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조잡한 망원경과 사람의 눈에 의존해야 하는 까닭에 바다 한복판에서 적의 함대랑 마주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서 휴식이 꼭 필요하다. 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면 더욱.
“웈!”
출항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미하지 않는다고 방심했던 나.
하지만 놀이기구처럼 온종일 흔들리는 배에 결국 항복하고, 속에 든 것을 전부 끄집어내고 말았다.
토닥토닥!
“남작님. 괜찮으신가요?”
배의 갑판 밖에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토하는 내 등을 두드려주는 발렌타인 경.
그녀는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렌타인 경은 괜찮은가요?”
“거친 야생마에 비하면 이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부럽- 우엑!”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멀미로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남작. 조금만 참게. 곧 섬이 보일 거야.”
“그 말씀만 5번째 듣는데요...”
흔들리는 배에 발바닥이 붙은 것처럼 자세가 안정된 소맥 공작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제국의 주력함대가 섬에 먼저 도착하지 않았다면 바로 쉴 수 있을 걸세.”
“으으...”
바다 한복판에 휴게소처럼 이용되는 섬이 있다고 한다.
나처럼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곳.
소규모 해전이라면 섬을 무시해도 돼지만, 멀미가 심한 병사들도 동원된 대규모 해전에서는 휴식이 매우 중요한 변수라고...
즉,
“섬에서 결판이 날 걸세.”
왕국과 제국 중 누가 섬을 차지해서 원활한 보급로를 확보하느냐가 이 전쟁의 관건이다.
‘제발!’
흔들리지 않는 땅을 밟고 싶다.
“각하! 섬이 보입니다!”
“헛!”
선원의 외침에 나는 퀭한 눈으로 해안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이네!’
무언가가 희끗희끗 보였다.
“제국은?”
“...제국의 깃발이 보입니다. 놈들이 섬을 점령한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모든 함선에 전하라! 전속력으로 항해! 제국이 눈치채기 전에 공격한다...!”
소맥 공작은 결연한 표정으로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매우 불리한 상황.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더욱 벌어지리란 것을 알기에 망설일 틈이 없었다.
“소맥을 위해!”
“소맥을 위해!”
모두가 구호를 외쳤다.
특히, 소맥 남작의 곁에 동료처럼 선 자들이 풍기는 패기가 압도적!
소설 작가에게 ‘사람 보는 눈’을 받은 소맥 남작이 부지런히 사귄 인재들이다.
‘진짜 열심히 모았네.’
왕(王)이 되고 싶으면 뛰어난 신하가 많이 필요하다는 내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
하지만 영화처럼 1대100으로 싸울 수는 없기에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주긴 어려우리라.
“공작님.”
“아몰랑 남작도 얼른 준비하게!”
“저희에게 승산이 얼마나 있다고 보시나요?”
“...황제라는 약점이 없는 제국의 함대는 강력하지.”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공작님. 저를 믿으십니까?”
“물론일세.”
“그러면 기습을 포기하고 내일 새벽까지만 기다려주세요.”
“...이길 방법이 있는가?”
“제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무조건 이길 겁니다.”
“무조건?”
“네. 무조건.”
목숨을 건 도박을 시작하자.
* * *
왕국의 함대를 발견한 제국은 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니까.
게다가 섬에 설치된 방어시설을 끼고 싸우면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기에 무리하지 않았다.
그런 대치 속에서 찾아온 밤.
“가볼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칠해서 피부를 시커멓게 만들었다.
“...발렌타인 경. 아까부터 어디를 보는 겁니까?”
“남작님의 2세를 보고 있습니다.”
“......”
발렌타인 경의 당당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남작. 잠입하기에는 섬이 너무 멀지 않은가? 소형선으로 좀 더 가는 편이...”
소맥 남작이 나와 섬을 번갈아 보면서 걱정했다.
“그러면 들킬 겁니다.”
바보가 아닌 제국은 횃불로 섬 주변을 훤히 밝히고 있었으니까. 소형선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계를 강화하리라.
“그건 그렇네만...”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새까맣게 칠한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풍덩!
‘수영선수가 이 정도는 헤엄칠 수 있어야지!’
나는 수영 10km 종목 국가대표로 거론될 만큼 체력에 자신 있다.
여기서 섬까지 정확한 거리는 모르지만, 도중에 탈진해서 물고기의 밥이 되는 사태는 없으리라.
