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43화 (44/232)
  • 043화

    유전병을 몰랐던 중세의 귀족 사회에서는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다.

    같은 조부(祖父)를 둔 소맥 공작과 치맥 백작도 이 같은 목적으로 태중 혼약을 맺었는데...

    주인공에게 초콜릿과 커피를 먹이기 위해 풍토(風土)와 역사를 무시한 소설 작가가 이런 세밀한 고증을 알 리 없지만, 어쨌든 주인공과 약혼자는 근친이었다.

    “멀긴 머네!”

    여자애에게는 걸어갈 것처럼 등을 돌리며 멋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광역시에서 다른 광역시까지 무식하게 걸어가는 건 매우 무모했다.

    흉악한 산적을 만날 수도 있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며, 숙식을 해결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래서 돈을 쓰기로 했다.

    ‘여기쯤인데... 옳지!’

    초원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의 뿌리 밑을 부지런히 팠다.

    슥슥-

    그곳에 숨겨진 것은?

    전쟁터로 끌려가기 전에 훗날을 기약하며 몰래 묻어둔 돈주머니!

    누군가가 훔쳐 갔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계획의 첫 단추는 무사히 끼워졌다.

    짤랑♪

    “후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질 않는다니까!”

    주머니 안에서 동전끼리 부딪치며 나는 청량한 소리.

    그것을 들키지 않게 전투복 안에 고이 넣은 후, 치맥 백작의 성으로 향했다.

    ‘옷부터.’

    이런 거지꼴로 돌아다니면 시선을 끌기 때문에 옷부터 구매해서 빠르게 갈아입고...

    그 뒤에 여관을 겸하는 식당으로 가서 손님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내가 원하는 정보를 수집했다.

    “평화적으로 끝나서 다행이야.”

    “왕자님이 직접 오셔서 전쟁을 중재하셨다는군.”

    “하지만 이걸로 두 가문의 동맹은 완전히 깨졌지?”

    “맞아. 영애를 노리는 왕자님이 크게 한 건 하셨구먼!”

    “자! 치맥 백작님과 아름다운 영애를 위해 건배!”

    “건배~!”

    두 가문의 전쟁은 서혜주 과장님의 예상대로 무승부.

    하지만 왕자라는 변수가 끼어드는 바람에 두 가문이 완전히 갈라서는 찜찜한 형태로 끝나고 말았다.

    ‘이건 뜻밖인걸.’

    왕자가 주인공의 약혼자를 치워버리기 위해 몸소 행차할 줄이야!

    하지만 단순히 여자 하나 때문에 한 행동은 아니다. 왕권을 위협할 만큼 성장한 소맥 공작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함이리라.

    “다시 봤네.”

    원작 소설에서는 온종일 주인공만 생각하는 머저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의 왕자는 철저하게 국익을 생각하며 계산적으로 움직이고 있네?

    내 착각이라고 보기에는 왕자의 판단이 소름돋았다.

    그 이유는,

    “하지만 너무하는군. 중재의 대가로 첩실을 강요하다니!”

    첩실(妾室).

    수많은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은 주인공에게 일부일처(一夫一妻)나 정실(正室)도 아니고, 완전히 상반되는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왕자의 망언으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호위기사랑 그런 일이 있었으니...”

    “너는 그 말을 믿어? 영애가 호위기사랑 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그냥 날 리 없지.”

    원작 소설도 주인공 주위에 남자가 늘어날수록 이상해졌다.

    모든 남자가 머리를 비우고 맹목적으로 주인공을 사랑하는 광신도로 변했으니까.

    하지만 환자가 빙의한 가짜 주인공에게는 진짜만큼의 매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러면 2권 완결인가?’

    아름다운 주인공이 약혼자에게 차이고 왕자의 치밀한 계략에 걸려서 첩이 되는 소설!

    아무도 안 읽을 것 같다.

    “왕자가 변수로 부상할 줄은 몰랐는데...”

    원작 소설이랑 괴리감이 심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은가?’

