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3장-5절]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강문수와 서혜주가 잘못 생각한 게 있다.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이 된 그녀가 원작 소설을 대충 읽어서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
대충은커녕, 너무 많이 읽어서 달달 외우는 수준!
그리고 여기서 나온 자신감으로 소설 전개 속도를 무시하고 빠르게 진행한 게 실수다.
“억울해...”
안질리나는 자신이 아는 원작 소설 정보를 기록해둔 수첩을 훑어보면서 울상을 지었다.
“억울해...”
너무나 억울했던 그녀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소설 원작이랑 대사까지 거의 똑같이 진행했는데, 어째서 다른 결과가 나온 걸까?
그래서 억울했다.
“어디서 실수했지?”
유모의 딸이자 소꿉친구인 시녀가 곱게 다듬어준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녀는 과거를 곱씹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억울하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인 줄 알았다면 억울할 리 없으니, 그녀로선 너무나 당연한 판단이리라.
‘답답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얘기하고 위로받고 싶은데, 절대로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소설 원작의 도움으로 수집한 미남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똑똑.
“안질리나 아가씨.”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흠칫한 그녀는 잽싸게 수첩을 숨겼다.
“...무슨 일이죠?”
빙의하면서 주인공의 기억도 계승했기 때문에 시녀랑 함께한 어린 시절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두 여성의 삶이 뒤섞이면서 외모는 그대로여도 말투와 행동은 ‘안질리나 치맥’이 아니게 됐다.
예를 들자면?
진짜 주인공은 수시로 호위기사만 대동한 채 빈민가의 보육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다.
하지면 ‘그녀’는 더러운 아이들이 놀아 달라며 달라붙는 경험을 한 뒤로는 진저리치며 그만뒀다.
아! 물론, 그만두기 전에 보육원에 있는 ‘주인공의 남자’를 데려오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아가씨께서 데려온 소년이 떠났습니다.”
“헛! 언제요?!”
“얼마 안 됐습니다.”
“당장 붙잡아요! 제가 갈 때까지 절대 저택 밖으로-”
“아가씨.”
문밖에서 들린 엄중한 시녀의 목소리에 안질리나는 숨을 삼켰다.
“또 잔소리인가요?”
“그건 포기했으니 안심하세요.”
“......”
“브로콜린 남작님이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짜 무례하네요! 약속도 안 잡고 갑작스럽게 찾아오다니...!”
“그러면 브로콜린 남작님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오후에 피마앙 도련님이랑 다과회가 있어서 만나기 어렵다고 정중히-”
“자, 잠깐! 그걸 얘기하면 또 오해가 쌓이잖아...!”
안질리나는 짜증이 치밀었다.
시녀는 믿을 수 있는 소꿉친구라는 소설 설정이 있는데, 어째서 이리도 도움이 안 될까?
“아가씨. 목소리가 크십니다.”
“...오늘은 피곤해서 만나기 힘들다고 전해줘요.”
“그 소년은 어떻게 할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나중에 알아서 할 테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면 소년이 떠나면서 했던 말은 어떻게 할까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뭐라고 했죠? 친구의 생일 때문에 간다고 했나요?”
“...아가씨께서 상처받을 게 염려되어 망설였습니다.”
“뭐라고 했는데요.”
“그 거짓말쟁이 누나에게 전해주세요. 내 소중한 동생들을 쓰레기처럼 내려다보던 시선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라고.”
“......”
억울했다.
내가 배우도 아니고, 표정 관리가 마음대로 될 리 없잖은가?
보육원의 아이들이 더러운 손으로 옷을 만지고, 냄새나는 입으로 뺨에 키스하고, 수건 대신 그녀의 옷으로 얼굴을 닦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친다.
“아가씨.”
“또 뭔가요?”
“왕자님께서 불필요한 만남을 자제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불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호위기사의 문제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넘어가겠지만, 결혼식 전까지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결혼식?! 미친 거 아니야?! 나는 허락한 적이 없는데!”