솨아아-
감시병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호흡할 때를 제외하고는 쭉 물속으로 이동했다.
핵잠수함!
이 별명이 절대 과장된 게 아님을 똑똑히 보여주리라.
그렇게 얼마나 헤엄쳤을까?
“푸하.”
마침내 섬에 도착한 나는 제국의 전함들이 정박한 항구 옆의 절벽 뒤편에 숨어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와! 죽을 뻔했네!’
거친 파도와 해류도 문제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10km를 훨씬 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들키지 않고 섬에 도착했다는 게 중요하다.
지금부터 할 일은?
“시작해볼까.”
풍덩!
다시 잠수한 나는 제국의 함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왕국은?”
“조용합니다.”
“야습이 아닌가? 이상하군. 계속 주시하도록.”
“네! 남작님!”
나는 전함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배의 아래로 헤엄쳐서 내려갔다.
‘잘 되기를.’
뿅!
바위를 푸딩처럼 절단한 전설의 검을 소환했다.
서걱-
단단한 목재로 된 전함의 밑판이 톱질하는 소리조차 없이 부드럽게 썰렸다.
‘좋아. 다음!’
배에 커다란 구멍을 내서 침수시킬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제국에서 금방 이변을 눈치채리라.
천천히 가라앉도록 손상 정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서걱-
전부 몇 척인지 세지 않았다. 섬에 정박한 배는 크기를 가리지 않고 전부 칼질해줬다.
그렇게 섬을 한 바퀴.
이젠 들켜도 괜찮다고 판단한 나는 좀 더 과감하게 칼질하면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무, 물이다!”
“식량부터 빨리...!”
“기습인가?!”
마침내 눈치챈 제국의 병사들로 섬이 시끌시끌해졌다.
더 욕심을 부리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나는,
뿅!
전설의 검을 소환 해제한 후, 숨어서 휴식을 취하다가 왕국의 함대로 귀환했다.
* * *
“다녀왔습니다.”
“남작. 정말로 성공한 건가...?”
“네. 섬에 정박해있던 모든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
너무 놀란 소맥 공작이 입을 딱 벌린 채 꿈쩍조차 안 했다.
털썩.
무한할 것 같았던 체력이 고갈된 나는 갑판 위에 드러누웠다.
“남작님. 닦아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발렌타인 경이 마른 수건으로 내 몸의 물기를 닦아줬다.
‘앗! 거기는... 음...’
예민한 부분만은 직접 하고 싶었지만, 피로가 급격히 몰려온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무섭군.”
“......”
뜬금없는 소맥 공작의 중얼거림에 나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국의 주력함대를 아무런 피해 없이 혼자서 전멸시키다니...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야.”
“그래서 무서우신가요?”
“그렇네. 이 자리에서 죽이고 싶을 만큼.”
공작의 고백에 놀란 발렌타인 경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작 각하?!”
“하하! 흥분을 가라앉히게, 발렌타인 경. 내가 아몰랑 남작을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조용히 했을 걸세. 안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내게 덮어주려고 가져온 담요를 든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발렌타인 경.
나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가시죠. 승리의 영광은 공작님의 몫입니다.”
“겁먹은 시늉이라도 하게.”
“원하신다면요.”
“됐네.”
삐진 아이처럼 입술이 튀어나온 소맥 공작이 섬을 돌아보며 말했다.
“남작의 계획을 들었을 때, 나는 무조건 실패한다고 확신했네. 사람이 헤엄쳐서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으니까.”
“거짓말하셨네요.”
“크흠! 그래도 기습을 포기하고 기다려주지 않았나? 남작의 성공을 믿은 거나 다름없지.”
“아, 네.”
결과만 따지면 그랬다.
“남작. 지금부터 나는 소문을 낼 걸세.”
“공격은요?”
“싸울 무기가 없는 적을 공격할 필요가 있겠는가? 남작이 성공한 시점에 이 전투는 우리의- 아니, 해신의 승리네.”
“해신...?”
갑자기 여기서 신(神)이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아몰랑 남작. 자네의 공적을 해신에게 양보해주게.”
“제가 왜요?”
“오늘부터 남작은 소맥 가문을 수호하는 해신(海神)이기 때문이지.”
“......”
나는 천재 무당 유일암처럼 사기꾼이 되었다.
