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52화 (53/232)
  • 052화

    [3장-7절] 도와줄까요?

    독자는 소설의 주인공에게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걸 위해 자신의 작고 소중한 월급을 쓸 만큼!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 성별이 대부분 여성인 이유도, 독자 중에서도 여성들이 대리만족을 좀 더 쉽게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이럴 수 없어...!”

    백작령에서 왕국의 수도로 강제연행되다시피 한 안질리나 치맥.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왕자랑 결혼이라니!’

    왕자가 싫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작 주인공처럼 수많은 미남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그녀에게 지금 같은 상황은 최악이었다.

    왕자랑 결혼할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할 수 있었다.

    ‘아니지.’

    나중에 늙어서 왕이 될 왕자보다는 젊은 황제가 더 낫잖아?

    게다가 그녀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황제가 남편으로는 훨씬 매력적인 것도 사실.

    하지만 안질리나 치맥은 황제의 청혼도 거절했다.

    왜?

    “너무 일러.”

    새로운 개성과 매력의 미남을 만날 때마다 설레는 가슴!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미남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짜릿했다.

    그녀가 수많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중에서도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 푹 빠졌던 이유.

    당연히 그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결혼은 절대 안 돼...!’

    왕비(王妃)가 왕(王) 이외의 남자를 곁에 두도록 가만히 놔둘까?

    유전자 검사도 안 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난 아이의 진짜 아비가 누구냐는 시비가 붙을 빌미를 제공할 짓을 허용할 리 없다.

    즉, 결혼하면 그걸로 끝!

    모든 미남을 다른 여자들에게 양보하고, 한 남자의 여자로 여생을 보내야 하리라.

    “그년 때문에...!”

    안질리나 치맥이 증오하는 여자는 셋째 언니 안밀리나 치맥.

    소설 작가의 설정에 따라, 정의롭고 양심적인 치맥 백작은 태중 혼약을 먼저 깬 막내딸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런데,

    ‘약혼녀는 나란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그년이...!’

    최근에 전쟁까지 치렀던 두 가문은 소맥 남작과 안밀리나 치맥의 만남을 계기로, 기적적인 관계 회복에 들어갔으니!

    그게 결정타였다.

    도의적인 문제를 해결한 치맥 백작은 왕자의 요구대로 막내딸을 시집보내기로 하는데...

    저항할 힘이 없었던 그녀는 왕자의 별장에 감금되어 결혼식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짜증나!”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잘생긴 호위기사도 부친의 명령으로 셋째 언니에게 빼앗겼다.

    틀어진 두 가문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소맥 공작령으로 향하는 안밀리나 치맥, 그녀를 지키는 임무를 그가 받은 까닭.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똑똑!

    “안질리나 아가씨.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

    침실 밖에서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에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딸각-

    하지만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리면서 왕자가 들어왔다.

    “안질리나 영애. 빠른 진전에 마음이 뒤숭숭한 건 알지만, 부끄러워할 필요 없소.”

    “당장 나가요...!”

    “여기가 내 집이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인데, 어딜 간단 말이오.”

    자상한 말투로 그녀를 달래며 더욱 거리를 좁히는 왕자.

    그만큼 안질리나 치맥은 뒷걸음치며 말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우리는 곧 부부가 될 몸이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뿐. 이전처럼 다른 남자의 눈치를 보며 나를 피할 필요가 전혀 없소.”

    균형이 깨졌다.

    원작 소설에서는 1권부터 5권까지 미남들이 서로 견제하는 바람에 그 누구도 주인공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안질리나 치맥’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독자라도 개인의 취향이란 게 있어서 소설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 순 없으니까!

    더 좋은 미남, 덜 좋은 미남이 있다는 뜻이다.

    “왕자님. 저는 당신이랑 결혼할 마음이 없어요.”

    굳이 결혼해야 한다면 황제를 선택하겠다.

    “......”

    왕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 때문에 덜컥 겁이 났지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안질리나 치맥은 용기를 냈다.

    “당신이 결혼을 강요할수록 제 사랑은 점점 멀어질 거예요.”

