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이 계획은 소맥 남작이 동갑의 여성이랑 결혼할 마음이 있어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해봐야지.’
그가 어째서 연상과 동갑의 아내를 원치 않는지 알아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어서 오게, 아몰랑 남작!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네!”
“안녕하세요, 기사단장님.”
나보다 머리 하나쯤 큰 사내가 관찰하는 시선으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창을 좀 다룰 줄 안다더군.”
“기초만 배웠습니다.”
“흠. 겸손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 터. 이 창을 사용하게.”
휙!
기사단장은 손에 쥔 창을 내게 던지며 말했다.
“대련입니까?”
“하지만 나랑 하진 않네. 힘을 조절하는 게 서툴거든. 부단장. 상대해주게.”
“네. 단장님.”
고릴라 같은 우락부락한 체형인 단장이랑 달리, 부단장은 치타처럼 호리호리했다.
“잘 부탁합니다.”
“마음껏 공격하십시오.”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슈욱-
탐색을 위해 최대한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창을 내질렀다.
기본적인 찌르기.
하지만 부단장은 허리를 살짝 비틀어 가볍게 피하면서 창대로 내 허리를 노렸다.
‘얕보였네!’
창끝의 뾰족한 칼날을 쓰지 않고 몽둥이처럼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렇다면!
“흡!”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부단장이랑 거리를 좁혔다.
큰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창이 내 옆구리에 닿기 전에 먼저 공격하기 위해.
“호오?”
가벼운 탄성을 내지른 부단장이 한 걸음 후퇴했다.
“어딜...!”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고, 마주 본 순간부터 직감했다.
쌓아온 시간, 노력, 재능, 경험이 비교가 안 되니까. 어쭙잖은 산적들이랑 다르다.
그러니,
‘어떻게든 한 방만!’
나를 죽이진 않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이런 과감한 돌격은 절대 하지 못했으리라.
“단조롭군요.”
부웅-
여유를 잃지 않은 채 후퇴하면서 훈수를 둔 부단장이 창을 쥔 손목을 꺾었다.
‘헛-?!’
창끝이 ‘8’을 그리면서 회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창대가 내 발목을 후려치고 있었다.
피할 수 있을까?
못 해도 해야만 했다.
“큭...!”
그러나 너무 빨라서 오른쪽 발목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직 괜찮아!’
흐트러진 무게중심을 긴 창으로 유지하면서 뛰어오른 왼발이 창대를 피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호오?”
이어진 두 번째 탄성.
여유만만한 부단장에게 한 방 먹여주자는 집념 하나만으로 간신히 거리를 좁혔다.
‘이 거리라면!’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피할 수 없다고 장담하며 창을 내질렀다.
“혀 조심.”
“무슨- 커윽?!”
부드럽게 180도 회전한 창의 뭉툭한 뒤끝이 내 턱을 올려쳤다.
뻑!
미리 경고해주지 않았다면 혀를 깨물지 않았을까?
하지만 시야가 흔들리면서 가벼운 뇌진탕이 온 나는 대련을 속행할 수 없었다.
털썩.
“졌습니다.”
연무장의 흙바닥에 주저앉으면 항복했다.
“흠. 전부 본 건 아니지만, 2년 정도 전장에서 구른 본국의 정예병 수준이군요.”
“그렇군요.”
부단장의 냉정한 평가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진 않았다.
일전에 산적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지구력이 남들보다 월등히 좋았기 때문이니까.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일반인이 며칠 배운 기본기만으로 대단한 실력자가 될 리 없다.
“...담담하시군요.”
“그러면 안 됩니까?”
“흠. 단장님은 순수하게 실력 하나만으로 소맥 공작님께 남작의 직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아몰랑 남작님은 전사가 아니시니...”
쓴웃음을 지은 부단장이 말끝을 흐리며 몸을 돌렸다.
“분하네요. 배울 수 있을까요?”
뚝.
강해지고 싶은 내 질문에 발걸음을 멈춘 부단장.
그는 내가 아닌 관전 중인 단장에게 시선을 주며 답했다.
