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는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의 사랑과 행복만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 경제, 정치, 문화...
그래서 연애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를 전부 배제했다.
‘이게 당연하지.’
개연성을 위해 상업성을 무시했다면 인기 소설이 될 수 없었고, 환자도 이렇게 빠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소설 세계의 원주민들은 어떨까?
소설 독자는 주인공의 행복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지만, 원주민들은 ‘안질리나 치맥’이 행복해진다고 삶이 나아지진 않는다.
역으로,
“멈춰라! 우리는 산적이다!”
“죽기 싫으면 가진 물건을 다 내놓고 꺼져라!”
“순순히 우리의 말을 따르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주인공의 이기심 때문에 원주민들의 삶은 힘들고 불행해진다.
소맥과 치맥, 두 가문의 전쟁.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강제로 징집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해도 피해가 전혀 없을 순 없으니까.
줄어든 병력만큼 도시와 마을의 치안이 나빠졌고, 전쟁의 광기와 피에 취한 자들은 어설픈 산적이 되어 떠돌고 있었다.
“남작님.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스르릉-
말의 안장에 채워진 칼집에서 자연스럽게 칼을 뽑아 드는 아가씨.
겉보기에는 칼보다 꽃이 어울릴 것 같지만, 여행하는 동안 내 검술을 봐줄 호위기사다.
스릉-
스르릉-
그리고 우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보좌하는 수습기사와 종자들이 그녀처럼 칼을 뽑으며 함께 돌진했다.
“뭐, 뭐야?!”
“제발 살려주세요~!”
“히익?! 도망쳐-”
우리가 평범한 여행객인 줄 알았다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초보 산적들이 전의를 잃고 도망쳤다.
달그락!
푹찍!
말발굽에 밟혀 죽고, 칼에 목이 베이며 죽고, 거리를 벌렸다고 안심하다가 등에 화살을 맞고...
숫자로는 우리보다 3배 많았던 산적 무리를 정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고했습니다, 발렌타인 경.”
발렌타인.
대대로 소맥 가문에 충성해온 기사 가문의 여식이며, 소설 원작에서 주인공과 약혼자의 태중 혼약이 깨지는 결정적인 원인!
하지만 이만한 소설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설정은 이름과 출신이 전부였다.
아니,
‘대부분이 그렇지.’
소설 작가는 주인공과 미남들의 외모 묘사에는 솜털 하나까지 공을 들였고, 그 밖의 인물에는 무신경했다.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아름답다는 서술 한마디조차 아까워했는데….
“아몰랑 남작님.”
“여기서 잠시 쉬면서 정리하도록 하죠. 피가 묻은 채로 돌아다니면 너무 눈에 띄니.”
“알겠습니다.”
스륵-
여행자용 두건을 벗고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 발렌타인 경의 얼굴이 드러났다.
옅은 금색의 단발머리, 흑진주처럼 크고 뚜렷한 눈, 아담한 입술, 군살 하나 없는 갸름한 턱선...
노력으로 완성된 미인이랄까?
평범한 귀족 아가씨들은 엄두도 못 낼 운동량으로 단련된 신체의 건강미와 균형미도 돋보인다.
‘이게 맞지!’
왕국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약혼녀를 놔두고, 공작가의 후계자가 한눈팔았던 ‘조연’이 흔한 외모의 소유자라면 이상하잖은가?
같은 남자로서 소맥 남작의 실수가 조금은 이해됐다.
휙- 휙-
발렌타인 경과 수행원들이 뒷정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검술 연습을 했다.
‘눈을 감지 않고 칼끝을 응시...’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산적 토벌을 함께할 순 없었다.
호위하는 대상인 내가 몸을 사리지 않으면 기사와 수행원들이 마음 편히 싸울 수 없으니까.
“남작님. 자세가 처음보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런가요?”
“의문을 갖지 마십시오. 망설임이 생기면 칼날이 무뎌집니다.”
“네.”
이 소설 세계관에는 남성보다 부족한 여성의 근력을 대처할 판타지 요소가 없다.
그래서 여성 기사, 여성 용병, 여성 산적 등은 매우 희귀한 편.