“전쟁을 중재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벌써 잊으셨나요?”
“웃기지 말라고 해! 내가 좋아서 멋대로 중재해준 거잖아!”
“아가씨...”
“당장 옷을 준비해줘. 왕자님께 내가 똑바로 말하겠-”
덜컥!
갑자기 침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안질리나는 화를 내려다가 멈칫했다.
“안밀리나 언니?”
“아침부터 시끄럽잖아.”
찬란한 은색 곱슬머리와 비슷한 얼굴형만 봐도 두 사람이 자매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눈꼬리가 여우처럼 살짝 올라가 있어서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안밀리나 치맥.
이 2살 터울의 친언니가 아무리 얄미운 소리를 해도 원작의 주인공은 바람처럼 웃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독자’로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셋째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충돌!
이때부터 둘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상태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어머! 숙녀가 그런 상스러운 말을 쓰면 못써.”
“숙녀가 남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괜찮고?”
“그건 미안.”
“뭐?”
안질리나는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미안. 네 시녀가 울길래 무슨 일인지 걱정돼서 들어와 봤어.”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 여자가 내게 사과한다고?’
그녀의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너는 누구야?”
“어머! 당연히 네 언니지. 아니면 뭐로 보이는데?”
늘 우울한 표정이던 셋째 언니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는 걸까?
하지만 괜히 기분 나빠질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아! 맞다. 안질리나. 한 번 듣고 평가해줘.”
“뭘?”
“오빠야♪”
“......”
이 여자가 주인공에게 사사건건 시비 걸던 치맥 백작가의 3녀 ‘안밀리나 치맥’이 맞는 걸까?
설정 붕괴였다.
“어때?”
“응? 뭐가?”
“남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 이건 원래 네 특기잖아.”
“...소름돋았어.”
“그래? 연습이 더 필요하겠네. 조언해줘서 고마워.”
“......”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동생의 쓴소리에도 웃는 셋째 언니.
이럴 리 없는데?
이상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혼란에 빠졌다.
* * *
건국신화만 보면 나라를 세우기 매우 힘들 것 같다.
신(神)의 자손이거나, 신(神)이 인정했거나, 신(神)이 명령했거나, 신(神)이 직접 다스리거나...
하지만 이것들은 지배의 정당성과 전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판타지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호족(豪族)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부동산 재벌들.
그들이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공격받으면 서로 도와주기!’라는 협약을 맺었고, 이 동맹은 혈연으로 더욱 공고해지면서 ‘국가’라는 형태의 밑거름이 됐다.
즉,
‘별거 아니지.’
마음이 맞는 영주들끼리 힘을 합치면 그것이 ‘왕국’이 되고, 그 왕국 내에서 가장 강한 영주가 ‘왕’이 되는 것뿐이다.
“또 쉽게 말하는군.”
“공작님께서 손님들을 얼마나 잘 구슬리느냐에 달렸습니다.”
“말해보게. 내가 연회에서 누구에게 뭘 하면 되는가?”
나를 바라보는 소맥 공작의 신뢰로 가득한 눈빛.
내가 호명한 귀족들이 예외 없이 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모두 중요하긴 하지만, 제국의 바다를 수호하는 피마앙 백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째서인가?”
“그는 황제가 아닌 제국에 충성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황제의 뜻에 반대하는 전쟁광처럼 묘사됐지만, 전성기를 맞이한 제국이 주변국을 침공하는 게 잘못일까?
전쟁이 옳은 건 아니지만, 주인공이 전쟁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자국의 성장 기회를 포기한 황제가 정상인지 의문이다.
“하지만 보좌하던 아들이 사랑 때문에 부친을 배신하면서 황제의 권력이 강해집니다.”
“황당하군.”
