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41화 (42/232)
  • 041화

    환자가 좋아하는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전형적인 봉건시대였다.

    왕, 귀족, 기사, 평민, 노예.

    봉건제는 크게 다섯 계급으로 나뉘며, 혈통으로 결정된 신분은 개개인의 일평생을 결정한다.

    ‘여기도 그럴지는 모르지만.’

    내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세계의 봉건제도는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를 쓴 작가가 설정을 어떻게 짰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테니까.

    “이 돈을 받으십시오.”

    소설의 주인공인 백작가의 막내딸을 에스코트하고 돌아온 잘생긴 기사가 내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이건 왜...?”

    “부담 갖지 마십시오. 저희의 문제에 휩쓸린 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이것이 치맥 백작 가문의 의지입니다.”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짤랑♪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은 평민들에게 보호의 대가로 세금을 걷고, 그 세금으로 기사와 군대를 양성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전쟁도 치른다.

    하지만 보호는 뒷전으로 미루고 세금만 잔뜩 걷다가 망한 귀족이 역사적으로 숱하게 많은데...

    ‘참된 귀족이군!’

    그걸 고려하면, 치맥 백작은 평균 이상의 훌륭한 귀족이 틀림없다. 소설 설정이든 아니든 간에.

    “시작은 좋은데...”

    영문도 모른 채 화살에 맞고 죽을 뻔했지만, 이 세계의 옷을 입고 생활비도 구했다.

    이 정도면 남는 장사가 아닐까?

    이젠 소설을 현실로 착각한 환자를 찾기만 하면 된다.

    꼬르륵.

    “...뭐라도 먹을까나.”

    찾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공복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짤랑♪

    듣기만 해도 배부르고 마음이 치료되는 것 같은 돈주머니 소리!

    ‘조심해야지.’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소매치기를 주의하면서 복잡한 거리로 나갔다.

    “사과 팝니다!”

    “식사하고 가세요!”

    “옷 구경하세요!”

    카드 계산이 안 된다는 점만 빼면 현대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달콤한 초콜릿~!”

    “커피 한 잔 어떠세요?”

    “럼주도 있습니다!”

    배경은 기사 계급이 몰락하지 않은 14세기 전인데, 의식주 수준은 16세기 후반이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커피와 초콜릿이 18세기에 대중화된 점을 고려하면 더욱 말이 안 됐다.

    ‘소설이니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만, 세계사를 배운 문화시민으로서는 은근히 거슬리는 설정이었다.

    아무튼,

    “밥이나 먹자.”

    이 근방에서 가장 저렴해 보이는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흠... 요거 주세요.”

    “네~”

    자살하면 이 세계에서 바로 빠져나갈 수 있지만, 이왕 들어온 김에 환자를 만나서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부모님이 슬퍼하고 고생 중이라고!

    ‘내 몸은 괜찮겠지?’

    호텔에서 쓰러진 내 몸뚱이는 감독님이 잘 지켜주리라 믿고, 지금은 잘 먹고 잘 자는 게 중요하다.

    떨어진 체력을 보충해야 이 세계의 어딘가에 있을 환자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주문한 감자 요리를 기다리면서 다른 손님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봐. 치맥 백작님의 막내딸을 본 적 있어?”

    “우연히 봤지. 소문처럼 엄청난 미인이더군!”

    “그래? 나도 보고 싶은걸!”

    “제국의 젊은 황제가 청혼했다고 하던데...”

    “이 친구가 소식이 늦네. 거절해서 난리가 났는데.”

    “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열에 다섯은 치맥 백작가의 막내딸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기 때문일까?

    최강민의 꿈속에서 모두가 ‘마법소년’에 열광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선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좀 비정상적인걸.’

    마법소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웅이기라도 했다.

    반면, 백작가의 막내딸은 수많은 귀족 중 누군가가 낳은 수많은 자식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미모가 아무리 출중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관심과 사랑을 줄 인물은 절대 아니란 의미.

    “음식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주문한 감자 요리를 맛봤다.

    ‘오! 생각보다 맛있는데?’

    배만 채울 목적이었던 나로선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셈.

    껍질 안쪽을 촉촉하게 잘 삶은 감자와 고소한 마요네즈 소스, 따뜻한 버섯 수프와 빵...

    콜라가 살짝 아쉬웠지만, 이 시대에 탄산음료를 바라는 것은 사치를 넘어서 설정 파괴이리라.

