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55화 (56/232)
  • 055화

    “나는 다시 태어났어! 김은정이 아니야!”

    환자가 발악하듯 부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자들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게 소설의 묘미죠. 하지만 소설이 현실이라면 작가는 세계를 만든 창조신이란 소리인데... 당신은 이 소설의 작가가 신이라고 생각합니까?”

    “......”

    “당신은 아름다운 주인공이 됐다는 기쁨에 취해서 당연한 상식에 등을 돌렸습니다. 남자는 현실에서 사귀십시오.”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다 자란 딸의 대소변을 치우고 휠체어를 끄는 아주머니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내가 환자에게 좋은 말이 나가지 않고 감정적인 이유.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모른 채, 미남들이랑 연애할 생각밖에 없는 몰상식한 태도 때문이다.

    못 배운 짐승도 이 여자처럼 이기적이진 않으리라.

    “대, 대소변...?”

    “본인이 안 치우면 누군가가 대신해야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

    수치심이 치솟은 환자는 손바닥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당신은 백작가의 아름다운 영애가 아닙니다. 성인용 기저귀를 찬-”

    “그만! 제발 그만!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 말해...!”

    “...그러죠.”

    이 소설 세계의 삶이 더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까?

    백작가의 막내딸이 된 김은정은 마법소년 최강민처럼 귀를 틀어막고 무작정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안 깨어나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이 정도의 자극만으로 깨울 수 있었다면 일을 이토록 키우지 않았으리라.

    지금부터가 진짜다.

    “김은정 양. 당신을 사랑한 남자들은 전부 망했습니다. 황제는 거세되어 만인의 웃음거리가 됐고, 왕자는 폐위당했으며, 피마앙 남작은 전쟁터에서 죽었죠. 아! 영애의 애완동물이 된 분도 있습니다.”

    파혼의 대가로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중!

    내가 치맥 백작령의 보육원을 찾아가서 설득한 사막왕국의 왕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보면 된다.

    “듣기 싫어요.”

    “망국의 황후인 당신의 미래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억지야! 나는 황제랑 결혼하지 않았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총명했던 황제의 눈을 흐리게 하는 바람에 제국이 멸망했다고 믿죠.”

    진짜 원인은 압승해야 할 해전에서 아무런 피해도 못 주고 연달아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 ‘백성의 사랑을 받는 황제’라는 설정이 있어서 모든 원망은 주인공에게로!

    매우 유감이다.

    “억울해...”

    “원래는 당신의 살가죽을 벗긴 후에 황성의 입구에 매달아둘 예정이었습니다.”

    환자의 정신건강을 위해 축소해서 얘기했다. 원래 계획은 훨씬 비인도적이고 잔인하니까.

    “살려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국의 안정화에 필요한 황제가 당신의 안전을 조건으로 걸어서 실현되지 않았으니까요.”

    “다, 다행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이릅니다. 당신에게 죽을 때까지 보육원에서 봉사하는 형벌이 떨어졌습니다. 연애와 결혼도 못 합니다. 이건 거세된 황제의 바람이죠.”

    “......”

    이것도 환자의 정신건강을 위해 축소해서 얘기했다. 보육원에서만 봉사할 리 없잖아?

    모르는 편이 낫다.

    “김은정 양. 아직도 안질리나 치맥으로 살고 싶나요?”

    “...도와줘요.”

    “저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환자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도록 유도할 순 있지만, 선택은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거짓말! 당신도 그 여자처럼 신비한 힘이 있잖아요!”

    “...혹시, 그 여자가 검은색 고깔모자를 썼습니까?”

    “맞아요!”

    “......”

    그녀가 왕국에서 제국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

    마녀의 개입이 있었다.

    “저를 안전한 나라로 보내줘요! 원한다면 당신의 아내가 되어줄 수도 있어요!”

    “...김은정 양. 당신에게 안전한 나라는 이 세계에 없습니다. 미련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싫어...!”

    “제가 전할 말은 끝났습니다. 봉사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시길.”

    “죽어도 못 해...!”

    “그러면 죽으십시오. 부모님을 그만 괴롭히고.”