“단장님께 여쭤보십시오.”
“아!”
책임자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살짝 언짢은 표정의 단장이 도발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몰랑 남작. 당신은 무관(武官)이 아닌 문관(文官) 같은데... 그래도 굳이 무관 흉내를 내고 싶다면 지금 바로 이곳을 10바퀴 돌아봐.”
“...알겠습니다.”
비틀.
여전히 어지러워서 균형을 잡기도 벅찬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힘들어도 해야지!’
주인공의 남자들에게 살해되지 않으려면 무조건 강해져야 한다.
* * *
전쟁! 살인! 정치! 훈련!
남녀의 가슴 졸이는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안에서 나는 뭘 하는 걸까?
지금까지 장르를 한참 벗어났던 내가 처음으로 올바른 길을 걸었다.
“공자님.”
“싫다고 했잖은가!”
소맥 남작이 짜증을 냈다.
“연상과 동갑의 여성이 싫은 이유가 뭡니까?”
“그걸 말하면 나는 살해당한다고 몇 번을 말했나!”
“비밀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몰랑 남작을 어떻게 믿고?”
“제 눈을 보십시오. 당신을 속일 인간으로 보입니까?”
“오! 아주 잘 보이는군! 무슨 꿍꿍이가 있는 눈이야!”
“킁.”
내가 그에게 ‘왕’의 자질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
소설 작가가 주인공의 약혼자에게 ‘사람 보는 눈’을 줬기 때문이다.
이 좋은 재능을 준 이유?
당연히 좋은 의도는 아니었다.
‘진짜 어이없어서.’
약혼자는 약혼녀 주위를 기웃거리는 남자들의 면상을 힘껏 후려칠 권리와 명분이 있다.
하지만 이러면 주인공이 소맥 남작 외의 남자를 마음껏 만나고 연애할 수 없잖는가?
그래서 작가는 약혼자가 주인공을 양보하도록 만들었다.
“아몰랑 남작. 나를 누구에게 팔아넘길 셈인가?”
“안 팝니다! 괜찮은 동갑의 영애를 소개해주고 싶을 뿐이죠.”
“이번에는 진실성이 느껴지는군.”
“......”
약혼녀를 노리는 남자들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결혼에 부담을 느끼도록 설정을 짰다.
오직 이 전개만을 위해!
군주에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재능을 약혼자에게 줬다.
“이것 하나만 묻자.”
“대답하면 연상과 동갑이 싫은 이유를 가르쳐주실 건가요?”
“듣고 판단하지.”
“킁. 뭡니까?”
“내가 그 동갑의 영애랑 결혼하게 되면 소맥 가문에 얼마만큼의 이득이 있지?”
사랑보다 가문.
이 사고방식도 소설 작가가 연애에 방해된다고 생각되어 약혼자에게만 준 ‘쓰레기 개성’이다.
‘아주 좋아.’
사사로운 감정보다 전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이것도 훌륭한 왕(王)이 되려면 꼭 필요하다.
“보험입니다.”
“보험?”
“약혼녀였던 치맥 영애도 저처럼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합니다.”
“...이해했다.”
“그러면?”
“후우... 말해주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가문의 장남(長男)임에도 불구하고 막내다. 누님들만 있지.”
“설마...?”
이건 같은 남자로서 예상됐다.
“아몰랑 남작. 나는 오빠라는 말이 듣고 싶다.”
“.......”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가문을 위해서라면 아내가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아도 견딜 수 있다.”
“각오가 대단하시네요.”
꾹.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발꿈치로 반대편 발등을 찍었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지?”
“안밀리나 영애입니다.”
“치맥 백작가의 3녀인가...”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동갑의 아내가 싫었던 내가 아버지께 무릎 꿇고 애원했으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로 혼약을 미뤘고...”
“백작가에 딸이 또 태어났군요.”
“맞아. 진짜 다행이었지. 그녀가 안 태어났으면 꼼짝없이 동갑이랑 결혼할 뻔했으니까. 혼사가 이렇게 꼬여버릴 줄은 몰랐지만...”
