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42화 (43/232)
  • 042화

    [3장-3절] 주인공이 맞았다고?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는 지구인 여성이 외계행성의 백작 가문 여식이 되면서 시작한다.

    고귀한 신분.

    아름다운 외모.

    막대한 재산.

    남들이 부러워할 모든 요소를 갖춘 완벽한 주인공이었다.

    ‘이미 끝난 것 아닌가?’

    굳이 소설을 더 읽어보지 않아도 멋진 총각들이 앞다투어 줄을 설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을 깨는 반전 없이 그대로 흘러갔다.

    “과장님. 이게 재미있나요?”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네.”

    서혜주 과장님의 완벽한 반론에 바로 백기를 들었다.

    아무튼,

    “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가 정말 많네요. 호위기사, 자국 왕자, 외국 왕자, 젊은 황제, 유명한 용병, 소꿉친구, 똑똑한 시종...”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잘생긴 남자는 전부 엮인 것 같았다.

    주인공이랑 눈만 마주쳐도 사랑에 빠지는 수준!

    “그러니 소설이죠.”

    “아하!”

    아무리 그래도 초강대국 황제가 점찍은 여자의 주변을 여러 남자가 맴돌며 사랑을 갈구하는 모양새는 무리수가 아닐까? 암살당하고 싶은 자살지망생이 아니고서야...

    그밖에도 개연성이 안 맞는 이상한 부분이 많았지만, 인기작이라고 하니 할 말 없다!

    “강문수 씨. 어떤가요?”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어요. 결말도 시원찮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혼할 남자를 고르지 못하고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버린 무책임한 결말.

    고르는 순간, 다른 남자들이 분노로 날뛰거나 상실감에 자살할 것처럼 짜둔 탓에 작가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리라.

    그나저나...

    “감독님이 안 보이네요. 과장님. 혹시 아세요?”

    “......”

    “과장님?”

    “그분은 현재 귀국해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어요.”

    “켁! 왜요?”

    갑자기 경찰이라니?

    “감독은 선수를 보호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강문수 씨가 쓰러졌을 때, 옆에 없었죠.”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에 도박장에 있었데요. 그에게 돈을 받았다는 아가씨의 진술도 있고. 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알겠죠?”

    “......”

    너무나 현실적인(?) 현실에 말문이 탁 막혔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저에게 문제가 생겨서 들킨 거잖아요.”

    “애초에 하질 말았어야죠. 유흥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통편도 싸구려로 잡았더군요.”

    “아...”

    거의 가축 취급이었던 여객선은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목적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배신감에 몸서리쳤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나요?”

    “...네. 그러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며칠 잠든 사이에 나를 이끌어주던 감독을 잃고 말았다.

    ‘이게 말이 돼?’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꿈에 사로잡힌 송선영과 최강민을 설득했듯이.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이 기회에 저랑 동업하는 게 어때요?”

    “바보가 된다면서요.”

    뇌세포가 파괴된다고 겁을 준 후에 제안하는 건 무슨 심보일까?

    아차, 싶었던 서혜주 과장님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강문수 씨는 회복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서 괜찮을 겁니다.”

    “제 눈을 보고 말씀해주세요.”

    “아! 배고프지 않나요? 깨어나자마자 책만 들여다봤잖아요.”

    “...배고프죠.”

    따지길 포기한 나는 홀쭉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참 신기하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을 곧바로 읽었다.

    원래는 앞부분만 조금 훑어보고 쉴 생각이었는데...

    “소설은 재미 있었나요?”

    “아뇨. 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행동이 현실성 없어서 몰입감이 떨어졌어요.”

    강조하고 또 강조한 아름다운 외모 빼면 장점을 찾아볼 수 없는 여자에게 영혼까지 바칠 기세!

    그런 한심한 태도로 어떻게 영지와 나라를 다스리고, 존경받는 인물이란 건지 의문이었다.

    “비판하는 것치고는 집중해서 잘만 읽던데요?”

    “......”

    서혜주 과장님의 핀잔에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도중에 끊지 못하고 5권을 전부 읽고 말았다.

    ‘완전히 낚였지!’

    복잡한 남자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고 누구랑 결혼할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는데, 열린 결말로 무책임하게 마무리했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강문수 씨. 밖으로 나가죠. 제가 살게요.”

    “감독님이 호텔 밖은 위험하다고 했는데...”

    “위험하죠.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호텔 주변은 경비원과 경찰들이 관광객을 보호해서 치안이 괜찮은 편이에요.”

    “아하!”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서혜주 과장님이 앞장섰다.

    “따라와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이 미래에서 가져온 화학식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문가가 아닌 나로선 그 가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바뀔 거예요. P의 적성검사기가 그랬듯이.”

    “그렇게까지?”

    그녀가 말한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 * *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신세 졌던 감독님이 나를 속였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업보인가.’

    송선영의 꿈을 통해, 그분이 수영선수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적성이 달라도 실력만 있으면 무조건 뽑으리란 계산!

    하지만 세상은 내 계획대로 움직여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감독님: 미안하다.」

    내 스마트폰에는 매우 짧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곧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받지 않으셨다.

    뚝.

    “하아...”

    “아직도 감독이 신경 쓰이나요?”

    “당연하죠.”

    “흐음~ 강문수 씨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편이군요.”

    “칭찬인가요?”

    “반반입니다.”

    “킁.”

    하지만 언제까지고 끙끙거릴 수많은 없었다.

    이국적인 요리로 배를 채우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무슨 연구?