    손님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한밤중에 호위기사를 침실로 불렀다는 소문이...”

    “쉿! 죽고 싶어? 여기는 치맥 백작님의 영지야!”

    “왕자님을 사랑해서 황제의 청혼을 거절한 거 아니었어?”

    “허허! 전부 헛소문이야. 이웃하는 공작가의 장남이랑 태중 혼약을 했다는 걸 있었나?”

    “하긴. 약속을 함부로 깨면 전쟁이 날 수도 있지.”

    나는 조용히 엿들은 정보들을 종합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욕심이 정말 많은 여자네.’

    청혼해온 남자들이 전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지만, 영지와 백성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귀족이 취할 태도는 아니었다.

    “뭐... 작가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이 소설 세계의 어딘가에 있을 환자만 생각하기로 했다.

    * * *

    내 손재주가 좋았다면 몽타주라도 그렸을 테지만, 검은색 모발과 눈동자란 특징만으로 이름도 모르는 여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눈앞에 있으면 알아볼 순 있기 때문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응. 이건 무리.”

    돈을 받고 사람을 찾아주는 곳도 가봤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어렵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고.

    치맥 백작가에서 받은 돈이 아직 절반쯤 남았지만, 더 찾아봐야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건 절대 아니다.

    ‘8일 동안 놀지 않고 온종일 찾아다녔으면 충분하지!’

    비싼 아이스크림과 탄산음료를 얻어먹은 값은 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무기를 들어라!”

    “치맥 백작가를 위해!”

    “치맥! 치맥! 치맥!”

    이웃하는 공작 가문이랑 끝끝내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느긋하게 사람을 찾고 있을 수 없었다.

    원인은 치맥 백작가의 막내딸이 태중 혼약을 무시하고 다른 남자랑 입맞춤하는 모습을 공작가의 약혼자가 목격한 탓!

    현장에서 바로 사과했으면 조용히 끝났을 문제인데, 막내딸이 뻔뻔하게 나와서 일이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공작가를 쳐부수자!”

    “치맥 백작님께 영광을!”

    “아름다운 영애를 지키자!”

    “치맥! 치맥! 치맥!”

    객관적으로 잘못은 치맥 백작가의 막내딸이 했고, 전쟁의 명분도 그녀가 제공했다.

    그런데 욕이란 욕은 공작가에서 전부 먹는 아이러니한 상황!

    광신도가 따로 없었다.

    “거기! 창을 똑바로 들어!”

    “네!”

    그리고 나는 젊고 건강한 남성이란 이유만으로 강제징집되어 억지로 참전(參戰)하게 됐다.

    현재는 도시 앞에 세워진 임시막사에서 훈련받는 중.

    두 가문의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면 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나로선 협상이 잘 풀리기만을 바랄 뿐인데...

    “너, 체력이 상당히 좋군.”

    “감사합니다!”

    남들이 지칠 때 같이 휴식을 취했으면 눈에 띄지 않았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앞서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뜩,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환자를 찾아야 할 시간에 동족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으니까.

    내 체력을 눈여겨본 장교가 부하에게 지시했다.

    “오늘부터 이 자를 정찰조에 합류시키도록.”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내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지시였지만, 항의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잠자코 따랐다.

    바로 그때,

    댕! 댕! 댕...!

    망루에 설치된 전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협상이 결렬됐다!”

    “무기를 들어라!”

    “치맥 백작가를 위해!”

    철컥, 철컹...

    병영에 있던 모두가 무기를 들고 약속된 공터로 이동했다.

    “히이잉~!”

    말을 탄 기사가 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치맥을 위하여!”

    “와아아아!”

    “치맥! 치맥! 치맥!”

    “출발...!”

    그들의 광기에 휘말린 나도 전쟁터로 이동했다.

    ‘실화냐...’

    무력시위만 하다가 협상하고 흐지부지 끝날 줄 알았거늘!

    그리고 죽었다.

    * * *

    “으아아악!”

    의식이 돌아온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툭, 툭, 툭...!

    몸에 붙어 있던 의료기기들이 떨어지면서 따끔했지만, 그걸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허억, 허억...”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듯한 기세로 미친 듯이 뛰었다.

    ‘다들 미쳤어...!’

    날붙이에 찔리고 베이는 물리적인 고통은 견딜 만했지만, 정신적인 타격이 상당했던 탓이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목숨을 잃거나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게 되는 순간까지 사람을 죽이는 짓을 반복한다.