    “......”

    짜증이 폭발해서 독설을 날린 후에 몸을 돌렸다.

    * * *

    “아몰랑 백작님. 제가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제국의 황궁에서 2번째로 화려한 나의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 쭉 침묵을 유지해온 발렌타인 경.

    꾹 참아왔던 입술을 뗀 그녀는 강렬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진짜 오래 참았지.’

    호위에 전념한 그녀의 인내심과 직업정신에 박수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그렇다고 너무 많이 하면 곤란하지만.”

    “다른 세계로 떠나시나요?”

    “네.”

    옆에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여기까지 추리해낸 발렌타인 경의 융통성에 감탄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는 환자랑 비교돼서 더욱 그런 걸지도.

    “저도 따라갈 수 있나요?”

    “아니요.”

    “......”

    “오해하지 마세요. 발렌타인 경이 싫어서 안 된다는 게 아닙니다. 못 하는 겁니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알아요. 아몰랑 백작님이 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알아줘서 고맙습니다.”

    발렌타인 경이 어떻게 아는지 의문이지만,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라서 잠자코 있었다.

    “언제 떠나시나요?”

    “안질리나 치맥이 죽고 싶을 때쯤입니다.”

    “며칠 안 남았네요.”

    “네.”

    “......”

    “......”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한 아름다운 호위기사랑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다.

    ‘여기가 현실이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바로 조금 전에 환자에게 일침을 가한 내가 이 소설 세계에 미련을 품다니?

    이중적인 나의 모습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하세요.”

    “오빠라고 불러도 돼?”

    “......”

    거부할 수 없는 악마를 보았다.

    * * *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 ‘김은정’의 정신력은 강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개 재판이 끝나고 봉사를 시작한지 단 하루 만에 주인공의 삶을 포기했으니까.

    그 증거로,

    “...최악의 기분일세.”

    발렌타인이랑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차가운 현실로 가차 없이 되돌아왔다.

    제국의 황궁에 마련된 내 침실만큼 호화롭진 않지만, 플라스틱으로 마감된 깔끔한 디자인의 가구와 가전제품들...

    내 정신이 호텔의 객실로 돌아왔음을 일깨워줬다.

    ‘발렌타인...’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는 나를 껴안고 펑펑 울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흠...”

    꿈에서 깨어나면 바로 부르라는 듯이 내 오른손에 가볍게 쥐어져 있는 호출장치.

    꾸욱.

    빨간색 버튼을 누르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혜주 과장님이 객실 안으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일찍 깨어났네요.”

    “과장님.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나요?”

    “오늘로 14일째입니다.”

    “정말 짧네요.”

    사랑에 미친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거대한 제국을 세우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런데 고작 14일?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서 불만이란 뜻은 절대 아니다.

    ‘다행이지.’

    근육이 굳거나 빠지면 재활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드니까. 빨리 깨어나서 나쁠 건 없다.

    “크읏...!”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하자마자 14일 동안 사용하지 않은 근육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꼬르륵!

    정상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고 수액에 의존해온 몸도 배고프다며 아우성치고...

    “잠시만 기다려요. 냉장고에 죽이 있어요.”

    서혜주 과장님이 전자레인지로 데운 따뜻한 죽을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일은 잘 해결됐나요?”

    “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련을 못 버려서 고생했지만요. 예상하지 못한 방해도 있었고.”

    “방해요?”

    “네. 마녀가 궁지에 몰린 환자를 제국으로 도피시켰거든요.”

    왕자에게 붙잡힌 김은정이 탈주하지 못했다면 제국까지 가지 않고 쉽게 해결됐으리라.

    항해, 해전, 해신, 정복, 백작...

    그리고 발렌타인.

    서혜주 과장님이랑 계획을 짤 때는 상정하지 않았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됐다.

    “마녀라면... 최강민 환자의 꿈에 나왔다는 그 여자인가요?”

    “맞습니다.”

    위이잉-

    그때, 서혜주 과장님의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안녕하-”

    (선생님! 은정이가 말을 했어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완전히 포기했었는데...!)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머니의 흥분한 목소리.

