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3장-8절] 너의 이름은...
피해가 전혀 없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쥔 소맥 가문은 제국의 본토에 쉽게 상륙.
이에 저항할 힘이 없었던 항구도시들이 줄줄이 항복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항복하겠소.”
“투항하오.”
소설 작가의 설정 때문에 제국이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뛰어난 병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까!
남녀가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훈련을 받고….
즉, 군사력은 한 번 잃으면 복구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 악몽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왕국을 침공한 제국이 대패하고 역으로 침공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제국의 귀족과 백성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그들은 소맥 가문의 군대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항복할 바에 죽겠다!”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들들을 버릴 셈인가?”
“비겁한...”
“우리는 포로에게 먹일 식량이 부족하다! 이들이 죽는다면 그건 영주의 탓이다!”
“...항복하겠소.”
성문을 닫고 농성하던 제국의 영주들은 너무나 많은 포로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저들이 싸우다가 죽었다면 복수라는 명분이라도 있을 텐데...
“아빠가...”
“오빠가...”
붙잡힌 가족을 살리기 위해 배신하고 몰래 성문을 열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하물며 포로에 영주, 후계자가 끼어 있다면 고민도 없었다.
펄럭~
쿵.
성에 가문의 상징 대신 새하얀 깃발이 올라가고, 굳게 닫혀 있던 성문과 도개교가 내려갔다.
급기야,
“소맥 공작. 오랜만이오.”
“아들의 죽음은 정말 유감이오, 피마앙 백작.”
뒷거래했던 제국의 귀족이 직접 찾아왔다.
“...녀석을 살릴 수 없었소?”
“상관의 지시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바다로 뛰어들었다는군.”
“못난 놈...”
“그런데 백작. 이 시국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총명했던 황제는 여자 하나 때문에 미쳐버렸소.”
“흠.”
대패했다는 소식과 함께 황제의 평판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국 서부와 남부 귀족들은 결단을 내렸소. 지위를 보존하고 포로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소맥 가문에 투항하오.”
“정말 힘든 결정을 했군. 받아들이겠소.”
“소맥에 충성을.”
“소맥을 위해.”
제국의 절반이 항복했다.
왕국보다 큰 땅이 소맥 가문에 들어온 셈!
심지어, 여긴 소맥 가문의 군대가 단독으로 쟁취했기에 왕국에서 내놓으라고 할 명분도 없다.
양심이 있다면.
“소맥 공작님. 비트코린 상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절대 원한을 지면 안 될 것 같은 매서운 눈매의 미녀가 겁도 없이 우리를 찾아왔다.
“제국의 상단이 무슨 일인가?”
“제 부친이신 비트코린 남작이 공작님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오! 그대가 그...”
“소맥 공작님의 짐작대로, 소녀는 안질리나 치맥에게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긴 한심한 여자입니다.”
“흐음.”
제국의 거상 비트코린 남작의 여식은 주인공 때문에 파혼당하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포로로 붙잡은 한 남자의 신변을 인도해주시면, 비트코린 상단은 제국이랑 인연을 끊고 소맥 가문을 돕겠습니다.”
“남작이 큰 결단을 내렸군.”
“아!”
“그 포로에게 노예의 인장을 찍은 후에 넘기도록 하지.”
“배려에 감사합니다.”
파혼하고 떠난 남자가 노예로 되돌아오는 감동적인 이야기!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자.
“...아몰랑 남작.”
“네.”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무서울 지경일세. 이래도 되는 걸까?”
“편하게 받아들이세요. 그동안 준비를 잘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
전성기의 제국이 이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
소설 설정 때문이다.
제국은 황제가 정치적으로 도움 안 되는 주인공을 황후로 맞이해도 귀족들이 불만을 표시할 수 없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귀족들의 사병을 제한하고, 황제의 명령만 따르는 중앙군의 비율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지면 치명적이지.’
전쟁의 패배는 고스란히 황제의 권력에 반영되니까.
또한, 영토를 방어할 최소한의 군대밖에 없는 귀족들은 외부의 침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게 그 결과.
“항복하오.”
“항복합니다.”
대세를 읽은 귀족들은 황제를 버리고 침략군에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까지 약 보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이 제국의 영토를 가로지른 우리는 수도의 황성을 포위했다.
“끝이 보이네.”
환자를 만날 시간이 됐다.
* * *
복잡한 정치와 폭력적인 전쟁에 관심없는 안질리나 치맥.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황제가 입을 다물었음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왜?
“무능한 황제는 물러나라!”
“안질리나 치맥을 처형하라!”
“겁쟁이 황제는 당장 나와라!”
쿵! 쿵! 쿵!
황궁을 포위한 군대가 북을 치면서 밤낮없이 시위한 탓이다.
특히,
“안질리나 치맥은 엉덩이가...”
“같이 잔 남자가 수백에...”
“성욕을 주체 못 해서...”
황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안질리나 치맥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음담패설은 기본!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서 그녀를 음탕한 악마로 몰았다.
“으으...!”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끔찍한 소리.
황제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방음벽을 설치한 침실도 있지만, 온종일 그 안에서만 생활할 순 없었다.
‘살해당할 거야!’
악의(惡意)로 가득한 폭언에 숨이 안 쉬어질 지경.
저들이 자신을 순순히 놔둘까?
붙잡히는 순간, 온갖 모욕을 당하리란 건 확실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은 황제잖아요! 어떻게든 해봐요!”
“짐을 믿으시오.”
“그 말밖에 할 줄 몰라요?!”
“......”
아무리 다그쳐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황제.
그러다가 그녀가 화를 내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거나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추면서 달랠 뿐!
저 끔찍한 소리를 차단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마녀는?!’
