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번뜩!
쇳덩이처럼 무거웠던 두 눈꺼풀이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떠졌다.
“아...!”
그리고 보이는 새하얀 건물 천장.
내가 최강민의 꿈에 들어가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이었다.
삑, 삑, 삑...
내 맥박을 알려주는 의료기기의 소리가 들렸고, 피부에는 빨판처럼 생긴 것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해부해본 건 아니겠지...?’
그만큼 수상한 몰골이었다.
덜컥!
“깨어났군요!”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을 어떻게 안 걸까?
서혜주 과장님이 입원실 자동문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뛰어 들어왔다.
“형~!”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는 최강훈의 모습도 보였다.
무척 반가웠지만,
“최강민은?”
나만 꿈에서 빠져나와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그것부터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눈을 떴어요! 세상에! 7년 동안 꿈쩍하지 않던 환자가 드디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서 말할 기운은 없지만, 이젠 살았어요.”
“다행이네요.”
내가 받기로 약속된 최강민의 치료비가 증발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툭, 툭...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마자 몸에 달라붙은 빨판들이 방해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떼줄 테니.”
“제가 직접 할게요.”
“직접 하는 건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망가지면 수리비가...”
“떼주세요!”
나는 서혜주 과장님이 내 몸에 붙은 의료기기를 전부 떼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링거는 놔둘게요. 최강민 환자랑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지만, 그래도 체력이 제법 깎였습니다. 매우 비싼 수액이기도 하고요.”
“돈은 안 받겠죠?”
“물론입니다.”
퐁, 퐁, 퐁...
서혜주 과장님의 도움으로 빠르게 빨판을 뗀 나는 최강민이 누워있는 침대로 향했다.
“형님. 저, 강훈이에요.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최강훈은 이복형의 삐쩍 마른 손을 잡으며 벌써 대화 중이었다.
형제애가 느껴지는 훈훈한 광경!
‘본심도 같으면 좋으련만...’
완전히 정반대라는 사실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
이복동생의 다정한 물음에 최강민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매우 놀랐다는 분위기를 보였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최강민이 잃어버린 7년이란 세월.
그동안 동생 최강훈은 여자애 같다는 놀림 대신, 여자애들에게 인기 많은 미남으로 성장했으니까.
반면,
“최강민 환자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7년 동안 당신의 주치의를 맡아온 서혜주 과장이고, 이곳은 엘몰랑스 병원의 특실입니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입니다만, 안심할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닙니다.”
“......”
주치의의 설명을 듣는 최강민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고통을 호소하듯 이마를 살짝 찡그린 것 같기도?
“강문수 씨.”
“네.”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환자가 우선이므로 병실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가족인 최강훈 씨도. 안내해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네.”
병원에서는 의사의 말이 곧 법!
우리는 방해되지 않도록 군말 없이 병실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갔다.
“문수 형.”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 나도 돈 받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고마워. 내 억지 때문에 위험할 뻔했는걸.”
“됐어. 도와준다고 약속했잖아.”
지금은 살짝 후회하지만, 충동적으로 약속할 당시에는 진심이었다.
낡은 상가의 단칸방.
부끄러운 나의 집.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훔쳐보는 친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일상일 정도.
이러고도 혹시나 들켰을 때, 내 집이 아니라는 변명과 시나리오도 10가지 넘게 준비했다.
그만큼 감추고 싶은 비밀.
‘나도 참...’
이사 직전에 최강훈에게 공개했을 때는 비웃음을 살 줄 알았다. 부잣집 도련님인 그에게는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 문화 충격으로 다가올 테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여줬다.
놀라긴 했지만, 비꼬는 게 아닌 감탄 섞인 놀람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이런 창고 같은- 아니, 창고로 쓰였던 곳에서 살 수 있을지 의심했고,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진 나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놀라웠다.
그랬기에,
“약속하긴 했지만, 형의 목숨을 위험하게-”
“이 얘기는 그만! 끝!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거야.”