나를 계속 웃기던 소맥 남작이 씁쓸한 미소로 마무리했다.
“발렌타인.”
“콜록! 가,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왜 나오는가!”
“남작님. 오빠는 이쪽에서 많이 들으세요.”
“...그녀가 불러줄까? 누님들처럼 나를 혐오의 눈으로 보는 건...”
“왕이 되십시오. 그러면 누구도 당신을 혐오할 수 없을 겁니다.”
“왕... 맞아. 내가 왕이 되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도록 명령하면 되겠군? 거역하면 사형.”
“......”
이 남자를 왕으로 만들어도 괜찮을지 살짝 걱정스러워졌다.
* * *
내가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더라도 왕국을 세우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곤란하지.’
현실의 내 몸도 걱정되고, 소설이 완결되는 2년 뒤의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작 소설에 그 해답이 있다.
“연회를?”
“네.”
소맥 공작의 재확인에 나는 힘을 주어 답했다.
“이유가 뭐지?”
“소유한 땅이 넓다고 왕이 되는 건 아닙니다.”
“연회를 핑계로 인재를 모으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아몰랑 남작.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군.”
소맥 공작의 지적에 나는 현실에서 암기해온 이름들을 쭉 읊었다.
“이 사람들은 꼭 초대해서 친해져야 합니다. 군사왕국의 재상 브로콜린 백작, 기사왕국의 총사령관 트로피칸 후작, 신성왕국의 불가리쓰 추기경, 제국의 도독 피마앙 백작, 제국의 거상 비트코린 남작...”
“만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군.”
숨도 안 쉬고 듣던 소맥 공작이 신음을 삼켰다.
“엄선해서 골랐죠.”
“남작. 내 허언을 사과하지. 그런데 이들을 초대하는 이유가 뭔가? 와줄지도 의문이고.”
“꼭 올 겁니다.”
나는 공작의 눈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흠. 미래가 적힌 책에 이들이 연회에 온다고 기록되어 있었나?”
“그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온다고 단언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
아주 좋은 질문이다!
이에, 나는 소맥 공작이 가장 싫어하는 여성의 이름을 말했다.
“안질리나 치맥.”
“음?”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왕국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그년의 잘난 살가죽을 벗긴 후에 성문에 매달아두고 싶군.”
“......”
두 사람이 절대 만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겠다.
‘피부를 벗긴다니...’
실제로 중세시대에 있던 고문법이긴 하지만,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면 환자가 꿈에서 깨어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것 같다.
“그건 왜 묻지?”
“이들도 공작님이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브로콜린 백작이 자랑하던 아들은 사랑 때문에 가문을 버렸고, 팔불출인 트로피칸 후작은 딸의 약혼자를 빼앗깁니다. 신성왕국의 불가리쓰 추기경은 자식처럼 키운 제자에게 외면당했고, 비트코린 남작의 여식은 파혼당했으며, 피마앙 백작은 아들이 배신...”
혼돈 그 자체!
표면상으로는 주인공에게 잘못은 없다. 그 많은 미남이 멋대로 좋다고 따라다닌 것뿐이니까.
그 증거로, 주인공이 거절하는 대사가 가끔 나온다. 하지만 마음씨가 착해서 심한 말은 못 하고...
어정쩡한 관계를 양산했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
“안질리나 치맥 때문에 아들이 이상해지거나 딸의 눈물을 본 귀족들이 매우 많습니다.”
“저런. 매우 상심이 크겠어.”
“맞습니다.”
“내가 이들을 초대해서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해줘야겠군?”
“오! 정말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공작님!”
“좋군! 아주 좋아!”
소설에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부정적인 내용을 일축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아니잖아?
작가가 애써 외면한 어두운 부분을 노골적으로 파고들 계획이다.
“공작님.”
“더 있는가?”
“연회에 초대하지 못한 힘없는 평민도 따로 챙겨주십시오.”
“아차! 큰 실수를 할 뻔했군! 명단이 따로 있나?”
“물론입니다.”
국경을 초월한 피해자 모임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