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39화 (40/232)
  • 039화

    태평양 한복판이라고 할 때부터 예상했지만, 감독님과 나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다.

    ‘비행기를 타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나름 만족했다.

    몇 시간을 가도 물만 보이는 바다의 압도적인 면적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멍하니 무슨 생각해?”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있었어요.”

    “거참! 나는 벌써 육지가 그리워지고 있는데, 너는 수영선수가 맞긴 한 모양이다. 적성도 다르면서.”

    “그러게요.”

    심심해서 수시로 말을 거는 감독님의 정신 상태는 나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문수야.”

    “네.”

    “이 배에 귀신 없냐?”

    “갑자기?”

    정말로 미쳐버리셨나?

    “나는 너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무당 일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못 봤잖아.”

    “안 보길 원하셨잖아요?”

    물귀신을 쫓지 말라고 부탁할 때는 언제고?

    황당했다.

    “그건 정규훈련 때의 얘기지! 지금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사육당하는 기분이다!”

    “흠...”

    확실히 그랬다.

    2층 침대 하나만 딸랑 놓여있는 좁은 2인실과 소금에 절인 듯한 형편없는 식사, 시간이 흐를수록 지저분해지는 공용화장실...

    20세기 교도소를 연상시키는 환경인 건 틀림없었다.

    “너는 안 힘드냐?”

    “힘들죠.”

    사실은 전혀 안 힘들다.

    배에서 나오는 식사가 전반적으로 너무 짜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불만 없었으니까.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마음껏 잘 수 있다.

    “하아...”

    “감독님. 조금만 참으세요. 곧 도착하잖아요.”

    “까불지 마라. 그래도 내가 더 어른이다. 이 정도도 못 참고 투덜댈 것 같냐?”

    “......”

    온종일 투덜댄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기가 찼다.

    그때,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안내방송이 들렸다.

    (약 15분 뒤에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배가 흔들릴 수 있으니 객실로 돌아가서 대기해주십시오.)

    “오오!”

    “감독님. 정말로 육지가 보이는 것 같아요.”

    “어디?!”

    “저기요!”

    나는 손끝으로 수평선 저편에 흐릿하게 보이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오오!”

    “...그런데 감독님. 호화유람선에서 훈련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했지. 그게 왜?”

    “저기는 섬이잖아요. 말이 틀린 것 같은데요?”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런가요.”

    “1군이 훈련하는 호화유람선은 저 섬에서 10km 떨어져 있다.”

    “설마...?”

    5km도, 8km도, 20km도 아닌 정확히 10km라고 했다.

    그 얘기는,

    “섬에 도착하면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고, 너는 호화유람선까지 헤엄쳐서 가면 돼. 10km 마라톤 훈련인 셈이지.”

    “미친...”

    정말로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 * *

    감독님이 교통비를 횡령한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숙소는 매우 양호했다.

    넓은 침대, 푹신한 소파, 아름다운 경치, 샤워실, 화장실, 노천탕...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훈련만 없으면 행복할 것 같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자. 문제 있으면 연락하고.”

    “어? 감독님은요?”

    객실을 같이 쓰는 줄 알았는데?

    짐만 놔두고 어디서 잔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

    “감독님?”

    “다른 감독이랑 만나서 밤새 회포를 풀기로 했다. 술도 조금 마실 예정이고.”

    “...그렇군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흠흠! 아무튼, 내일 현지시각으로 6시에 보자. 아침은 호텔 조식을 이용하고, 점심과 저녁은 식단조절을 위해 도시락으로 해결할 거다.”

    “네.”

    “...아! 맞다. 큰일 날 뻔했네! 호텔 밖은 치안이 좋지 않으니 절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마라.”

    “이런.”

    이국적인 거리를 걸어볼 계획이었던 나로선 무척 실망스러웠다.

    “내일 보자!”

    쿵.

    감독님은 손을 흔들면서 객실 문을 닫고 떠났다.

    혼자만 신났다고 할까?

    ‘너무하네!’

    내일 예정되어있었던 10km 마라톤 훈련은 기상악화로 연기됐다.