“그래도...
“강훈아. 너도 들어봤겠지? 남자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남자는 힘들다는 이유로 약속을 어기지 않아.”
“아! 응!”
최강훈에게는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진정한 남자’가 들어가자마자 대화가 정리됐다.
물론,
‘약속은 무슨! 돈이 최고지!’
본심은 달랐다.
내가 한 푼도 안 쓰고 5년 동안 아르바이트해야 만질 수 있는 거액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결심까지 오래 걸렸으리라.
“그런데 강훈아.”
“응. 뭐든 물어봐!”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냐?”
“4월 25일.”
“그래? 예상보다 빨리 깼네.”
최강훈에게 일찍 들킨 탓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서혜주 부원장님의 지원금도, 수영 감독님께 부탁해서 얻어낸 긴 휴가도 필요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아저씨의 동영상 외에도 준비한 자료와 계획들은 시작조차 못 하고 끝나버렸다.
‘그 마법사 복장... 마녀 때문에.’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그 마녀가 나처럼 최강민의 꿈에 들어와서 무언가를 한 게 틀림없다.
그녀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최강민의 정확한 위치와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조종했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아! 맞다!”
“뭐가?”
“빨리 종이! 종이와 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펜은 있는데...”
최강훈이 호주머니에서 황금처럼 반짝이는 만년필을 꺼냈다.
진짜 금은 아니겠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해버린 내 자신을 꾸짖으며,
“빌려줘!”
“응.”
만년필을 빌린 나는 병원 복도의 벽에 걸린 설문지 뭉텅이에서 한 장을 꺼냈다.
“이런...”
설문지 뒷면이 공백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슥슥-
꿈속에서 무려 8시간 동안 암기했던 화학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행성의 탄생과 죽음.
그 과정처럼 화학식을 순서대로 표현했다.
발현, 화합, 분열, 순환, 조화...
모르는 용어로 가득한 그것을 통째로 머리에 밀어 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조금이라도 틀리면 하나부터 열까지 검증해야 하기에 백지나 다름없다.
“형?”
“......”
내 어깨너머로 구경하는 최강훈에게 대답해주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위험해.’
꿈을 꾼 사람들은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해봤으리라.
막 깨어났을 때는 생생하게 기억나던 꿈이 세수를 하자마자 빠르게 지워지는 현상을.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8시간 동안 암기한 화학식에 안개가 낀 것처럼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스윽- 뚝.
“됐다!”
너무나 기뻤던 나는 정숙해야 하는 병원이란 사실을 깜빡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완성된 화학식.
다시 한 번 그려보라고 하면 절대 못 할 만큼 아슬아슬했다.
“형. 그 화학식은 뭐야?”
“생명연장의 꿈.”
“유산균?”
“몰라. 나도 이 화학식의 결과물은 보지 못했거든.”
그랬다.
이 당시의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 * *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 가문의 장남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각종 언론사를 통해서 빠르게 소개됐다.
무슨 그룹의 총수 아들이 7년 만에 깨어났네요.
...라는 한 줄 설명 위로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 한 장을 5초쯤 보여주고 끝나긴 했지만.
“뿌듯하네.”
그 사건에 직접 관여한 나로선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특히, 토실토실해진 내 통장!
체육대학 기숙사의 내 침대에 누워서 입금액의 동그라미 숫자를 세는 게 취미처럼 굳어버렸다.
“우헤헤헤...”
몇 번을 봐도 질리질 않는다.
이 돈을 어디에 쓸까?
머릿속에 온갖 선택지가 떠오르면서 정말 오랜만에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출금을 더해서 시골에 편의점을... 아니지. 지금의 내 신용등급으로는 어림도 없겠네.’
좋은 명품을 사거나 빠르나루 레스토랑에 간다는 사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론은?
“...저축하자.”
P의 적성검사가 보급되면서 사회 전체가 효율적으로 바뀐 직업혁명 이전에는 일반인들도 주식에 뛰어들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현재는 적성이 ‘투자자’인 사람들만의 전유물!
