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44화 (45/232)
  • 044화

    “커억?!”

    “악?!”

    내 창에 당한 산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쓰러졌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 망설임?

    그런 미온적인 감정은 지난 전쟁터에 버려두고 왔다. 안 죽이면 내가 죽으니까.

    부웅- 빡!

    “커윽?!”

    내가 내리친 창대에 정통으로 정수리를 맞은 산적의 머리가 함몰되며 쓰러졌다.

    “이 자식이...!”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등을 노리는 또 다른 산적.

    공격한 순간을 노린 완벽한 기습이지만, 내가 지난번에 죽은 결정적인 원인이란 게 문제다.

    ‘같은 수법에 또 당할까!’

    죽어가면서 후회하고 반성했다. 조금만 주위에 신경 썼어도 안 당했을 텐데, 라면서 말이다.

    휙-

    내치리며 앞으로 내딛은 오른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몸을 회전했다.

    “헙?!”

    치켜든 단검으로 내 등을 찍으려고 했던 산적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눈을 부릅떴다.

    그 직후,

    촤악-!

    날카로운 창끝이 산적의 목젖을 긁고 지나갔다.

    ‘다음!’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부상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포위까지 당했으니까. 심지어 우리는 보호해야 하는 비전투원도 둘이나 있었다.

    “여자들을 잡아!”

    “죽고 싶으면 와봐...!”

    마차의 짐칸에서 석궁을 꺼낸 두 여인은 서로의 등을 맡긴 채 산적들에게 포위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그녀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는데...

    “빨리 잡아!”

    “네가 해!”

    “떠밀지 마!”

    단 한 발이긴 해도 미리 장전해둔 석궁은 손가락으로 방아쇠만 당기면 되기에 힘없는 여성도 어렵지 않게 쏠 수 있다.

    즉, 그녀들을 잡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드는 둘은 확실하게 사망!

    그건 다시 말해,

    “덤벼!”

    “잡아봐!”

    둘만 죽으면 석궁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여인들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악에 받친 그녀들의 도발에도 산적들은 꼼짝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가장 소중하니까.

    그런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퍽! 푹!

    내가 포위망에 구멍을 뚫고 휘저으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다행이야.’

    우리는 전투에 특화된 용병이나 직업군인이 아니라서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노린 산적들의 수준도 비슷한 상황!

    힘없는 꼬마가 괴롭힐 수 있는 대상은 비슷한 또래의 꼬마밖에 없으니까.

    “젠장! 누가 좀 막아!”

    “이 새끼는 대체 뭐야?!”

    “히익?! 살려- 컥?!”

    전투가 시작된 뒤부터 쭉 경계해왔던 원거리 공격이 여태 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

    게다가 시간은 내 편이었다.

    체력이 좋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나보다 창의 날이 먼저 무뎌져서 못 쓰게 될 정도였다.

    휙.

    과감히 창을 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산적의 것을 쥐었다.

    ‘조금 무겁네.’

    하지만 체력이 떨어져서 빌빌거리는 산적들을 못 쓰러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야! 도와줘!”

    “그년들은 나중에 처리해!”

    “어차피 못 도망가!”

    아직도 두 여인을 어쩌지 못하고 대치 중이던 산적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은 그들의 움직임은 제법 빨랐지만, 힘없는 여성부터 노린 비열한 놈들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썩은 짚단처럼 빠르게 정리됐다.

    “후, 후퇴!”

    “말도 안 돼!”

    “도망쳐!”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산적들을 추적해서 죽였다.

    혼자서 전부?

    당연히 아니다.

    슝! 슝!

    “컥~?!”

    “아악~?!”

    여인들이 목숨처럼 아껴두고 있던 석궁 덕분이다.

    “용서를-”

    푹!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무릎 꿇고 비는 마지막 산적의 목에 내가 창을 찔러 넣으며 전투가 종료됐다.

    “만세! 이겼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뿐, 금방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콜록콜록...”

    “조금만 참으세요!”

    “......”

    “어서 붕대로 출혈을...!”

    “늦었습니다.”

    “아...”

    치맥 백작령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14명이었던 일행은 나까지 포함해서 단 6명만 살아남았다.

    이마저도 1명은 부상이 매우 심해서 내일의 해를 무사히 볼 수 있을지 미지수.

    일행 중에서 가장 어렸던 소년이 오열했다.

    “저 때문에 아저씨가...!”

    “그의 유품을 챙겨서 가족에게 돌려줘야지. 그게 살아남은 우리의 의무다.”