    나처럼 환자의 정신도 현실로 되돌아온 모양이다.

    “곧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아닌 강문수 씨에게 해주세요. 저는 옆에서 거들었을 뿐입니다.”

    (네네!)

    뚝.

    통화를 종료한 서혜주 과장님이 나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강문수 씨. 한 가족을 구한 기분이 어떤가요?”

    “그냥... 멍하네요.”

    “흐응~ 마치, 짝짓기에 실패한 수컷 같은 표정이네요.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티가 많이 났나요?”

    “아주 많이.”

    짓궂은 눈웃음을 짓는 서혜주 과장님에게 핀잔을 줬다.

    “환자에게 안 가보세요?”

    “듣고 가려고요.”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호위기사가 있어요.”

    “소설의 등장인물인가요?”

    “네. 과장님도 이름 정도는 기억하실 거예요. 발렌타인. 주인공의 약혼자랑 바람이 났던 여성...”

    “그러면 대단한 미인이었겠군요.”

    “네.

    “송선영 양보다도?”

    “......”

    어떻게 대답해도 외통수였던 까닭에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어때요?”

    “묵비권을 행사하죠.”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요. 비밀로 해줄게요.”

    “그래도 안 됩니다.”

    “저런.”

    서혜주 과장님은 아쉬워하면서도 쉽게 물러났다.

    “...최강민 때랑 다른 의미로 후유증이 심하네요.”

    허탈했다.

    “꿈속에서 좋았던 일이 많은 모양이군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대되네요.”

    “이제 저는 놔두고 환자나 빨리 돌봐주세요. 막바지에 악녀로 몰려서 마음고생이 심했거든요.”

    “짐작이 되네요. 낭만과 불륜은 한 끗 차이니.”

    “뭐...”

    중세의 비인도적인 형벌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짐작이다.

    “푹 쉬고 있어요.”

    “네.”

    서혜주 과장님이 나간 후, 대화하는 사이에 식어버린 죽을 말끔히 먹고 소파에 앉았다.

    “......”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한 기분.

    호위를 핑계로 거의 항상 옆에 있었던 발렌타인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다가왔다.

    ‘소설이고 꿈이야.’

    뒤숭숭한 마음을 정리하면서 창밖의 이국적인 풍경을 구경했다.

    관광객, 전봇대, 스마트폰, 아스팔트, 콘크리트, 자동차...

    중세에 익숙해졌던 감각이 현대로 점차 돌아왔다.

    딩동!

    후유증을 조금씩 회복 중이던 나는 호텔 객실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누구세요?”

    “빨리 문 열어!”

    “어?”

    무척 낯익은 소녀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빨리 열어!”

    “저기…. 왜 화나셨나요?”

    객실 문 앞에 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래?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열기나 해!”

    그리고 본전도 못 건졌다.

    “응.”

    딸각-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손님이 문을 활짝 열었다.

    “야!”

    “안녕- 아악?!”

    퍽!

    정강이를 걷어차인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는 더 맞아야 해! 뭐? 절대로 이사하지 않아?”

    “소, 송선영 양...?”

    “또 맞을래? 똑바로 불러!”

    “...선영아?”

    “반가워♪”

    엘몰랑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생기발랄해진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송선영이 왜 여기에?!’

    내 정강이를 걷어찬 그녀의 긴 다리가 짧은 푸른색 원피스 아래에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어딜 보는 거야?”

    “어흠.”

    누구 때문에 내 시야의 각도가 이상해진 탓이다.

    “몸은 좀 어때?”

    “어... 정강이 빼고 괜찮아.”

    “다행이네!”

    성큼성큼 객실 안으로 들어온 송선영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 한데, 여긴 어떻게 왔어?”

    “왜? 내가 오면 안 돼?”

    “그런 질문이 아니잖아.”

    그녀의 삐뚤어진 마음씨는 여전한 것 같다.

    “촬영이 있어서.”

    “촬영?”

    “나, 수영복 모델이 됐거든. 지금도 입고 있어. 보여줄까?”

    “아니요.”

    “...봐.”

    “네.”

    다시 만난 송선영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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