    왕국의 수많은 영애가 상사병을 앓을 정도로 왕자가 잘생기고 똑똑한 인물이란 서술이 있었다.

    고작 한 줄이긴 했지만, 설정 붕괴는 아니란 소리.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실례합니다.”

    환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예정대로 행동할 뿐이다.

    “나를 불렀나?”

    친구들이랑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네. 소맥 공작령에 가신다고 한 것 같아서요.”

    “맞네. 왜? 소맥 공작령으로 보낼 물건이라도 있나?”

    “동행하고 싶습니다.”

    이 세계에는 택시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뭉치거나 용병에게 돈을 주고 호위를 의뢰하는데...

    “다른 일행은?”

    “저 혼자입니다.”

    “흠. 싸울 줄 아나?”

    치안이 완벽하지 않은 험난한 세계인 만큼 힘을 찾는 곳이 많다.

    “조금 배웠습니다. 최근에 전쟁도 경험했고.”

    “오! 알고 보니 함께 싸운 동료였군! 든든한걸?”

    “별거 아닙니다.”

    “안 죽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우리처럼 강제로 끌려간 외지인들은 정말 많이 죽었으니까.”

    “...그랬죠.”

    ‘그랬었다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귀족이 아닌 같은 평민 사이에 그런 차별이 있었을 줄이야!

    영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제멋대로 희생시킨 모양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외국인들을 자국의 전쟁에 이용한 거나 다름없는 만행이었다.

    “이 전쟁에서 나는 소중한 아들을 잃었지.”

    “아...”

    “올해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줄 목적이었는데, 그 세상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부모보다 먼저 떠나버렸어.”

    “......”

    자식을 잃은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제법 시간이 흘러서 마음을 추스른 모양이지만, 나까지 괜히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 전쟁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기에.

    “자네는?”

    “죽기 전에 바다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과연... 소맥 공작령의 항구도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이름은?”

    “강문수입니다.”

    “깡문쑤? 특이한 이름이군. 우리도 사실은 소맥 공작령까지 동행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네. 하지만 두 가문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모으기가 쉽지 않아서 곤란했는데... 잘 부탁하네.”

    “짐이 안 되도록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출발하는 날짜를 약속한 뒤에 헤어졌다. 인원이 많을수록 안전하기에 며칠 더 모집하려는 의도.

    그리고 생필품은 각자 알아서 준비였다.

    옷, 식량, 침낭, 무기...

    가장 먼저 대장간으로 향했다.

    “뭐가 필요한가?”

    “제가 쓸 창이요. 길이는 제 키보다 조금 작은 정도....”

    “용도는?”

    “호신용입니다.”

    “그러면 가벼운 편이 좋겠군. 그 대신에 가격이 좀...”

    “괜찮습니다.”

    목숨과 맞바꾼 실전으로 단련된 창술(槍術)을 보여주겠다.

    * * *

    소맥 공작령까지 함께할 일행은 남자 11명, 여자 2명, 아이 1명으로 구성됐다.

    ...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아내와 젖먹이를 책임지는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빠란 소개에 말문이 탁 막혔다.

    ‘16살에? 와...’

    나보다 4살이나 어린 녀석이 먼저 어른이 됐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달그락달그락.

    짐과 일행을 실은 마차 2대를 두 여인이 나눠서 몰았다.

    그동안 남자들은 마차의 짐칸에서 체력을 보존하며 산적이나 늑대 무리의 습격에 대비...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역할 분담을 했다.

    “당분간 잘 부탁해요.”

    “무사히 도착하길 기도합시다.”

    “도착하면 술 한 잔 하죠.”

    일행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했다.

    특히,

    “신혼이면 아직 모르지.”

    “아내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

    “아직 좋을 때로구먼~”

    “둘이 어떻게 만났는가?”

    일행 내에서 가장 어린 16살 신랑은 마차 여행이 심심한 짓궂은 어른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으으...”

    대답하기 곤란한 부끄러운 질문에 귀가 새빨개진 소년의 반응에 다들 껄껄거리며 웃기 바빴다.