    “꿈의 시간대는 태중 혼약을 맺은 공작 가문이랑 갈등이 생기는 2권 후반부 같아요.”

    “이상하네요. 환자가 4권까지 읽고 주인공이랑 똑같이 행동했다면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호위기사랑 입맞춤하는 모습을 약혼자에게 들키면서 전쟁으로 격화된 것 같아요.”

    “그런 내용은 소설에 없죠.”

    소설 원작에서는 마음을 정리하고 떠나려는 호위기사를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이 눈물로 붙잡는다.

    하지만 입맞춤하진 않았고, 약혼자에게 들키지도 않았는데...

    ‘알맹이가 달라서 그런가?’

    원작의 주인공은 위기 때마다 새로운 미남이 등장해서 도와줄 만큼 운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외모만 똑같은 환자에게는 행운이 따르질 않았다.

    “이건 제 추측이지만, 환자가 주인공의 대사와 행동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한 것 아닐까요?”

    “그런 것 같네요. 소설 원작 주인공은 남자 문제에 소극적인 편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영악하죠.”

    우리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를 심층분석 했다.

    창조자인 작가 이상으로 작품의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빙의한 환자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그런데 과장님. 이런 분석이 의미 있을까요? 원작에 없는 전쟁이 터지면서 꼬였는데.”

    “있어요. 제가 환자라면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겁니다.”

    “왜요?”

    “이 소설의 애독자라면 약혼자를 절대 포기할 리 없어요. 다른 여자가 가져가게 양보한다고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죠!”

    서혜주 과장님이 단호한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애독자셨네요.”

    “완결 빼고 만족했습니다. 저는 남자들을 전부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대륙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아, 네.”

    열린 결말보다는 깔끔했지만, 찬동하기는 힘들었다.

    “전쟁에서 누가 이기느냐가 관건이겠네요.”

    “예상할 수 있겠어요?”

    “...전력이 엇비슷했던 것 같아서 모르겠네요.”

    “그러면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귀족의 체면을 세우는 선에서 휴전했겠네요.”

    “시늉...?”

    많은 사람이 덧없이 죽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이 귀족의 체면을 세우는 용도라고?

    서혜주 과장님이 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로 설명했다.

    “견고한 석벽을 부술 수 있는 대포가 발달하기 전까지 중세의 성은 함락시키기가 매우 힘들었어요. 최소 10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게 왜요?”

    “두 영지의 병력이 엇비슷하면 이겨도 성까지 빼앗진 못해요. 전쟁터에서 영주와 후계자를 생포한다면 또 모르지만.”

    “아!”

    “그리고 이기더라도 피해가 막심하면 이웃들이 문제죠. 성을 쉽게 빼앗을 절호의 기회를 보고만 있을까요? 힘없는 자의 평화조약은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어요.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그렇겠네요.”

    “우리는 무승부를 가정하고 미래를 설계하면 됩니다.”

    “...바로 시작하죠.”

    아무것도 모른 채 허둥대다가 어이없게 죽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 뇌세포는 소중하니까!

    소설 전개를 대충 아는 환자의 기억력이 변수였지만, 그것까지 고려한 확실한 전략을 짰다.

    하루, 이틀...

    소설의 세계를 지도로 그려서 구현해보고, 등장인물의 설정과 관계 등을 암기하며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 다시 가보죠!”

    “자신 있어요?”

    “이만큼 준비하고도 실패하면 깔끔히 포기하자고 생각할 만큼요.”

    “멋진 각오네요.”

    “과장님. 나중에 봐요. 새 감독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고.”

    “잘 설명할게요. 아! 맞다!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만나면 슬쩍 알려주세요.”

    “제국을 쓰러트리고 대륙을 통일하는 방법이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부탁해요.”

    “그건 좀... 고민해볼게요.”

    나는 소설에 사로잡힌 환자를 만나러 다시 떠났다!

    * * *

    두 번째 시작 위치는 내가 죽었던 황무지 한복판이었다.

    복장은...

    “거지가 따로 없네.”

    잠깐이긴 해도 내가 병사로 복역하며 입었던 복장이었다.

    비무장의 알몸이나 다름없었던 노예병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가죽옷 위에 치맥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얇은 겉옷 차림.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내 시체를 밟아댄 거야?’

    여기저기 찢어진 전투복은 발자국과 핏자국으로 도배되어 멀쩡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옷만큼이나 엉망인 전쟁터에는 병사 대신 여자와 아이들이 보물을 찾듯 땅을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꼬마 아가씨.”

    “네!”

    키가 내 허리쯤 되는 여자아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뭘 찾고 있니?”

    “시체요!”

    “......”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문화충격에서 빠르게 벗어난 나는 이어서 질문했다.

    “시체는 왜 찾니?”

    “반지를 팔면 엄마와 아빠가 굶지 않아요.”

    “...그렇구나. 착하네.”

    아이의 엉뚱한 대답을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빠는 여기서 뭐해요?”

    “나는...”

    “비밀이에요?”

    나는 성미가 급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나쁜 언니를 혼내주러 왔어.”

    “어디에 사는데요?”

    “저쪽에.”

    나는 치맥 백작의 저택이 있는 도시를 가리켰다.

    “그런데 왜 반대 방향으로 가요?”

    “준비가 필요하거든.”

    “무슨 준비요?”

    “비밀.”

    나는 입술이 삐죽 나온 아이랑 작별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주인공의 약혼자가 있는 소맥 공작의 영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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