소설 원작에서는 이 불효자를 ‘소신 있는 잘생긴 남자’로 포장해서 주인공 옆에 뒀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랑에 눈이 먼 머저리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행동이 소신 있는 건가?
부모의 결정이 싫었으면 진즉부터 반대했어야지. 그게 소신이다.
반려자도 아닌 여자의 말을 듣고부터 부모에게 반항하는 건?
그냥 등신이다.
“황제를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척 어려운 주문이군.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지 않은가?”
“능력은 있지만, 여자에 빠져서 판단이 흐려지고 대국을 볼 줄 모른다는 식으로 몰아가야죠.”
“과연...”
가진 재능이 아무리 많아도 활용하질 못한다면 무능력한 인간이나 다름없다.
“지금부터가 진짜입니다.”
“경청하지.”
“황제가 여자 하나 때문에 국익을 포기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식으로 계속 충성심을 자극하십시오.”
“설마...?”
“제가 장담하죠. 황제는 안질리나 치맥을 절대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건 책으로 확인한 사실입니다.”
황제.
주인공을 좋아하는 미남 중에서 가장 개연성 없는 인물.
후계 다툼으로 유년기를 힘들게 보내던 황제가 어린 주인공을 만나서 힘을 얻었다는 추억 설정으로 무조건 집착하기 때문이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피마앙 백작이 불쌍하군. 믿음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인데.”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소맥 공작은 웃고 있었다.
“피마앙 백작 외의 인사들도 중요하니 잘 부탁합니다.”
“흠. 슬슬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이군. 다녀오지.”
“저도 가보겠습니다.”
“음? 아몰랑 남작도 연회에?”
“아뇨. 저는 지금부터 치맥 백작령에 잠입할 예정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보내줬을 텐데, 남작이 말하니 괜히 불안해지는군.”
“그런가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보물은 가까이에 둬야 안심이 되는 법이라네, 남작.”
“과찬이십니다.”
“짝이 없는 딸아이가 있었으면 그대에게 소개해줬을 텐데... 딸이 아쉬운 날이 올 줄이야! 허허!”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감추기 위해 몸을 돌리며 퇴장을 준비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수행원을 붙여주지.”
내 귀에는 감시자를 붙이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면 절대로 안 보내줄 터.
아군에게 감춰야 할 만큼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수락하기로 했다.
그 대신,
“호위도 겸해서 검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부탁합니다. 가면서 배우고 싶습니다.”
“그 깐깐한 기사단장이 단시간에 남작을 인정한 이유가 있었군.”
“그랬나요?”
“겉보기랑 다르게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지. 남작이 재능은 평범해도 노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더군.”
“저에게는 마주칠 때마다 굼뜨다고 핀잔주더니...”
뒤에서는 칭찬하고 있었군?
가슴이 웅장해진다.
“치맥 백작령에 가는 목적을 말해보게. 그래야 좀 더 적합한 수행원을 붙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소맥 공작은 내게 관심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만큼 평범하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주긴 했지만.
“내부분열.”
“음?”
“공작님을 견제하기 위해 치맥 백작가랑 혈연을 맺으려는 왕자가 결혼을 서두르도록 도울 겁니다.”
“...남작. 그건 우리 가문에 안 좋은 일이 아닌가?”
“제국에서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여자 하나 때문에 설마...”
“저를 믿으세요.”
황제가 소설 원작의 설정에 충실하다면, 주인공의 결혼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암살, 전쟁, 납치, 배신...
‘작가는 냉철한 황제가 주인공 앞에서만 순한 양이 되는 이중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이건 심각한 정신병이다.
주인공이 괴한들에게 납치됐다는 잘못된 소식을 들은 황제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에피소드.
안질리나 치맥을 납치한 나라는 그 죄를 물어서 갓난아기까지 죽이겠다고 엄포를 내렸다.
그런 황제.
결혼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이성을 잃으리라.
“믿고 준비하지.”
“감사합니다.”
주인공 때문에 두 나라가 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