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40화 (41/232)
  • 040화

    [3장-2절] 주인공이 아니라고?

    습관처럼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소지품부터 확인했다.

    ‘이런...’

    복장은 그대로인데, 현대인의 필수품인 스마트폰이 없었다.

    열대과일 주스를 마신 탁자 위에 올려놓은 상태로 잠든 걸까?

    “흠. 딱히 상관없나.”

    통화와 인터넷이 안 되면 갖고 있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더라도 현실로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터벅터벅.

    일단, 풀밖에 없는 초원 위에 계속 있을 순 없기에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무작정 걸어갔다.

    ‘언어가 통하려나...?’

    사람을 만나보기도 전에 걱정부터 앞섰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혀 다른 세계니까.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풀밭 사이로 심심찮게 보이는 저 둥글둥글한 괴생명체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랑?”

    찐빵 같은 모양의 반투명한 분홍색 젤리가 말랑거렸다.

    “넌 이름이 뭐냐?”

    “말랑!”

    “...미안. 바보 같은 질문이었네.”

    “말랑말랑~”

    입이 없는 생명체가 대답한다면 그거야말로 엽기 아닐까? 애초에 귀도 없었기 때문에 내 말을 정말로 알아들었는지도 의문이고.

    “......”

    “말랑.”

    “...뭐해?”

    “말랑?”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생명체가 졸졸 따라오는 게 신경 쓰였다.

    “거참.”

    하염없이 걷기 심심했던 나는 그 생명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자마자 손이 녹아버리거나 삼켜지는 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했지만, 죽으면 여기서 빠져나갈 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말랑~”

    “오! 진짜 말랑한데?”

    온종일 만지작거려서 질리지 않을 감촉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외계생명체를 품에 안은 채 계속-

    팟!

    그건 순전히 운이었다.

    주르륵...

    고막을 찢는 소리가 지나간 직후에 오른쪽 귀에서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살!’

    무슨 상황인지 살피거나 생각할 틈이 없었다.

    머리를 꿰뚫릴 뻔했으니까!

    최대한 상체를 숙이고 달렸다.

    “헙?!”

    포물선을 그리면서 다발로 떨어지는 화살들.

    소나기처럼 머리 위로 떨어지는 저것들을 전부 피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말랑?!”

    “미안해!”

    품에 안고 있던 외계생명체를 번쩍 들어서 머리를 보호했다.

    푹! 푹! 푹!

    어깨와 등이 뜨거워지면서 고통이 몰려왔지만,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안 좋아.’

    이대로 계속 도망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당할 터.

    하지만 변변찮은 무기조차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말랑말랑!”

    “...부탁한다!”

    “말랑?!”

    화살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 중이던 외계생명체를 수직으로 하늘 높이 던졌다.

    팟! 팟! 팟!

    여기에 반응한 습격자들의 화살이 보였다.

    ‘저쪽이군.’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적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었다.

    탁.

    “말랑...!”

    “미안해.”

    떨어지는 외계생명체를 받아서 다시 머리를 보호한 후, 습격자들이랑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방향으로 달렸다.

    목표로 했던 마을에서 살짝 멀어지긴 했지만,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들에게 죽어줄 순 없잖은가?

    믿는 구석도 있었다.

    ‘체력이라면 자신 있지!’

    상처에서 흘러나온 내 피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탓에 어딘가에 숨어서 따돌리는 건 무리.

    지쳐서 추적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앗!”

    변수가 있었다.

    내 위치를 가려주던 수풀을 가로지르는 비포장도로의 등장!

    지나가는 건 쉽지만, 건너편 수풀로 다시 들어갈 때까지 온몸이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가야지.’

    머뭇거릴 때가 아니잖아?

    도망 자체가 불가능했던 마법소년이랑 비교하면 멀리서 화살만 쏘는 이쪽이 훨씬 쉬운 편이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 발 앞으로 내디뎠는데-

    “헉!”

    헛바람을 들이켜며 멈췄다.

    달그락달그락.

    하필이면 이 세계의 원주민 무리가 내 앞을 가로막듯 지나가기 시작한 탓이다.

    무리 가운데 위치한 호화로운 마차를 호위하는 것 같은데...

    ‘도와달라고 할까?’

    그때, 나랑 눈이 마주친 남자가 새하얀 말의 고삐를 당겨서 방향을 틀었다.

    하얀 피부랑 대조되는 검은 모발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다부진 체격과 조각칼로 깎은 듯한 턱선은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평가할 듯했다.

    달그락달그락.

    말을 몰아서 내게 다가온 그가 입술을 뗐다.

    “누구에게 공격받았습니까?”

    “어?”

    모국어잖아?

    전혀 못 알아듣는 외계어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던 나로선 무척 반가운 희소식.

    걱정거리가 하나 줄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치맥 백작가의...”