    “흠...”

    “이 결혼식을 멈추고 저와 치맥 백작령으로 돌아가요. 기억 안 나세요? 다 함께 즐거웠던 나날을.”

    “...안질리나.”

    “네. 얼른 돌아-”

    “그대는 큰 오해를 하고 있소.”

    “예?”

    어디에 오해가 있다는 걸까?

    “나는 치맥 백작령에서 단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소.”

    “그, 그게 무슨...”

    “애써 태연한 척했을 뿐, 그대가 다른 남자를 보며 미소 지을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소.”

    “......”

    그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안질리나 영애.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그렇지 않아요...!”

    “내가 아닌 다른 남자들을 보지 않았소?”

    “저는 모두를 사랑해요!”

    “하하! 나도 왕국의 모든 백성을 사랑한다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안질리나 치맥, 오직 그대뿐이오.”

    “어째서...”

    안질리나 치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왕자의 사고방식을.

    당연히 알 리 없다.

    “사랑에 이유는 없소. 그대가 나를 싫어해도 나는 끝까지 그대를 사랑할 것이오.”

    “그, 그런...”

    주인공을 사랑하는 ‘왕자’란 인물의 설정이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소설 작가에게 따져야지.

    왕자의 눈동자에서 광기마저 엿보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제가 그대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더군. 거절하면 왕국이 멸망할 각오를 하라면서.”

    “아!”

    안질리나 치맥은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거절했지.”

    “미, 미쳤어요?!”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건이 커지고 있었다.

    “이미 이 전쟁은 내가 이겼소. 황제가 노리는 그대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이지.”

    “윽! 아, 아파요!”

    왕자에게 가녀린 손목을 붙잡힌 안질리나 치맥.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몸부림쳐봤지만, 힘의 차이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다.

    “내 아이마저 생긴다면 황제는 절망하겠지.”

    “아이?!”

    왕자의 손이 점점 아래로 향하면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똑똑!

    “왕자님.”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알겠다.”

    슥-

    안질리나 치맥을 놔준 왕자가 돌아서며 말했다.

    “이틀 뒤에 무도회가 있소. 내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대를 차지했음을 알리는 자리지.”

    “......”

    “사랑하오.”

    털썩.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안질리나 치맥은 왕자가 떠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도와줘...”

    누가 좀 도와줘!

    그녀는 소설 전개를 한참 벗어난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도와줄까요?”

    검은색 고깔모자를 쓴 수상한 여인이 별장 3층 테라스의 커튼을 젖히며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

    굽이 높은 검은색 구두를 신고 도도하게,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누구...?”

    “제 정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안 그런가요?”

    “...절 도와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저는 당신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니까요.”

    마녀는 웃었다.

    * * *

    나는 소맥 공작의 저택에 무사히 귀환했지만,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곧바로 전운이 감도는 항구도시로 이동하게 됐다.

    “오오! 아몰랑 남작! 어서 오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공작님.”

    “남작의 말대로 황제가 정말로 미쳤어!”

    “그런 것 같네요.”

    전함들이 잘 보이는 망루에서 지시를 내리던 소맥 공작.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구세주를 맞이하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제국에서 선전포고를 해왔네!”

    “명분이 뭔가요?”

    “황후(皇后)를 납치했다는군.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그러게요.”

    황제의 머릿속에서 주인공은 이미 아내인 모양이다.

    ‘정말 무서운 집착일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어처구니없었다.

    “남작. 피곤한가?”

    “네.”

    “하하! 그래도 당장 가야 하네! 전장이 남작을 기다리거든!”

    “전장이라...”

    결국에 올 것이 왔다.

    “무서운가?”

    “네. 무섭습니다.”

    소중한 뇌세포가 또 파괴될 것 같아서 두렵다.

    “금방 익숙해질 걸세.”

    “......”

    전쟁이 격화되기 전에 환자가 정신 차리길 빌어보자.

    * * *

    왕국과 제국 사이에는 유럽의 지중해 크기의 바다가 있다.