    그리고 은연중에 대장 역할을 했던 남자가 위로했다.

    “네. 흑흑!”

    “힘들어도 서두르지.”

    우리는 죽은 일행들의 유품을 챙긴 후에 땅에 묻고, 산적들의 시신을 뒤져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몽땅 챙겼다.

    전리품의 수익 대부분은 함께 싸운 이들의 유가족들에게 준다고...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아뇨. 모두가 용감하게 싸운 덕분입니다.”

    “그래도 자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야. 살아도 놈들에게 온갖 치욕을 당했을 테고.”

    “운이 좋았습니다.”

    목숨이랑 맞바꾼 실전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만큼 활약하지 못했으리라.

    “운으로 산적을 그만큼 쓰러트리진 못하지.”

    “......”

    나도 이렇게 잘 싸울 줄은 솔직히 몰랐다.

    “자신감을 가져.”

    “...생각해볼게요.”

    “고집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면 책임지고 일행의 유가족들을 챙기기로 한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

    “......”

    그 뒤에 우리는 조용히 마차 짐칸에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달그락달그락.

    산적들이 마차를 끄는 말을 공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말을 팔기 위해 건드리지 않은 거겠지.

    “깡문쑤 씨.”

    “......”

    “주무시나요?”

    “...아니요.”

    나는 마차를 모는 여인의 부름에 피곤한 눈을 게슴츠레 떴다.

    ‘수상해.’

    산적들이 제시한 터무니없는 통행료를 내겠다고 말했던 여인이다.

    그만한 돈이 있으면 용병을 고용해서 안전하게 소맥 공작령까지 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뭔가요?”

    “저에게 문제가 생기면 이 편지를 소맥 공작님께 전해주세요.”

    * * *

    주인공은 소설 제목처럼 백작가의 막내딸이다.

    그래서 그녀의 위에 오빠와 언니들이 잔뜩 있지만, 주인공의 연애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원작에서는 병풍처럼 등장하거나 살짝 언급되는 수준에서 그치는데...

    “저는 치맥 백작님의 세 번째 따님이신 안밀리나 치맥 영애의 유모입니다.”

    “그래서 돈이 많으셨군요.”

    산적들이 제시한 터무니없는 통행료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간단히 밝혀졌다.

    ‘안밀리나 치맥 영애라면...’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를 분석할 때, 주인공의 가족 조사는 당연히 필수!

    셋째 여식인 안밀리나 치맥은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寡婦)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동생을 질투하는 인물로 잠깐 등장하고 마는데...

    “두 가문의 태중 혼약은 소맥 공작가에서 아들이, 치맥 백작가에서 딸이 태어난다는 조건이었어요.”

    하지만 공작가에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 바람에 태중 혼약은 하염없이 미뤄졌고...

    백작가의 여식들은 혼기를 놓칠 수 없어서 결혼했고, 공작가에 아들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막내딸만 홀몸인 상태였다.

    “그 얘기를 왜...”

    “안밀리나 아가씨에게도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미 깨졌잖아요?”

    두 가문은 주인공의 잇따른 실수로 완전히 갈라섰다.

    이걸 봉합할 수 있을까?

    유모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이 살짝 침통한 어조로 답했다.

    “쉽지 않겠죠. 하지만 안밀리나 아가씨의 뜻이 워낙 완고하셔서... 자주 한탄하셨죠. 1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약혼녀는 막내가 아닌 자신이 됐을 거라고...”

    “왜요?”

    “......”

    “비밀인가요?”

    “공자님께서 연상과 동갑의 여성은 싫다고 하셨는데, 두 분은 동갑이십니다.”

    “아하!”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

    존중해줘야 마땅하다.

    “혼기가 찬 여식을 둔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소문내시면 안 됩니다.”

    “네.”

    나도 뇌세포가 파괴될 짓은 할 마음이 없다.

    ‘변수에 또 변수가 꼈네.’

    하지만 좋은 변수다.

    원작 소설에서는 비중이 전혀 없었던 조연의 반란!

    공작령에 도착하자마자 약혼자를 만날 계획을 짜야 했던 나로선 무척 반가운 기회였다.

    ‘아주 좋아! 약혼자가 애용하는 단골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할 생각까지 했었는데...!’

    정체가 불분명한 평민이 왕국에 단 하나뿐인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대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여러 꼼수를 생각해뒀었는데,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나는 선심 쓰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고 편지를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대신, 무탈해도 마지막까지 동행하게 해주세요. 고귀한 분과 대화를 나눠보는 게 소원이거든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실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 여인이 살포시 웃는다.