    하지만 감독님의 말대로라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호텔에 갇혀 지낼 듯해서 관광은 무리.

    나는 객실 식탁 위에 놓인 안내서를 살펴봤다.

    “어디 보자...”

    외국어로 되어있긴 했지만, 관광지이기 때문일까? 하단에 세계공용어로도 표기되어 있어서 읽기에는 무리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외국어를 써먹을 날이 올 줄이야!’

    죽을 때까지 외국에 나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여권을 만들고 외국어로 된 안내서를 읽고 있네?

    이게 단 며칠 사이에 벌어진 변화였기에 믿기지 않으면서도, 힘들게 단어를 암기하고 문법을 공부한 보람을 느꼈다.

    “골프장, 당구장, 헬스장, 야외수영장, 주점, 식당, 편의점...”

    각종 오락과 편의시설이 호텔에 갖추어져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매일 밤 8시에 다양한 콘서트가 열리고, 주말에는 야외수영장에서 서커스가 있다고...

    하지만 날씨가 안 좋으면 자동으로 취소된다고 한다!

    “에휴...”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콘서트와 서커스 외에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정원과 해수욕장 산책이라던가?

    돈이 한 푼도 안 드는 오락거리가 매우 풍성했다!

    ‘가볼까.’

    감독님이 선물로 준 선글라스를 쓰고 객실을 나섰다.

    * * *

    이국적인 나무와 꽃으로 꾸며진 정원을 산책한 후, 태풍 경고로 텅텅 빈 해수욕장의 모래를 밟으며 2시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호텔 최상층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앉아서 냉커피를 홀짝이는 중이다.

    냉커피를 살 돈?

    호텔 투숙객은 하루에 1잔 공짜라는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으리라.

    “...공짜인 이유를 알겠네.”

    커피 맛은 별로였지만,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상당히 아름다웠던 탓이다.

    그래서 멍하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경치를 구경하는데...

    “실례합니다.”

    “아, 네.”

    휠체어를 미는 외국인- 아니, 같은 언어를 쓰는 동향(同鄕)의 여성이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말을 건 여성을 힐끔 쳐다봤다.

    나이는 50대 중반쯤 될까?

    그녀가 미는 휠체어에는 딸로 짐작되는 아가씨가 앉아있었다.

    ‘자폐증...?’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정면만 바라봤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목 주위에는 갓난아기처럼 침과 콧물을 닦아줄 손수건이 둘러져 있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표지에 중세풍 2D 미소녀가 그려진 소설책을 보물처럼 양팔로 꽉 끌어안고 있었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

    책의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짐착할 수 있었다.

    ‘귀족의 눈에 들어서 딸로 입양됐다는 인생역전 이야기로군?’

    내 취향이 아니라서 관심이 금방 식었다.

    탁.

    자폐증 딸을 둔 아주머니는 경치가 잘 보이는 창가에 휠체어를 세우고 옆에 앉았다.

    무척 지친 얼굴.

    나도 사람인지라 연민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이거랑 이거...”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점원에게 주문한 후에 아름다운 경치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딸만 바라봤다.

    물론, 딸은 모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탁.

    “음?”

    부르지도 않은 점원이 다가오더니 내 앞에 비싼 아이스크림과 숟가락을 내려놨다.

    “맛있게 드세요.”

    “자, 잠시만요! 저는 아이스크림을 시킨 적이 없는데요?!”

    너무 놀란 나는 돌아서는 점원의 손목을 잡으며 항의했다.

    “저쪽 손님이 주문하셨습니다. 계산은 이미 끝났고요.”

    “저쪽이라면...”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가 내게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켰다.

    왜 사줬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흠...”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봐도 내가 저분에게 빚진 게 없었다.

    ‘에잇! 일단은 먹고 보자!’

    내가 고민하든 말든 아이스크림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녹으면 아깝잖아?

    다 먹을 때까지도 아주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아이스크림을 사준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 * *

    “와...”

    공짜로 준 냉커피는 실망스러웠는데, 과자와 마시멜로가 곁들어진 아이스크림은 매우 맛있었다.

    딸랑~

    텅텅 빈 유리잔에 숟가락을 넣으며 정리까지 깔끔히 마무리!