아무리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남자들도 힘든 ‘기사’가 된 그녀의 노력과 재능은 주인공 따위랑 비교할 수 없다.
‘정말 대단해.’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는 흔하지만, 남자의 영역에서 활약하는 여자는 흔치 않으니까.
타고난 재능과 출신의 지분을 고려하더라도, 발렌타인 경은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치맥 백작령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치안은 옛날만 못하지만.”
“참전하지 않으셨나요?”
스윽-
휘두르던 검을 잠시 내려놓은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기사가 출전하는 순간, 두 가문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을 강을 건너니까요.”
“아하!”
이왕 물어보는 김에 하나 더 물어보기로 했다.
“발렌타인 경은 소맥 남작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누나들에게 둘러싸여 기를 못 펴는 불쌍한 오빠? 멀리서 보고 있으면 측은할 때가 있습니다.”
“아하!”
소설 원작에서 약혼자가 한눈팔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다 있었다.
“아몰랑 남작님은 애인이 있으신가요?”
“최근에 차였습니다...”
괜한 주제를 꺼냈다가 아픈 곳을 기습당했다.
“어머! 제가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질렀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별다른 문제 없이 치맥 백작령의 본성(本城)에 도착했다.
* * *
연애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중 하나는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찾는 것이다.
잠깐도 아니고 평생.
이혼이란 변수가 있지만, 처음부터 이혼할 생각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사기꾼뿐이리라.
즉, 한번 결정하면 바꿀 수 없기에 배우자는 신중하게 선택한다.
외모, 성격, 재산, 나이, 취미, 직업, 건강, 출신...
그래서 많은 요소를 따진다.
“어라? 정말로요?”
“네. 보육원에 말씀하신 소년이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발렌타인 경의 종자가 수집한 정보는 뜻밖이었다.
‘주인공을 보좌하는 천재 미소년을 아직도 안 데려갔다고?’
시간의 흐름은 벌써 소설 3권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주인공에게 빙의한 환자의 연애 진행 속도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뎠다.
작가가 일부 독자들의 취향을 존중해서 넣은 똑똑한 미소년.
귀족을 혐오했으나, 주인공이 보육원의 동생들을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해서 따르는 인물이다.
‘이건 기회야!’
환자가 읽지 못한 5권에서 이 미소년의 과거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사막왕국의 왕자!
내란으로 왕족들이 몰살당하면서 타국에 버려진 어린 왕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내 추측이지만, 주인공의 남자 중에서 가장 배경이 변변찮은 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이런 뜬금없는 설정을 추가한 게 아닐까?
그래서 4권까지의 내용만 아는 환자는 이 소년의 중요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준비해주세요. 제가 직접 만나겠습니다.”
“남작님. 이 술집에서 왕자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왕자보다 이 소년이 훨씬 중요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왕국 수도의 치열한 정치판으로 안 돌아가고 치맥 백작령에 죽치고 있는 한심한 왕자를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스윽.
스르륵.
여행자용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후에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도시의 빈민가 구석에 자리한 보육원.
빈민가라고 하면 오물과 쓰레기로 매우 지저분할 것 같지만...
“말랑?”
“말랑~”
내가 이 세계에서 맨 처음에 마주친 외계생명체 ‘슬라임’이 수시로 청소해서 청결한 편이었다.
슬라임(Slime).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외계생명체가 온종일 말랑거리면서 쓰레기, 시체, 먼지, 오물 등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다.
이로운 생물!
먹이사슬의 최하위권에 있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육식동물의 식량원이 되어주기도...
‘현실에 가져가고 싶은걸!’
꿈이라서 유감이다.
“이리 와.”
“말랑~”
원작 소설에는 언급조차 없었던 외계생명체.
하지만 슬라임은 박테리아처럼 이 세계의 생태계에 꼭 필요한 환경미화원이었다.
“슬라임이 남작님을 무척 잘 따르네요.”
“이상한 건가요?”
“네. 슬라임을 먹는 야만인은 드물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슬라임은 인간이 다가오면 도망치는 편입니다.”
“그렇군요. 너도 그렇니?”
“말랑? 말랑!”