    “왜요?”

    “귀족의 명예가 걸렸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 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예상됐다.

    ‘귀족도 똑같은 인간이지.’

    귀족을 만나려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순진한 척했을 뿐.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공작령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주인공에게 빙의한 환자를 곧바로 만나서 설득하면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강민에게 이 방법을 썼다가 끔찍한 죽음을 경험해본 나로선 채택 불가능!

    그래서 번거롭더라도 멀리 돌아가기로 했다.

    ‘이건 확실하지.’

    꿈의 세계에서 대적할 존재가 없었던 마법소년마저 무릎 꿇린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명, 실패의 쓴맛!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처럼 미남들에게 둘러싸인 삶에 실패하도록 만들 계획이다.

    환자가 뜻대로 안 되는 이 세계에서 탈주하고 싶어지도록!

    지구(현실)에서 탈주했듯이.

    그것이 내 목적이다.

    “여러분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렴.”

    “잘 가라!”

    공작령에 도착할 때까지 쭉 시무룩했던 소년이 가장 먼저 떠났다.

    중환자는?

    유감스럽게도 부상이 심해서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없었다.

    “저의 부모님은 4대째 여관을 운영하고 계세요. 묵으실 곳이 필요하면... 아니, 꼭 와주세요. 근사한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요.”

    “힘내세요.”

    “꼭 가겠습니다.”

    두 가문의 전쟁에 휩쓸린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갖고 친가로 돌아온 여인.

    소맥 공작령 출신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징집대상 0순위였던 남동생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그녀의 표정이 쭉 어두웠던 이유가 있었다.

    “어라?”

    “왜?”

    “설마, 대장도 공작님을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슬슬 헤어질 때가 됐다고 생각했던 대장은 공작 가문의 저택 입구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지 않겠냐?”

    “...첩자셨군요.”

    “맞아.”

    두 가문의 전쟁에 휘말린 여행객으로 위장한 그의 정체에 살짝 충격받았다.

    ‘믿을 인간이 없네!’

    놀라긴커녕 예상했다는 표정인 여인의 태도가 충격을 더했다.

    내가 순진한 걸까?

    어쩌면 일행 중에 정체를 숨긴 자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헤어진 두 사람도 포함해서.

    “멈추십시오.”

    “신분을 밝히십시오.”

    척! 척!

    저택의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절도 있는 자세로 막아섰다.

    “치맥 백작님의 세 번째 여식인 안밀리나 영애가 소맥 공작님께 보내는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증표로 아가씨의 인장을 가져왔습니다.”

    소개를 마치고 품에서 반지를 꺼내서 보여주는 여인.

    그 반지에는 치맥 백작가를 상징하는 닭이 양각되어 있었다.

    바로 이어서,

    “공작님께서 주문하신 물건을 가져온 상인입니다.”

    대장이 또 거짓말했다.

    “어떤 물건이지?”

    “맥주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맥주가 아닙니다.”

    “독을 탄 건가?”

    “독보다 자극적인 술을 조금 섞었습니다.”

    “얼마나 섞었지?”

    “한 방에 취할 만큼.”

    나는 경비병과 대장의 대화가 연극처럼 탁탁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척!

    “영웅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하오.”

    존경심을 담아서 경례하는 경비병에게 대장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다음 차례!

    “......”

    “......”

    두 경비병이 내게 정체를 밝히라는 시선을 보냈다.

    “...강문수라고 합니다. 제 신분은 두 분이 보증해주실 겁니다.”

    나는 여인을 돌아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미안해요. 아가씨와 가문의 운명이 걸린 매우 중요한 자리라서 함께할 수 없어요.”

    “......”

    일이 너무 잘 풀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지막에 배신당할 줄은 몰랐다.

    “하하! 치맥 백작가는 키우는 개까지 하는 짓이 똑같군!”

    “뭐, 뭣...!”

    우리 사이에 끼어든 대장의 험담에 여인이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한 약속은 아니지만, 깡문쑤는 내 생명의 은인이오. 동행을 허락해줬으면 좋겠군.”

    “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신의 권한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경비병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익-

    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감사합니다, 대장!”

    “고마우면 소맥 공작님을 위해 그 힘을 써달라고.”

    “생각해볼게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찾아왔습니다.

    ‘이제 시작인가?’

    나는 킹메이커(King-Maker)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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