을 건 거였거든. 그런데 숨이 쭉 고르네. 전혀 안 지쳤어.”

“네. 당장 10km를 또 뛰어도-”

꼬르륵!

기세등등한 내 말을 자르듯 뱃속에서 천둥이 쳤다.

“몸은 솔직한걸?”

“......”

“배로 올라가자. 예상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씻고 준비하면 얼추 맞을 거야.”

“네.”

호화여객선답게 화려한 뷔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행복해!’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 세계에서 귀족으로 지내며 고급스러운 요리를 많이 맛보긴 했지만, 현대의 다양한 식자재와 발전된 요리법을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닷가재 치즈구이, 훈제 연어, 팔보채, 초밥, 게살 수프, 등갈비, 해삼 채소볶음, 열대과일….

내 혀가 실시간으로 행복의 비명을 질렀다.

“10km 마라톤을 1시간대? 말이 되는 소리를...!”

“사람이 2시간 내내 헤엄쳤는데도 지치지 않는다고요? 허허!”

“거참! 허세도 정도껏 해야 믿어줄 것 아닙니까!”

“장서연 감독님? 금방 들통나는 조작은 하지 맙시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감독들이 빽빽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내 행복을 방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와! 1군은 대우가 다르네!’

체육대학교 수영장에서 주로 훈련하는 2군도 좋다고 느꼈는데, 1군이랑 비교하면 소박한 수준.

하지만 선수들의 행복지수는 2군보다 낮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표정들이 왜 이래?’

이 좋은 음식들을 기계적으로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한동안 같이 훈련할 사이가 아닌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말로만 듣던 1군 선수분들이랑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강문수라고 합니다.”

“......”

“......”

자연스럽게 몰리는 1군 선수들의 시선. 하지만 내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무안하게 하네!’

인사까지는 기대하지 않고, 반응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이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선 성적이 전부니까요.”

“아,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주 상큼한 반응이네!

내게 말을 걸어준 여성 선수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1군 선수 중에서 그나마 표정이 나은 편.

그녀가 툭 던지듯 물었다.

“종목이 뭔가요?”

“10km와 4000m입니다. 2000m도 노려보는 중이고요.”

“셋이나?”

“그러면 안 되나요?”

“이해합니다. 2군에서 막 올라오셔서 모르실 수도 있죠.”

“......”

왠지 무시당한 기분이다.

“1군은 종목마다 가장 잘하는 선수로 남녀 2명씩 구성됩니다. 그러다가 성적이 부진하면 2군 선수랑 바로 교체되죠.”

“아하! 그래서...”

내 주요종목을 들은 남성 선수들의 표정이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안도 혹은 긴장.

그거랑 별개로 선수들이 하나둘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저는 여자 100m예요.”

“남자 300m다.”

“안녕하세요. 여자 300m입니다.”

“저도 여자 300m입니다.”

“자유형 1000m 남자.”

“......”

“......”

반면, 나랑 주요종목이 겹칠 것으로 짐작되는 선수들은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과도한 경쟁심!

송선영이 자신의 적성 ‘수영선수’를 싫어했던 이유다.

“문수야.”

“네!”

장서연 감독님의 부름에 나는 반갑게 호응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배에서 푹 쉬어. 내일 아침 9시에 10km 승급전이 있을 예정이니까.”

“...네.”

승급전(昇級戰).

나를 포함한 3명의 선수 중에서 1명은 2군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일의 승급전은 그 1명을 정하기 위한 경기.

압도적인 기록에 기초한 자신감 덕분에 긴장은 없었다. 나의 성공을 위해 타인을 밑으로 떨어트려야 한다는 약간의 껄끄러움뿐.

“그렇다고 너무 자지는 말고. 얌전히 있어.”

“하, 하... 그럴게요.”

감독님의 뼈 있는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 * *

강문수를 돕고자 해외 출장을 강행했던 서혜주 과장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육 손실, 신체기능 저하...

꿈에서 깨어난 강문수가 이런 후유증들을 빠르게 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노력이 크게 한몫했다.

“실례합니다.”

“뭔가요?”

공항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던 서혜주 과장.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낯선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귀찮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

“저는 이곳에서 왔습니다.”

슥-

하지만 남자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명함을 카페 탁자 위에 올려놨다.

유명한 기업의 연예사업부 부장...

이래도 도도하게 나올 테냐고 묻는 듯했다.

서혜주 과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의사입니다.”

“아! 의대생이었군요!”

“현직 의사입니다.”

“시, 실례했습니다. 동안이라서 착각했습니다. 현직 의사이시면 더 좋습니다. 병원을 홍보하기 위해 방송을 겸하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가보세요.”

“좋은 기회를 잘 잡은... 네?”

탁.

서혜주 과장은 자신의 명함을 카페 탁자에 올려놨다.

엘몰랑스 병원.

악명 높은 의료비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의료기업이었다.

“아직도 같은 생각인가요?”

“죄, 죄송합니다...”

“명함은 놓고 가세요. 아무에게나 주는 허세용이 아닙니다.”

“네네!”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만히 있으면 종종 겪는 일이었기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서혜주 과장.

그녀는 그새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시간을...

띠리링♪

“......”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자신의 업무용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그녀로선 무척 드문 상황.

‘내 환자의 지인이려나?’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급하게 잡힌 출장으로 업무가 밀린 서혜주 과장은 새로운 환자가 반갑지 않았는데...

“여보세요.”

얘기만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엘몰랑스 부속병원 신경외과의 서혜주 과장님이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유전공학과와 생화학과도 겸직하고 있지만,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국제수영연맹입니다.)

“수영선수의 건강을 관리하는 보조 인력이 필요하다면 다른 부서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강문수 선수를 아시지요?)

“잘 압니다.”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날아온 이유니까.

(연맹에서는 그 선수의 부정행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무당이 수영선수보다 수영을 잘하기 때문인가요?”

서혜주 과장은 노골적인 야유를 담아서 물었다.

(...기록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의뢰할 뿐입니다.)

“얼마나 나왔는데요?”

(평균 1초 차이로 순위가 결정되는 10km 마라톤에서 1시간이나 기록을 단축했습니다.)

“......”

연맹의 합리적인 의심에 그녀는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데.’

선수가 의심된다면 그 선수랑 친분이 없는 의사에게 의뢰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봐주셨으면 하는 환자가 있습니다.)

예상대로 다른 목적이 있었다.

“제가 괜찮은 의사를 소개해주겠습니다.”

그녀 외에도 우수한 의사가 엘몰랑스 병원에 많으니까.

게다가 여기서 일이 더 쌓이면 피부가 상하는 건 둘째치고 과로사할지도 모른다!

(최강민 씨를 치료한 의사가 필요합니다.)

“......”

(서혜주 과장님. 황제의 목숨이 당신에게 걸렸습니다.)

“황제가...?”

(네.)

“...언제 오죠?”

그녀는 비행기 표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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