    행복하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서 아주머니께 고마움을 전했다.

    “혼자 여행 온 건가요?”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맡긴 채 쉬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요. 합숙훈련을 왔어요.”

    “수련회 같은?”

    “네. 수영선수라서요.”

    태풍이 지나가면 섬에서 10km 떨어진 호화유람선까지 헤엄쳐 가야 한다. 게다가 왕복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우울하다.

    “매일 즐겁겠네요.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훈련이라니.”

    “하, 하...”

    살인적인 훈련 내용만 빼고 본다면 그럴지도?

    최고의 선수에게만 허락되는 국가대표가 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다.

    “얼마나 머무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네요. 보다시피 여기는 외국인이 많아서 대화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왜요?”

    “제가 외국어를 못 해서...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주문이나 인사 정도만 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언어장벽을 감수하면서 해외에 장기간 머무는 이유를 모르겠다.

    “궁금한가요?”

    “네?”

    “여기서 사는 이유요.”

    “...조금요.”

    이 아주머니는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듯했다.

    대화에 굶주렸다고 할까?

    내가 사달라고 한 건 아니지만, 비싼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은 보답을 하고 싶었다. 지금 객실로 돌아가도 할 일 없기도 하고.

    드륵-

    그래서 아예 의자를 하나 잡고 휠체어 근처에 앉았다.

    내 의도를 눈치챈 걸까?

    아주머니가 눈에 띄게 기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딸이 이렇게 되기 전에 생일 선물로 조른 적이 있어요. 이 섬에서 살고 싶다고.”

    “아하!”

    매우 희귀하다는 후천성 자폐증인 모양이다.

    “당연히 안 된다고 했죠. 그때로부터 벌써 1년 가까이 흘렀네요. 모레면 딸아이의 생일이거든요...”

    “힘내세요.”

    아련한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는 아주머니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슬슬 돌아갈까?’

    이대로 좀 더 있으면 그녀의 어두운 분위기에 동조하여 나까지 침울해질 것 같았던 탓이다.

    “마시고 싶은 게 있나요?”

    “어... 그다지...”

    “탄산이 들어간 열대과일 주스가 시원하고 맛있답니다. 강력히 추천해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먹을 것에 약한 나는 빠져나가길 포기했다.

    “딸아이는...”

    아주머니는 딸이 자폐증에 걸리기 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쉬지 않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습관, 취미, 성격...

    좋은 이야기만 있진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뒤부터 아빠를 많이 원망했죠. 자기가 아빠를 닮는 바람에 남자친구가 없다면서.”

    “저런...”

    너무 예민한 것 아닐까?

    내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남자친구가 없을 만큼 못난 얼굴과 몸매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물론, 송선영이랑 비교하면...

    “여자친구는 있나요?”

    “쿨럭! 없습니다.”

    아주머니의 기습 질문에 사레들리고 말았다.

    “눈이 높아서?”

    “아뇨. 연애는 아예 생각조차 못 해봤습니다.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여유가 없었거든요.”

    “저런... 그래도 백마 탄 왕자님만 찾던 내 딸보다는 100배 낫네.”

    “하, 하... 감사합니다.”

    모친이 바로 옆에서 흉을 보는데도 휠체어에 앉은 아가씨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자폐증보다는 식물인간에 훨씬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하지만 양팔로 책을 꽉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의지가 아예 없진 않은 것 같고...

    “저 책은 딸이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이에요. 절대로 안 놓으려고 해서 씻길 때마다 고생이죠.”

    “그럴 것 같네요.”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

    저 소설책의 표지에 그려진 여주인공처럼 은발의 미소녀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이런 여주인공을 등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고 있는 꽃미남이 이상형일지도...

    “졸린가요?”

    “...그러게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네요. 이만 가볼-”

    * * *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뀐 시야.

    고급 호텔의 최상층에서 대화 중이었던 나는 푸른 초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뭐지?’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무심코 돌아본 나는 헛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허, 허, 허...”

    현대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중세 유럽풍 성벽과 마을이 희미하게 보였던 탓이다.

    “미치겠네.”

    졸음이 싹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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