* * *
“보아라! 소맥을 수호하는 바다의 신께서 제국의 전함들을 전부 침몰시키셨다!”
“와아아!”
“와아아아!”
사이비 교주가 된 소맥 공작은 새벽이 지난 후에도 섬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선동과 날조로 순진한 귀족과 병사들을 현혹하네?
심지어,
‘이게 먹힌다고?’
하룻밤 사이에 제국의 모든 전함이 침몰하는 ‘기적’을 목격한 왕국의 귀족과 병사들.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해신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해신의 전사들이여! 섬을 포위하라.”
“네!”
병사들은 오랜 항해로 지쳤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과 의욕을 보여줬다.
미신의 힘!
종교가 정치와 전쟁에 이용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런데 공작님. 안 싸우고 포위만 해도 되나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남작이 성공한 시점에 이겼다고. 지금처럼 섬으로 향하는 제국의 보급만 끊으면 자멸할 걸세.”
“아하!”
식량 대부분을 싣고 있었던 제국의 전함이 가라앉았다.
반면, 병사의 피해는 없기에 물과 식량을 소비하는 속도가 매우 빠를 수밖에 없었으니!
자급자족에 한계가 있는 섬에서 오래 못 버틴다는 것이 소맥 공작의 계산이다.
반면,
“각하. 보급선이 도착했습니다.”
“포위망을 지금처럼 유지하면서 보급하도록. 서두를 필요 없다.”
“네!”
왕국은 보급이 불편하긴 해도 굶어죽을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닷새째,
“각하! 제국의 함대입니다!”
“올 것이 왔군! 전면전을 피하고 저들이 섬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라!”
“네!”
제국의 보급을 철저하게 차단해오던 소맥 공작의 엉뚱한 지시.
나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아몰랑 남작.”
“싫습니다.”
처음에는 몰라서 겁도 없이 도전했지만, 두 번은 못 하겠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뭐가요?”
털썩!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소맥 공작이 빌기 시작했다.
“위대한 해신이시여! 소맥의 수호자시여! 부탁드립니다!”
“......”
“해신이시여! 소맥 공작령에는 저희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자와 아이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입니다.”
“하하! 해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돌아가면 당신을 기리는 신상을 세우겠습니다!”
“킁.”
이건 왕국만을 위한 게 아니다. 안 싸우고 패배하면 제국의 병사들도 죽지 않으니까.
이 전쟁에 휩쓸린 모두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풍덩!
한 번 당해본 탓에 경계가 강화됐지만, 그 이상으로 능숙해진 나를 잡을 순 없었다.
“해신이다!”
“배에 해신의 저주가...!”
“헉! 해신이 또?!”
어째선지 ‘해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제국의 병사들.
공포에 빠진 그들을 다그칠 지휘관들마저 비슷한 상태라서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
“겁먹지 마라! 적은 사람이다! 나를 따르라!”
“피마앙 남작?!”
풍덩! 풍덩!
내 존재를 눈치챈 자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잡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바닷가에 살아서 수영에 자신 있어도 결국에는 일반인.
적성을 초월한 수영선수인 나를 잡기에는 무리였다.
촤악-
‘어쭈?’
그런 내가 완벽하게 따돌리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푸른색 머리카락의 미남.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 등장하는 미남들의 특징을 전부 암기하고 있는 나는 바로 눈치챘다.
‘피마앙 남작이군.’
수영을 매우 잘한다는 인물 설정이 있기에 놀라울 건 없었다.
아무튼,
“뽀르르륵?!”
서걱-
내가 바다의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란 사실을 눈치챈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잘 가라고.’
전설의 검을 무모하게 맨손으로 막으려고 한 피마앙 남작.
양팔이 절단된 그는 바다를 붉게 물들이면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뽀르록...”
“......”
목격자를 제거한 나는 제국의 모든 배를 침몰시킨 후에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틀 뒤,
펄럭~
항복을 의미하는 새하얀 깃발이 걸린 나룻배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겼네요.”
“하하! 위대한 해신께서 힘써준 덕분이지!”
소맥 공작이 나를 보며 히쭉히쭉 웃는다.
“해신은 이제 은퇴합니다.”
“헉! 은퇴는 곤란하고 휴가로 타협하시는 게 어떤가?”
“생각해보고요.”
언제부턴가 소설이 <공작가의 해신이 되었다!>로 바뀐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