    그것이 전쟁.

    시신을 밟고 지나가는 만행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이었다.

    ‘여기는….’

    수면등의 은은한 노란색 불빛에 물든 이곳은 내가 쓰던 호텔 객실이 아니었다.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내부가 훨씬 넓고 소파와 장식장 같은 여러 가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의료기기.

    매우 낯이 익었다.

    “깨어났군요.”

    “과장님?”

    비단으로 된 고급스러운 잠옷 차림의 서혜주 과장님이 다른 방에서 걸어왔다.

    그녀는 인사 대신 내 팔을 쳐다보며 질문했다.

    “안 아픈가요?”

    “...그럴 정신도 없었네요.”

    주삿바늘이 꺾인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리세요.”

    “......”

    어째서 서혜주 과장님이 여기에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다 됐어요. 이젠 움직이기 편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과장님이 여긴 어떻게...”

    “당신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연락했는데, 수영 감독이란 사람이 받더군요.”

    “아하!”

    내가 온종일 안 깨어난다는 소식을 접한 서혜주 과장님은 곧바로 짐을 챙겨서 비행기를 탔다고...

    그녀는 의료기기를 살펴보더니,

    “또 죽었나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깨어나기 전에 심장이 17분 동안 멈췄다는 기록이 있네요.”

    “아하!”

    “강문수 씨. 대수롭지 않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산소공급이 멈추면 뇌세포가 매우 빠른 속도로 파괴되니까요. 금붕어 수준의 바보가 되고 싶나요?”

    “아뇨.”

    그건 무조건 사양하고 싶다!

    “어쩌다가 죽었죠?”

    “강제징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서 하루도 못 버티고 죽었어요.”

    적군의 화살을 소모하는 용도로 희생된 노예병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전쟁까지? 당신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는군요.”

    “좋은 경험은 아닙니다. 평생 모르는 편이 나아요.”

    “그래도 궁금하군요. 어떤 꿈이었는지 듣고 싶어요.”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는 손녀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서혜주 과장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꿈이 아니었어요.”

    “응?”

    “소설의 세계였습니다. 자폐증 아가씨가 들고 있던 소설책.”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

    “네. 그거요.”

    내가 긍정하자 서혜주 과장님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소설이 꿈으로 반영됐다라... 신비한 현상이네요. 아! 저도 심심해서 그 소설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가요.”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충 웃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뭐가요?”

    “그 소설에서는 전쟁이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거든요.”

    “...정말로요?”

    “네. 이건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이니까요. 그래서 독자층의 과반수가 여성인데, 여성들이 좋아하지 않는 전쟁을 굳이 소설에 넣진 않죠.”

    “자, 잠깐만요. 전쟁이 전혀 없었다고요? 한 줄 서술도?”

    “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만 해요. 전쟁으로 확장될 뻔한 사건은 있지만, 주인공의 재치로 평화롭게 해결되죠.”

    “허!”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전쟁이 원래 없다고?’

    소설에서 작가가 짠 전개를 무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혹시, 주인공이 탄 마차가 습격당하는 사건도 있나요?”

    “음... 제 기억으로는 없네요. 이 소설은 폭력적인 내용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역시...”

    “무슨 일인데요?”

    “저는 주인공의 재치 때문에 벌어진 전쟁에 휘말렸거든요.”

    “음?”

    “이제야 알겠네요. 어째서 환자를 찾을 수 없었는지를.”

    세계가 넓어서 못 찾았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바로 앞에 있었을 줄이야!’

    내가 소설의 주요 무대인 치맥 백작가의 영지에서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강문수 씨.”

    “네.”

    “설마, 주인공이 환자인 줄 몰랐던 건가요?”

    “어?!”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요. 로맨스 소설의 독자들은 아름다운 주인공이 된 자신을 상상하며 대리만족을 느껴요. 그런데 굳이 예쁘지도 않은 조연을 고를까요?”

    “......”

    듣고 보니 그렇네?

    “강문수 씨. 뇌세포의 숫자를 측정해볼까요?”

    “사양할게요.”

    불편한 진실은 모르는 편이 낫다.

    “또 들어갈 건가요?”

    “당연히.”

    이대로 포기하면 억울하니까. 하지만 그냥은 안 들어간다.

    “빌려줄까요?”

    “긴가요?”

    “연재로는 5권 분량입니다. 긴 휴재 끝에 최근에 완결됐죠.”

    “오래 안 걸리겠네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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