    언어가 통한다는 사실에 안도한 내 표정을 오해한 그가 자기소개를 시작하려는데,

    “단장님! 기습입니다!”

    “방패를 들어! 마차로 모여!”

    “대형을 갖춰라!”

    화살이 마차와 호위하는 병사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탁, 탁, 탁...

    대부분은 철로 된 방패와 갑옷에 막혔지만, 이동수단이었던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히이잉~?!”

    “히잉~?!”

    죄 없는 짐승들이 화살에 맞고 줄줄이 쓰러졌다.

    덤으로 나도,

    “으아?!”

    “말랑?!”

    손에 든 외계생명체로 화살을 막으면서 달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화살이 마차에 집중된 덕분에 멀어질수록 화살의 위협이-

    쿠구구구!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상한 기마병 무리가 먼지를 날리면서 빠르게 접근했다.

    “돌겠네!”

    “말랑!”

    내가 핵잠수함이라고 불릴 정도로 체력이 좋긴 하지만, 말보다 빠른 건 아니다.

    따라잡히면 사망 확정!

    저들의 손에 들린 날붙이가 장식일 리 없다.

    휙.

    곧바로 돌아서서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살려주세요!”

    “말랑!”

    현실로 돌아가면 호신술부터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마차 밑을 가리켰다.

    저곳에 숨어 있으란 의미.

    “무기를 주시면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빨리 숨으십시오.”

    “...네.”

    목숨 걸고 억지를 부릴 만큼 만용이 충만하지는 않았던 나는 시키는 대로 마차 밑에 숨었다.

    “얼른 옆으로 오시오.”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마차를 끌던 마부가 선객으로 있었다.

    “이런! 피를 많이 흘렸군. 견딜 만하시오?”

    “어질어질하네요.”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참으시오. 백작가의 용맹한 기사와 병사들이 곧 정리할 테니!”

    “네.”

    마차 밑에 엎드려서 숨어있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말랑...”

    “걱정해주는 거야? 나는 괜찮아.”

    “말랑말랑~”

    법치국가에 태어나서 나라의 보호를 받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군인이 아니니까. 싸울 줄 몰라도 된다.

    위험한 꿈의 세계에 들어갈 마음도 없었고...

    ‘자폐증이라고 방심했어.’

    잠들지 않은 환자의 꿈에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말이 좀 이상한데?

    내가 후회하는 사이, 마침내 두 무리가 충돌했다.

    “마차를 지켜라!”

    “치맥 백작가를 위해!”

    “치맥이여! 영원하라!”

    “치맥! 치맥! 치맥!”

    쾅! 쿠웅!

    마차 밑에 숨어있는 나로선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지만,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바닥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커억?!”

    “악~?!”

    절단된 사람의 팔다리가 피를 뿌리며 떨어지고, 짓뭉개진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너무 현실적이잖아!’

    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처절한 전투.

    현실의 영화에서는 상업성을 위해 너무 잔인한 장면은 감추지만, 꿈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퇴! 후퇴!”

    “이렇게 강할 줄은...”

    “도망- 컥?!”

    전의를 상실한 습격자들이 후퇴하면서 전투가 매우 빨리 끝났다.

    “와아아!”

    “치맥 백작가 만세!”

    “우리가 이겼다!”

    “치맥! 치맥! 치맥!”

    이젠 안전하다고 판단한 나는 마차 밑에서 슬금슬금 기어나갔다.

    “아...”

    그리고 후회했다.

    ‘이게 승자의 모습이라고?’

    이겼다는 기쁨의 함성 뒤에는 살았다는 안도가 숨어있었다.

    “조용! 시체를 한자리에 모으고 생존자를 빠르게 구하라!”

    “네!”

    지휘관들의 신속한 지시로 빠르게 정리됐다.

    아군의 시체는 유품을 챙긴 후에 정중히 땅에 묻고, 적군은 목을 잘라서 머리만 챙기고 몸뚱이는 수풀에 대충 버렸다.

    머리는 왜?

    함께 숨어있던 마부가 내 의문을 눈치채고 설명해줬다.

    “치맥 백작가에 도전한 자들의 신원을 알아야 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죽었잖아요?”

    “낳아준 부모가 있잖습니까?”

    “......”

    당연하다는 어조로 가족까지 몰살시킨다는 말에 몸서리쳤다.

    “상처를 보여주십시오.”

    “네.”

    나는 사양하지 않고 화살에 맞은 부위를 보여줬다.

    “허... 화살이 박힌 상태로 뛰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졌군요. 안 아프셨습니까?”

    “아직은 견딜 만하네요.”

    “인내심이 대단하군요. 분명히 죽을 만큼 아플 텐데.”

    “......”

    내가 예전에 죽어봐서 아는데, 죽을 만큼 아프진 않다.

    “이 막대기를 입에 물으십시오. 그리고 보지 마십시오.”