    그리고 소맥 공작령은 지리적인 이유로, 왕국의 건국 초창기부터 제국의 해군을 견제하는 방파제 역할을 억지로 떠맡아왔다.

    “힘든 싸움이 될 거야. 황제가 직접 움직였어.”

    후계자는커녕 사생아조차 없는 젊은 황제가 죽으면 제국은 끝장!

    그 위험성을 본인도 알 텐데, 주인공의 결혼 소식에 미쳐서 친정(親征)을 결정한 모양이다.

    “황제가 이끄는 주력함대만 무너트리면 되겠네요.”

    “맞네. 황제를 생포할 수 있다면 최고지만, 죽어도 나쁘지 않네. 후계자가 없는 제국은 바로 내전에 돌입하게 될 테니.”

    “그때가 기회죠.”

    소맥 가문이 왕가(王家)로 도약하려면 제국의 내전은 필수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황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피마앙 백작이 비밀리에 내게 서신을 보냈네.”

    “뭐라고 하던가요?”

    “황제랑 함께하는 못난 아들을 생포하면 자신의 함대는 바로 항복하겠다는군.”

    “잘됐네요.”

    “그때는 정말 소름 돋았네. 아몰랑 남작의 준비성에.”

    “과찬이십니다.”

    소맥 공작은 항구에 정박해있는 전함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세부적인 전략을 설명했다.

    이제 출항을-

    “각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인가?”

    “혼사를 앞둔 치맥 백작의 4녀, 안질리나 치맥 영애가 왕궁에서 실종됐습니다!”

    “...언제 실종됐지?”

    “이틀 전입니다!”

    왕국의 수도에서 주인공의 실종으로 난리가 난 후에 소맥 공작령까지 알려지는 데 걸린 시간.

    나도 얼떨떨했다.

    ‘결혼하기 싫어서 가출했나?’

    하지만 왕자의 감시를 피해서 가출하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강하게 남았다.

    “금방 찾을 겁니다. 어쩌면 이미 찾았을 수도 있고요.”

    “그렇겠지. 거참! 그년은 사고 치는 게 취미인 모양이군.”

    “하, 하...”

    환자를 욕할 수 없었던 나는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때,

    “각하! 급보입니다!”

    “그년을 찾았다는 소리겠지.”

    전령이 할 말을 추측한 소맥 공작은 시큰둥했다.

    “아닙니다!”

    “오! 그러면 시체로 발견됐나?”

    “아닙니다!”

    “......”

    “왕궁에서 실종된 안질리나 치맥이 제국에 있다고 합니다!”

    “그년이랑 결혼하고 싶었던 황제가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군. 가짜를 만들 줄이야.”

    소맥 공작의 판단이 옳다.

    왕국의 내륙에서 제국으로 이틀 만에 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바다를 건너는 데만 이틀 넘게 소요되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우리는 전령의 보고를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각하. 피마앙 백작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줘보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몰랑 남작. 각오를 다져야 할 것 같네.”

    “예? 각오요?”

    “황제가 안질리나 치맥을 품에 안고 황성으로 돌아갔다는군.”

    “......”

    황제를 생포하거나 죽여서 제국을 혼란에 빠트린다는 전략을 쓸 수 없게 됐다.

    “그의 아들인 피마앙 남작이 진짜임을 확인했다는군. 황제가 환영회까지 연다는구먼. 허허!”

    “말도 안 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판타지가 일어났다.

    아무튼,

    ‘환자가 왕국을 탈주해서 제국으로 넘어간 이유를 모르겠네.’

    결혼 상대가 왕자에서 황제로 바뀌었을 뿐이잖아?

    “남작. 무기를 들게. 전쟁이 막 시작됐어.”

    “끝난 것 아닌가요?”

    제국은 왕국에 빼앗긴 황후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잃었다.

    “망명한 그년이 조국을 멸망시켜달라고 황제에게 부탁했다는군.”

    “하아?”

    “아몰랑 남작.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게요.”

    이젠 뒤가 없는 정면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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