안질리나 치맥은 미쳐버린 왕자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탈출시켜준 수상한 여인을 찾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왕국에서 제국으로 이동하는 신비한 힘!
그 힘이 또 필요했다.
“도와줘요!”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외쳐도 마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안질리나, 준비하시오.”
다시 돌아온 황제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준비요?”
“황궁의 문을 열기로 했소.”
“미쳤어요?!”
황궁 밖에는 그녀가 버린 약혼자도 있었다.
자신을 용서해줄까?
그럴 리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만은 어떻게든 지켜주겠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안질리나?”
“절대로 안 돼!”
충동적으로 호위기사랑 사랑을 나눈 날, 그녀는 소맥 남작에게 사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발렌타인’이란 내연녀를 거론했다.
그런데 웬걸?
두 사람이 친하긴 해도 연인이라고 말할 수준은 ‘아직’ 아니었다.
‘억울해!’
그러나 아무리 후회하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돌이킬 수 없었다.
“문을 열어라.”
“안 된다고 했잖아! 어째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어떤 경우에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던 황제.
하지만 처음으로 거절당했다.
대체 왜!
“안질리나. 짐을 향한 모욕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소.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당신까지 휘말리는 건 도저히 참을-”
“그냥 참아요!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아요!”
“미안하오.”
“안 돼~!”
끼익-
안질리나 치맥의 처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궁의 문이 열렸다.
* * *
항복한 황제는 협조해주는 조건으로, 안질리나 치맥의 안전과 행복만을 원했다.
“곤란하군. 그년의 살가죽을 벗겨서 매달아둘 생각이었는데.”
황제의 옥좌에 앉은 소맥 공작이 혀를 찼다.
“막 앉으셔도 되나요?”
“당연하지.”
소맥 공작령으로 돌아간 소맥 남작은 치맥 백작의 3녀랑 결혼하여 두 가문의 동맹을 강화했다.
또한, 왕가보다 힘이 강해진 소맥 가문에 왕국의 귀족들이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고...
왕국은 소맥 공작을 통제할 힘을 상실했다.
‘이건 내 예상 밖인걸.’
폭군의 자질이 있는 소맥 남작이 활약하길 기대했는데, 그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그만큼 허술했던 왕국과 제국.
주인공의 사랑만을 위해 욱여넣은 인물 설정이 두 나라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됐다.
“아몰랑 백작.”
“어? 갑자기 백작인가요?”
“싫은가?”
“주시면 받아야죠.”
“개국공신인 그대의 업적을 고려하면 공작으로도 부족하지만, 나의 편안한 숙면을 위해 봐주게.”
“솔직하시네요.”
신분이나 출세에 욕심이 없었던 나는 그러려니 넘어갔다.
“...백작. 목적이 뭔가? 아직도 말해줄 수 없나?”
“복수입니다.”
더는 거리낄 게 없었던 나는 시원하게 말했다.
“복수?”
“네. 세상을 떠돌던 저는 소맥 가문과 치맥 가문의 전쟁에 휩쓸려서 죽었습니다.”
“......”
소맥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를 호위하면서 조용히 듣고 있던 발렌타인 경도.
“저는 그 전쟁의 원흉인 안질리나 치맥에게 복수하고자 공작님을 도운 겁니다.”
“죽었었다고?”
“네.”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지?”
“죽은 목숨을 억지로 유지하는 중입니다. 곧 사라지죠.”
“믿기지 않지만…. 그간 아몰랑 백작이 보여준 기적들이 있기에 안 믿을 수가 없군. 이상할 정도로 욕심이 없었던 이유도.”
소맥 공작은 수긍한 눈치였다.
“고마우시면 조그마한 동상이나 하나 세워주십시오.”
“순금으로 크게 세워주지! 또 바라는 게 있는가?”
“흐음... 아! 부족한 저를 보좌해준 발렌타인 경의 승작(陞爵)을 부탁드립니다.”
“그건 백작이 직접 하게.”
“예?”
“정말로 곧 죽는다면, 죽기 전에 깨달았으면 좋겠군.”
“......”
뭘 깨달으란 거야?
* * *
소맥 공작의 대관식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폐위된 황제가 알몸으로 거세당하면서 시작됐다.
같은 남자로서 눈 뜨고 보기 힘든 끔찍한 광경!
“......”
사랑하는 주인공을 위해 멸시와 고통을 묵묵히 감수한 황제.
그의 협조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안질리나 치맥은 창문 없는 독방에 연금되어 있었다.
“문을 열게.”
“네. 아몰랑 백작님.”
끼익-
수수한 침실이었다. 창문이 없어서 갑갑하다는 점만 빼면 특별한 점이 없는... 아니군.
“영애랑 단둘이 대화하고 싶군. 잠시 나가서 대기하게.”
“예. 백작님.”
철저하게 은폐한 탓에 뚜렷한 공적은 없지만, 내가 ‘소맥 황제’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황궁에 없다.
철컥.
안질리나 치맥은 옷을 갈아입거나 볼일을 볼 때조차 기사들에게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인권(人權)은 어디로?
폐위된 황제처럼 끔찍한 처벌을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리라.
“발렌타인 경.”
“거절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를 홀린 저 여자가 아몰랑 남작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후회해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침대 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안질리나 치맥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때,
“꺼져.”
모든 남자에게 사랑받는 이상적인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의 탈을 벗은 환자의 한마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김은정 양.”
“...뭐?”
“김은정 양. 백작가의 막내딸이 된 소감이 어떻습니까?”
벌떡!
이불을 젖히면서 상체를 일으킨 안질리나 치맥- 아니, 지구인 김은정이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누구야! 어떻게 내 전생의 이름을...!”
“무당입니다.”
“무당...?”
“당신의 진짜 어머니께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은 무당이죠.”
세상에서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