    “...불안한데요.”

    “지금부터 화살을 뽑을 겁니다. 참으십시오.”

    “음... 큭?!”

    마부는 내 살에 파고든 화살촉을 단검으로 빼낸 후, 상처 부위에 술을 뿌려서 소독하고 붕대로 꽉 동여매며 마무리했다.

    ‘와!’

    이때만큼은 나도 식은땀을 흘릴 만큼 장난 아니게 아팠다.

    “마취도 안 했는데, 비명 한 번 안 지르다니...”

    “진짜 아팠습니다!”

    입에 물고 있던 막대기를 뱉으면서 항의했다.

    “힘드십니까?”

    “네...”

    피로가 밀려왔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도 의문이고.

    “제 옆자리에 타십시오. 가까운 마을까지 태워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기사님의 지시입니다. 저희를 노리는 자들에게 봉변을 당했으니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그렇다면...”

    출혈이 심한 탓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네.”

    습격자들의 말로 응급조치한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 * *

    마을인 줄 알았는데, 내가 중세 시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이게 도시라니...’

    자부심 가득한 마부의 설명에 따르면 평범한 도시도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귀족 ‘치맥 백작’의 저택이 있는 심장부!

    도지사가 사는 광역시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정지. 여기서 정돈하고 간다.”

    “네. 기사님.”

    “마차를 세워라.”

    나에게 맨 처음에 말을 걸었던 잘생긴 남자는 치맥 백작가를 수호하는 기사 가문의 장남.

    그는 이 근방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 멈추지?’

    혼자 고민하지 않고 옆의 마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무슨 정돈을 하나요?”

    “우리의 꼴을 보십시오. 시민들이 놀랄 겁니다.”

    “아...”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했지만,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우리의 모습은 패잔병을 연상시켰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마부는 자신의 짐가방에서 수건과 깨끗한 옷을 꺼냈다.

    한 벌, 두 벌.

    잘못 본 게 아니다.

    “어? 설마, 저도요?”

    “네. 이걸로 갈아입으십시오.”

    “하지만 돈이...”

    강매 같아서 언짢았다.

    “도망치다가 짐을 잃어버리신 분께 돈을 받지 않습니다. 치맥 백작가는 그렇게 야박하지 않습니다. 비싼 옷도 아니고요.”

    “그러면 감사히 입겠습니다.”

    가림막도 없는 야외에서 갈아입는 것이 조금 못마땅했지만, 그것을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와! 뭔 몸들이...’

    갑옷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근육질 인간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부가 평범한 수준.

    ...나?

    수영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없는 거나 다름없다.

    “흠.”

    “왜요?”

    “귀족이셨습니까?”

    내 속옷을 유심히 관찰하던 마부의 오해에 바로 손사래 쳤다.

    “설마요. 귀족이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닐 리 없잖아요?”

    “흠. 실례했습니다.”

    복장을 깨끗하게 정돈한 우리는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달그락달그락.

    포효하는 수탉이 그려진 치맥 백작의 깃발을 나부끼며, 마차는 도시를 감싼 성벽을 지나 시가지와 넓은 광장을 관통했다.

    ‘저긴가?’

    강이 가로지르는 도시의 중심부에 세워진 높은 석조건물.

    현실의 고층건물이랑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서 본 건축물 중에는 가장 크고 화려했다.

    “위대한 치맥 백작 가문의 4녀 안질리나 치맥 영애께서 귀가하셨다! 문을 열어라.”

    끼익-

    저택의 웅장한 대문을 지나서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갔다.

    ‘나도 들어와도 되는 건가?’

    신기해서 계속 구경하다가 얼떨결에 동행하고 말았다.

    덜컥.

    저택 입구에 멈춘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풍성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은발의 미소녀가 내렸다.

    은색 곱슬머리, 새하얀 피부, 사슴 같은 눈망울, 오뚝한 코, 도톰한 분홍빛 입술...

    “아!”

    당연히 처음 보지만, 그런데도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표지의 여자잖아!’

    자폐증 아가씨가 보물처럼 껴안고 있었던 소설책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여주인공.

    그림(2D)과 실물(3D)의 차이가 다소 있었지만, 보자마자 동일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름답지 않소?”

    “아, 네.”

    “그래도 너무 빤히 쳐다보지는 마시오. 안질리나 아가씨를 노리는 신사분들이 하나 같이 쟁쟁하니.”

    “알겠습니다.”

    마부의 충고는 내게 불필요했다.

    예쁜 건 인정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허구의 여성에게 마음을 줄 리 없잖는가?

    그럴 겨를도 없고.

    나는 지금 매우 심각했다.

    ‘백작가의 막내딸이 아니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최강민이 세계를 지키는 마법소년으로 변신했듯이, 그녀가 여주인공 역할을 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외모!

    이 넓은 세계에서 자폐증 환자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