    그러다가,

    “깡문쑤. 자네는 20살이 될 동안 뭘 했나?”

    “저야 뭐... 열심히 살았죠.”

    두 번째로 어린 나에게 배턴이 넘어왔다.

    ‘뭘 했냐니...’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이런 핀잔을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피부만 보면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인데...

    “멀쩡하게 생긴 친구가 잘도 참고 살았군.”

    “그래도 연애는 해봤겠지?”

    “연애는 해봤죠.”

    내 머릿속에 송선영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예쁜가?”

    “네. 정말 예쁩니다.”

    “호오? 얼마나?”

    “흠... 치맥 백작가의 안질리나 영애보다 예쁩니다.”

    “허허! 이 친구, 허풍이 심하네.”

    “그러게 말이야. 왕국의 보석보다 아름답다니.”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영애를 본 적 있나?”

    “네. 우연히 동행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덕분에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가까이서 본 적 있습니다.”

    “소문처럼 미인이던가?”

    “예쁘긴 하더군요.”

    하지만 원작 소설의 묘사처럼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미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의 취향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무리겠지.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소설의 주인공답네.’라는 감상평을 내놓을 미모는 됐다.

    그나저나...

    ‘다들 참 느긋하네.’

    내가 그동안 현대의 바쁜 도시에서 살아온 탓일까?

    온종일 마차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한 채 한가롭게 보내는 이 시간이 고문처럼 지루했다.

    그때,

    “헛?!”

    무언가를 발견한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히이잉~?!”

    “무슨 일이야?!”

    다급히 멈춘 말도 놀랐고, 관성으로 몸이 쏠린 마차 짐칸에 탄 남자들도 놀랐다.

    부스럭.

    도로의 좌우 수풀에서 거만하게 걸어 나오는 일련의 사내들.

    흉흉한 무기를 쥔 그들의 표정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냥은 못 지나가지.”

    “너희는 포위됐어.”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놔.”

    “통행료를 낸다면 보내주마.”

    무시하고 강행 돌파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밧줄을 말의 발목 높이까지 팽팽하게 당겨서 앞길을 가로막은 탓에 힘들었다.

    “산적이군.”

    “하나, 둘, 셋...”

    “숨어있는 놈들이 더 있을 거야.”

    “어떻게 할까?”

    “일단은 협상을 시도해봅시다.”

    “무기를 절대 놓지 마.”

    빠르게 결정한 우리는 산적들이 요구하는 통행료의 액수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세계의 물가를 아직 잘 모르는 나조차도,

    ‘억지야.’

    과하다고 느낄 정도의 액수였다.

    “없으면 못 지나가.”

    “아! 포기해도 통행료를 약간 받을 거야.”

    “이건 우리를 기다리게 한 수고비란 거지!”

    “안 주면 후회할걸?”

    빈손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산적 무리가 우리에게 결정을 재촉하며 위협해오기 시작했다.

    “......”

    “......”

    우리는 진지하게 눈빛을 교환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때,

    “통행료를 낼게요.”

    “어?”

    “뭐?”

    뒤따라오는 두 번째 마차를 몰던 여인의 발언에 모두가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사교성도 없고 외모도 평범한 탓에 그 누구도 동행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던 여인이었는데...

    산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도 겁먹지 않고 침착하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께 폐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통행료를 나눠서 내지 않고 혼자 감당하겠다는 의미.

    나도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밖에 없었다.

    “뭐지?”

    “돈이 있어?”

    “혼자서?”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한 산적들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새롭게 제안하길,

    “저 여자를 순순히 내놓으면 나머지는 보내주마!”

    하지만 약속을 번복하는 놈들을 믿을 만큼 우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굳이 눈빛을 교환하며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공격...!”

    “와아아아!”

    각자의 무기로 무장한 우리는 산적 무리를 향해 돌격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푹!

    내가 휘두르고 찌르는 창에 산적들이 손쉽게 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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