내 머리 위에 올려놓은 슬라임이 대답하듯 말랑거렸다.
철컥.
빈민가에 사는 깡패들은 우리의 허리에 채워진 칼을 보고는 슬금슬금 길을 피했다.
덕분에 쉽게 도착한 보육원.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의 외관을 보자마자 오랜만에 내 적성을 상기하게 됐다.
‘무당이 뭘 무서워하리!’
안쪽에서 꽁꽁 틀어 잠근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똑.
“실례합-”
“안질리나 누나가 보낸 분들이라면 그냥 돌아가 주세요.”
“......”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환자는 뭔 실수를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주인공과 미소년은 친한 오누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중에 사이가 틀어진 것 같다.
참 기가 막히는구먼?
“저는 안질리나 치맥 영애랑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민심이 흉흉하여 모르는 분께는 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현관문 너머에서 자기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소년.
하지만 이 정도로 물러설 내가 아니다.
“사막에도 꽃은 핍니다.”
“...꽃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은 먼 여정에 지친 꿀벌의 그늘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사막에 다시 꽃이 핍니다.”
찰칵! 끼익-
굳게 닫혀 있었던 보육원의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소년.
그의 살짝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와 황금색 눈동자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실례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우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계의 눈빛을 받으며 보육원의 안으로 쭉 들어갔다.
“아이들이 많네요.”
“최근의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이 흘러들어왔습니다.”
“원장님이신가요?”
내부를 둘러보는 내게 다가온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여긴 원장이 없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위해 요리해줄 뿐이죠. 그래도 이곳에 원장이 있어야 한다면 저 아이일 겁니다.”
“설명 감사합니다.”
소년은 우리를 인도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아이들이 있으니까.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장소는 이 보육원에 없었다.
‘슬슬 밑밥을 깔아볼까?’
손님이 빈손으로 오면 실례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준비했다.
“발렌타인 경. 가져온 빵을 저 식탁에 전부 놔주세요.”
“네.”
보육원에 아이들이 소설 원작의 서술보다 2배 가까이 많아서 빵의 물량 조절에 실패했지만, 분위기를 전환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음껏 먹어도 돼.”
“......”
“......”
“안 먹으면 내 머리 위에 있는 슬라임이 다 먹을걸?”
“말랑말랑!”
내가 슬라임을 빵 옆으로 옮기자마자 위기의식을 느낀 아이들이 망설임없이 달려들었다.
“안 돼!”
“어? 나도!”
“빵이다!”
긴장감이 흐르던 분위기가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에 묻히면서 단번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빵이 줄어드는 속도 또한 무시무시했는데...
“발렌타인 경. 빵을 좀 더 부탁합니다.”
“네.”
나를 호위해야 하는 그녀는 남고 종자와 수행원이 보육원 밖으로 빵을 사러 나갔다.
“...감사합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소년이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 편히 말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고마워. 나는 네가 왕위를 되찾을 때까지 지켜주려고 온 사람이야. 원한다면 네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보육원의 아이들까지도.”
“어떻게 왕가의 노래를 알고 계신 겁니까?”
“무당이라서.”
거짓말은 아니다.
“무당?”
“그건 우리의 신뢰가 좀 더 쌓이면 가르쳐줄게.”
“...알겠습니다.”
주도권이 내게 있음을 잘 아는 소년은 순순히 말을 따랐다.
‘똑똑하긴 하네.’
소설 원작의 설정에 충실했다.
“그리고 이걸 알아둬. 나는 네 신하가 아니야. 그래서 보호해주는 대가를 확실하게 받을 생각이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동생들은 건들지 마세요.”
“약속할게.”
소설 작가에게 선택받지 않은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만큼 나는 못된 어른이 아니다.
“그러면 믿고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아! 형이라고 불러도 돼.”
“신뢰가 좀 더 쌓이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쭈?”
주인공의 복잡한 연애사가 파탄 나지 않도록 조율하는 ‘집사’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이 소년이 없는 주인공은 브레이크 없는 스포츠카나 다름없다.
“말랑?”
“그러게.”
정말로 모르겠는걸?
환자가 또 어떤 똥을 싸지를지 벌써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