민간인이 주식 시장에 뛰어들면?
파고들 틈을 안 주는 주식 천재들 탓에 단타로는 무조건 손해를 보거나 잘해도 본전이다.
이게 상식.
그래서 직접 하기보다는 은행 이자보다 약간 높은 소소한 수익을 기대하면서 주식투자회사에 맡기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나는?
‘바로 써야지.’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실패 안 하는 사업을 해볼 계획이다.
현재는 아르바이트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자신 있는 편의점 주인이 후보 1순위!
...2순위는 없다.
“흠. 돈을 모으려면 수영장 청소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보는...”
딩동♪
침대에 누워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던 나는 기숙사 방의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
“형! 나야!”
“강훈이냐?”
“응! 형님이랑 같이 왔어!”
“...그래.”
최강민이랑 같이 왔다고?
썩 내키지 않았지만, 기껏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할 순 없기에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끼익-
조심스럽게 연 현관문 앞에는 휠체어를 탄 최강민과 그것을 미는 최강훈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다정한 형제.
그런데 그 둘만 온 게 아니었다.
“강문수 씨. 잘 지냈나요?”
형제의 뒤편에는 위급상황에 대비한 의료기구를 챙겨온 서혜주 과장님도 있었다.
아직 몸이 안 좋다는 방증.
그런데도 최강민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리하셨네요. 병원으로 저를 부르시면 될 것을...”
받아먹은 치료비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에프터서비스는 해줄 의향이 있다.
이복형이 탄 휠체어를 방 안으로 밀면서 최강훈이 답했다.
“아빠가 시켰어. 생명의 은인을 하인처럼 부르는 것은 주객전도(主客顚倒)라고.”
“그렇구나.”
이런 부분은 융통성을 발휘해도 좋을 텐데.
그 아저씨는 의외의 부분에서 고지식한 면이 있으셨다.
“형님도 그걸 원했고.”
“......”
최강민이 긍정하듯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형님은 천식으로 기도(氣道)가 많이 상해서 아직 말을 못 해. 그 대신에 손편지를 준비했어.”
“그래?”
정말이었다.
휠체어의 손잡이와 최강민의 오른팔 사이에 반으로 접힌 편지지가 끼워져 있었다.
“형님이 3시간 동안 쓴 거야.”
“......”
편지를 가져가라는 듯이 힘겹게 오른팔을 살짝 드는 최강민.
나는 지지대를 잃고 떨어지려는 편지지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리고 곧바로 펼쳤다.
‘이걸 3시간 동안...?’
길 줄 알았던 편지의 내용은 내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나는 보았기에 확신합니다. 당신은 세계 최고의 변호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재능으로 내 동생을 지켜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변호사.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청사진.
하지만 그걸 제안하는 최강민의 눈빛이 매우 진지했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길 수 없었다.
“지금은 수영선수로 활동 중이라서요. 나중에 고민해볼게요.”
“......”
최강민은 내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최강훈 씨. 형님이랑 먼저 주차장으로 이동하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잠자코 있던 서혜주 과장님이 배턴을 이어받듯 말했다.
“왜요? 제가 들으면 안 돼요?”
“...사업적인 이야기라서요.”
“저도 끼워주세요!”
최강훈의 두 눈이 기대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이에 서혜주 과장님이 난처한 얼굴로 편지를 가리키며,
“민감한 사업이라서요.”
“아...”
이 사업을 받아들이면 최강민이 제안한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의미.
나도, 최강훈도 바로 이해했다.
“과장님.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결정은 온전히 제 몫이니까요.”
미래에서 가져온 화학식도 아직 내 수중에 있고.
“...강문수 씨. 저도 제안 하나 할게요.”
“사업이요?”
“네. 저랑 동업하지 않으실래요?”
“예?”
변호사 다음은 의사?
황당한 제안의 연속이었다.